ARTIST REVIEW 이숙자
작가 이숙자는 채색화의 뿌리가 우리의 전통에 있음을 확신한다. 그는 채색화의 정통성에 대한 강한 신념과 사명감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채색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숙자의 작품에 드러나는 화려한 색채와 선명한 주제는 한국적 정서와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양식의 상징으로 굳건한 생명력을 내뿜는다. 채색화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요기로운 초록빛 환영과 자아
류철하 |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초록빛 환영_이숙자전>(3.25~7.17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제3전시실)은 한국현대미술작가 시리즈 한국화부문 세 번째 전시로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현대미술사 정립을 위해 진행하는 중장기 프로젝트이다. 작가 이숙자는 수묵화 중심의 한국화단에서 전통 채색화의 명맥을 유지해온 독보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이숙자의 회화적 연혁을 약술하면, 홍익대 동양화과에서 천경자(千鏡子, 1924~2015), 박생광(朴生光, 1904~1985)과 김기창(金基昶, 1923~2001) 같은 근대기 한국 채색화의 맥을 이은 대표적인 스승들에게 지도를 받았고, 1963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을 통해 데뷔한 이후 1980년 <국전>과 <중앙미술대전>에서 동시에 대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바 있다.
이숙자는 전통채색화에 대한 탄탄한 기초와 현대화에 대한 다양한 시도, 지속적인 전시를 통해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정작 이숙자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된 작품은 <보리밭과 이브>다. 이 작품을 통해 강렬한 대비를 통한 인상이 대중에게 오래 깊이 각인되었다. 보리를 통한 추억과 향수, 보리 잎이 주는 꺼칠꺼칠함, 일렁이는 눈부신 푸른빛과 추수기의 황금빛 등은 전쟁과 재건, 경제개발 시기를 살아온 세대에게는 하나의 기호가 되어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이숙자의 ‘보리밭과 이브’는 화면 전면을 가득 채운 보리밭과 함께 누드의 이브라는 강렬한 파격과 도발을 동반한 것이었다.
수직으로 상승하는 푸르고 거친 보리의 생동하는 색과 압도적인 군집의 힘, 낱알과 수염의 세밀한 묘사라는 공력(功力) 위에 체모를 과감히 드러낸 채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용감히 누운 근육질의 육체미 여인은 <이브의 보리밭> 시리즈로 탄생했다. 꽃과 나비, 고독과 환상의 누드 여인상은 <이브의 보리밭>에 와서 ‘생명에 대한 직설적 예찬’과 숙명을 거부한 당당한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여인의 자화상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작가는 ‘벌거벗은 이브’에 대해 “살아오면서 갈등했던 여성의 굴레와 인습에 대한 저항의식이 형상화된 나의 내면”이라고 하였다. 보리밭과 여체라는 두 자연의 아름다움은 신의 창조물로서 여인의 몸이라는 찬미와 함께 낙원 추방과 원죄의식이라는 태곳적 풍경을 자극한다.
이숙자가 구성한 보리밭과 이브는 한국적 정서와 미의식이라는 자연의 재현적 풍경(보리)과 함께 강렬한 누드상을 통한 초현실의 감정(이브)을 자극함으로써 현대, 여성, 전통, 채색이라는 미술적 시각 틀을 깨뜨려 나간다. 이숙자는 풍부한 자의식과 강렬한 주관, 깊고 다양한 색감으로 구성된 화면으로 대상을 끌어들여 간략하고 요체화된 풍경(보리밭과 이브)으로 완성시켜 나간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개성 있는 조형성과 색감을 지닌 감각적이고 사실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초록빛 환영_이숙자전>은 한국화와 채색화가로서 작가의 도정, 한국화의 정체성 확립과 한국미술사에서의 채색화의 정통성 수립이라는 과제를 풀기 위해 작가가 도전했던 과제들을 요약적으로 제시한다. 이숙자는 첫 개인전인 1973년 <이숙자 한국화전>에서부터 한국화라는 명확한 이름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전통과 우리 정서의 추구에 집중하였다.
한국 채색화의 정통성
이숙자의 초기작엔 색지함, 목안(기러기), 태극선, 족두리, 댕기, 십장생도, 고가구 등 전통 민예품들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민속적 소재의 독특한 색채감각은 규방과 여인의 다감한 정서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달래색, 배추색, 옥색, 자주색 등 깊게 가라앉은 애환의 색감들은 조선시대 여인의 시름과 한숨, 애환 어린 정서를 상기하게 하였다. 작가는 이러한 애환 어린 정서가 이후 보리밭 작품을 하면서도 이어졌다고 말한다.
이숙자는 원색의 오방색이라는 민속적 기물에서 꽃으로 소재와 관심이 추이되면서 간결하고 극명한 묘사와 환상적인 톤의 색채가 많아졌고, 색감이 풍부하고 다양한 꽃은 색채의 발견이라는 문맥 속에 더없는 소재가 되어 주었다. 한국미의 정체성을 색채 속에서 찾고자 하는 이숙자에게 꽃과 여인이라는 소재는 최상의 것이었다.
이후 이숙자는 1980년대를 통과하면서 보리밭이라는 주제를 택해 집중적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민속품을 통해 한국미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작가가 추구한 한국적 정서와 미의식은 보리밭에 이르러서 비로소 완성된다. 이숙자에게 있어 보리밭으로 상징되는 초록빛 색채에 대한 경험, 보리밭에서 만난 초록빛 환영의 경험은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한 것이었다.
이숙자는 “포천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나지막한 언덕 등성이에 넓게 펼쳐진 보리밭을 보고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다. 보리수염은 초록빛 안개처럼 자욱하게 느껴졌다. 밝은 회청색의 보릿대와 연둣빛 보리이삭 그리고 옆으로 힘차게 뻗은 잎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전생에서나 들어본 듯 느껴지는 뻐꾹새와 종달새 소리가 환상적이었다. … 잠시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음향도 바람도 정지된 한 폭의 짙은 녹색 보리밭은 요기스러운 초록의 공기로 싸여 있는 것 같았다. 검은 제비나비가 펄럭펄럭 그 초록빛 대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가슴속에 쌓였던 감정의 찌꺼기가 한여름철 소나기로 씻긴 것 같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맛보았다.”고 밝히며 “보리밭이 슬픈 빛 정서를 띠면서도 기氣가 살아 요요한 초록빛을 띠는 것은 그러한(민중의 양식이 여물어가는) 희망이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보리밭을 만나면서 민족적이고 민중적 양식의 상징, 고난과 좌절을 넘어선 굳건한 생명력의 발아와 힘을 발견한다. 그리고 보리밭과 함께 여자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인습과 문명에 도전하는 여인의 모습을 상징화했다.
하나의 전형과 양식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열정과 공력을 고스란히 담을 대상이 필요하고 강인한 탐구욕과 견고한 자기세계 그리고 의지가 요구된다. 이숙자에게 있어 보리밭과 이브는 한국적 정서와 함께 열정과 공력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는 대상이 되었고 이브는 강렬한 주체의 상징이 되었다. 채색에 대한 온갖 왜곡을 딛고 석채를 통한 채색의 고유한 색감과 깊이, 그리고 자기세계의 전개는 ‘다이내믹’한 현대사 속에 또 다른 정체성이 되어 새로운 공감을 제시하고 있다. ●
이 숙 자 Lee Sookja
1942년 태어났다. 홍익대학교미술대학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조형학부 교수로 재직(1993~2007)하다 정년퇴임했다. 1973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6회 개인전을 열었다. 제5회 석주미술상(1994), 제5회 대한민국미술인상 – 여성작가상(2011), 제13회 자랑스런 한국인대상 – 미술진흥부문(2013)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