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남경민
이상한 방, 낯선 작업실
남경민은 자신이 동경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차용해 그들의 화실을 꾸몄다.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풍경 속에 머물다>(11.7~12.19)에서 그는 고전을 소재로 우리나라 옛 화가들의 방 안 풍경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꼼꼼한 소품 묘사와 눈길을 사로잡는 색상으로 재현과 상상의 혼합, 동양과 서양이 공존하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양한 서술의 방식이 공존하는 그가 그린 방을 찾아가 본다.
박영택 경기대교수
현대란 역사적 연대기상의 고정된 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되려는 노력의 표현’(서동욱)을 지칭한다. 현대미술 역시 그렇다. 진정한 현대미술이란 현재의 삶과 문화에 대응해 그것에 대한 올바른 사유에 바탕을 둔 미술적 행위일 것이다. 단지 동시대라는 시기에 국한된 미술행위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진정한 현대미술은 현대라는 시기의 삶이 생각하도록 요구하는 문제들에 미술이 밀착하고 대응하는 일이다. 자신이 처한 현재의 삶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힘이 있어야 삶을 밀고 나갈 수 있다. 현대미술은 그런 맥락 아래 출현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와의 마주침을 전제로 한다. 다른 이의 삶과 생각과 마주치면서 비로소 한 미술가의 다양한 실험과 작업이 펼쳐지는 것이다. 고정된, 절대적인 미술의 어법이란 없다. 미술이란 개념도 늘 변화의 과정 속에서 단련된다. 니체는 고정적 진리란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진리의 나타남이란 ‘관점 수립의 문제’이다. 새로운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은 기존의 가치와 진리에 대한 비판에서 나오며 그 기존의 가치를 비판에 부치는 것이 바로 ‘힘의 의지’다. 존재자들이란 힘의 외관이기에 힘의 의지는 존재자들이 서로 부정하지 않고 차이를 지닌 상태로 나타나게 해주는 요소이다.
니체에 따르면 존재자들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다른 존재자를 부정하지도 않고, 다른 존재자와의 차이를 지닌 채 자신의 본성 가운데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니체를 이은 들뢰즈를 비롯 탈근대철학자들이 제기한 중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는 ‘나’에 집착하는 존재론을 깨는 것이었다. ‘나’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나’를 아우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고 ‘생성’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를 알려면 “문밖의 낯선 기호”(들뢰즈)와 부딪쳐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사유가 발생한다. 외부와의 마주침이 없으면 사유와 생성과 변화는 없다. 변화의 계기는 낯선 기호와의 마주침에서 온다. 장자 (莊子)에 의하면 자신이 옳다는 판단을 중지해야 우리는 타자의 움직임에 맞게 자신을 조율하는 섬세한 마음을 회복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 긴장된 균형, 판단 중지의 마음을 일컬어 ‘천균(天鈞)’이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문화의 시스템에 길든 익숙한 일상의 세계를 벗어나는 길이자 라캉 식으로 말하면 상징적인 것이 지배하는 세계를 벗어나 현실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니 작업의 궁극적 의미는 우리가 어떻게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 탈중심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이자 진정한 새로움이란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메시지의 전달에 있다고 본다. 그럼 어떻게 타자를 만나지?
남경민은 자신이 동경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차용해 방을 꾸몄다. 과거 거장들과의 영혼의 교감을 꿈꾸었다고 한다. 작가가 그린 그들의 방, 작업실은 허구의 방이자 환영에 속한다. 미술사를 참고한 공간 연출인 셈이다. 방이란 사적인 공간이고 개인적인 기호와 취향을 반영하는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들로 방을 만들었다. 조선시대 단원과 혜원, 겸재 및 신사임당의 그림이 민화와 함께 그려져 있다. 그 사이로 베르메르나 모네의 그림 등도 슬쩍 끼워져 있다. 서안과 거문고, 경대, 촛대와 서책을 비롯해 문방사우들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는 공간은 그대로 선비들의 사랑방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조선시대로 우리들을 초대한다. 이전에는 서양 작가들의 작품이 주종을 이루었다면 이번 근작은 조선시대로 옮겨왔다. 작가에 의하면 동양을 잘 알고 싶다는 욕망, 그래야 서양 것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라고 한다. 또한 동양화를 ‘현대화’ 하고자 하는 바람도 깃들어 있다. 자신을 이루고 있는 동양적인 것, 전통을 이해해야 나를 온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이며 더불어 지금의 내 안에는 서양과 동양이 혼재하기에 그 둘의 혼융된 상태를 보여주는 화면이 결국 자신의 초상일 것이라는 말이다. 해서 그려진 그림은 시공을 초월하고 기존 자료를 자의적으로 배열해서 이룬 상상화다. 사실 역사란 상상될 수밖에 없다. 남겨진 제한된 유물과 단편적인 기록에 의거해 빈 부분들을 상상력으로 채운 것이 역사다. 작가는 조선시대 겸재나 단원이 거주하고 그림을 그리던 공간, 방 안을 상상해 그렸다. 당시의 물건들, 그림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그 사이로 낯선 존재들이 개입하고 침입한다. 허구적인 이 방 안 풍경의 연출은 정교한 기법에 힘입어 깔끔하게 자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균질하게 마감된, 비교적 커다란 화면에 빼곡하게 자리한 물건들, 화사한 색상으로 도포된 화면, 부분적인 음영 처리, 사라진 그림자, 원근법에 기반을 두면서도 평면적인 화면, 창과 거울, 그림(액틀) 등으로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반영하면서 만들어진 복잡한 공간 연출 등이 눈에 띈다.
동・서양이 조화된 화실
최근 많은 작가가 이렇게 모방과 차용, 패러디 및 이질적인 양식의 공존, 낯선 기호의 충돌, 재현과 가상이 공존하는 묘한 그림을 그려나간다. 기존의 장르개념이나 확고하고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자 ‘나’ 이외의 타자들을 적극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그래서 동서양 미술의 융합, 원근법과 동양화기법의 절충, 고전의 패러디 등이 다반사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의미 있는 작업인지,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작업인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낯선 기호, 이질적인 양식의 공존이라는 손쉬운 해결책으로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사임당의 <초충도> 속의 나비가 동영상으로 날아다니거나 전기의 <매화서옥도〉 속 주인공이 특정 캐릭터로 대체되거나 책가도를 사진으로, 민화를 플라스틱 오브제로 만들어내는 여러 작업을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는 무척 곤혹스럽다. 이처럼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전통에 대한 인식과 그 해석은 이전과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과도한 고민 대신 원본(전통)의 자유로운 참조와 이에 대한 독창적 번역을 과감하게 구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전통이미지라는 텍스트는 고유한 의미를 발현하는 오리지널리티로서의 권위를 지닌 것이라기보다는 원본의 무게가 탈각된, 언제든지 인용하고 조합할 수 있는 수많은 텍스트 중의 하나로 기능한다. 그저 여러 정보 중 하나가 된다. 그에 따라 이 복수적 텍스트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작가에 의해 조작 가능한 수많은 기표로 다루어지고 서로는 자유롭게 접합되고 연쇄된다. 우리 문화 속에 내장되어 온 시각적 텍스트들이 당대 텍스트들과 마구 뒤섞이면서 작품은 다차원의 공간으로 재영토화하고 그 의미는 무수하게 복수화되어 산개한다.
남경민의 그림 속에는 옛사람들이 사용하던 기물과 당시의 그림들이 있는 방에 반복해서 날개, 날개가 담긴 투명 유리병, 화병에 꽂힌 꽃, 스노 볼, 해골, 나비, 손거울 등이 박혀있다. 일종의 알레고리 역할을 하는 도상들이다. 꽃, 해골, 불 켜진 초(꺼진 초), 하나뿐인 날개 등은 죽음, 덧없음 그리고 좌절을 상징하는 도상들일 것이다. 다분히 바니타스 정물화의 도상들을 연상시킨다. 모방해서 그린 그림들 역시 죽은 이들의 그림이다. 화사하고 환하고 명징하게 다가오는 그림 속 이미지들은 실은 부재와 죽음, 소멸 그리고 부재하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동되고 동시에 그것들로 인해 영향 받은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장치들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 영향 받은 것들, 그로 인해 형성된 ‘나’를 재현한다. ‘나’는 이처럼 무수한 타자, 낯선 기호들로 직조되어 있다. 화가들은 미술사를 통해 접한 옛그림을 통해 배우고 깨닫는다. 거장들의 작품을 통해 그림을 익힌다. 미술관과 화집을 통해 영향 받는 것이 화가다. 남경민은 화집 속의 그림들을 차용해서 방을 꾸몄다. 거장들의 작업실이고 작은 규모의 미술관이다. 화면 가장자리에 그려진 커튼은 이곳이 연극무대처럼 가상으로 이루어졌음을 들여다보라는 배려다. 따라서 방을 채우고 있는 무수한 이미지는 저마다 의미를 지니며 서사적 역할을 한다. 단원과 겸재의 방은 그들이 그린 그림, 그림 속에 등장하는 공간, 그들의 생애와 관련된 물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방 안에 있는 그림과 창문을 통해 보이는 그림 속 실제 풍경, 거울에 비친 장면 등이 모두 동일한 그림에서 파생되어 선회한다. 따라서 공간은 다층적인 공간, 열린 공간으로 무수히 확장되어 나가는 느낌을 준다. 실재와 가상이 놀이한다. 눈속임과 트릭이 교차한다. 작가는 이렇게 익숙하지만 한 공간에 공존하면서 낯섦을 유발시키는 기호들을 매끈하고 정교하게 그렸다. 유화로 그려지고 쓰여진 고서화와 한문글자는 익숙한 대상들을 무척 낯설게 한다.
남경민은 한 화면 안에 이른바 동양화와 서양화를 뒤섞었다. 특히 동양화가 유화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고전을 소재로 사실적인 기법(극사실에 유사한)의 그림을 그렸으며 실내를 그린 그림은 정물과 풍경을 동시에 끌어안는다. 개별적인 소품들을 꼼꼼히 재현하고 장식한 그림이자 숨은 그림 찾기처럼 보는 이들을 즐겁게 참여시키는 그런 그림이다. 그리고 동양과 서양이 공존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렇게 이질적인 문화, 기호가 충돌하고 교차한다. 따라서 이 그림 안에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고유한 것, 확고한 것, 단일한 중심은 부재하고 상이한 것들이 어우러져 완성된다. 차이를 지닌 것들이 모종의 중심으로 수렴되지 않은 채 그들 각자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존재한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익숙한 장면이고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어딘지‘언캐니’하다. 친근하면서도 낯선 느낌, 그러니까 원래 낯익은 것이지만 동시에 망각된 것이기에 의식에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불안한 모호함에서 발생한 ‘낯익은 낯섦’이라고나 할까. 근대 이후 한국미술은 동양과 서양의 갈등과 차이 속에서 어떻게 한국적인 현대미술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왔다. 그런데 이 ‘한국적 현대미술’ 혹은 ‘전통의 현대화’란 것이 문제적이다. 그것이 과연 실체 있는 것이 될 수 있나? 그 단어가 성립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전통의 현재화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전통에 기반을 둔 한국현대미술이란 것도 무척 애매보호하다. 이 ‘번역’의 문제를 가장 고통스럽게 인식한 이는 박이소였다. 그는 불가능한 두 영역의 순진한 조우 대신에 그 충돌, 차이, 마찰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한 이다.
남경민은 정보를 재배치하고 이를 사실적인 기법으로 공들여 그린 ‘이상하면서도 예쁜’방을 만들었다. 자기를 이루는 ‘타자’들을 수집했다. 그러고는 이를 재배치했다. 디지털 시대에 정보의 차용과 가상의 연출은 보편적인 어법이 되었다. 이는 동시대미술의 주된 방법론이다. 그 사진·영상이미지의 매끈한 피부 또한 그렇게 이식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보들의 가상적 연출만은 아니다. 그 이상의 감정이나 해석이 빠지면 그림은 공허해진다. 작가의 뜨거운 몸을 관통한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붓질의 맛이나 그림 전체의 회화적 느낌, 여운 등은 그곳에서 나온다. 그림은 한 작가의 몸이 만든다. 아니 몸을 관통해서 나온 것이 예술이다. 정보와 가상의 연출, 집요한 그리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그림이 과연 전통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작가의 몸, 결이 어떻게 화면 위로 배어 나오는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남경민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덕성여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1999년 갤러리 담에서 열린 <창-드러남, 드러나지 않음>을 시작으로 총 9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2006년에는 제6회 송은미술대상전 우수상을 차지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사비나미술관 송은문화재단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