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박영숙

092 2003 화폐개혁프로젝트

위 <화폐개혁 프로젝트> 중 <#2 허난설헌> 디지털 프린트 170×120cm 2003 아래 <화폐개혁 프로젝트> 중 <#3 소현세자 부인 강씨>

박영숙은 사진작가라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여성주의 문화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가운데 올해 5월,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박영숙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이를 계기로 사진작가로서 박영숙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박영숙의 작품세계를 크게 ‘구성사진’, ‘사진가와 피사체의 관계’, ‘사진의 형식적 특징’이라는 세 측면에서 분석한다.

여성적 사진 찍기-그녀가 그녀를 찍다

문혜진 미술이론

박영숙의 사진과 마주쳤을 때 불현듯 어렴풋한 기억 속 엘렌 식수(Helene cixous)의 글이 떠올랐다. 글쓰기가 어떻게 남성중심주의와 동질의 것일 수밖에 없는지, 그 속에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떻게 필연적 소외로 이어지는지를 설파한 그 글은 ‘여성적 글쓰기’의 격동적 가능성을 아름답게 노래했다. 지금으로부터 십 수 년 전에 읽은 그 글이 망각의 심연에서 부상한 것은 실상 우연이 아니다. 박영숙이 사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식수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무기인 카메라로, 이미지로 실천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전 작업은 ‘여성적 사진 찍기’를 향한 끝없는 탐색이자 구애다. 하지만 여태까지 박영숙의 작업에 대한 이해는 다분히 표면을 훑는 정도에 그친 듯하다. ‘미친년’이라는 센 어감이 저널리즘적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메시지(내용)에 주목해 여성주의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해석되거나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사진’을 다시 보고자 한다. 사진가가 여성이고 피사체도 여성인 이 사진이 남성의 사진과 어떻게 다른지, 그녀가 그녀를 찍는다는 것이 매체로서 사진의 구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짚어볼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그녀의 사진이 여성적 사진 찍기를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추적이다. 지면 관계상 핵심적인 부분만 소략하기로 한다.
구성 사진 다큐멘터리 사진이 대세였던 1960~70년대 한국 사진계의 풍토에서, 박영숙 역시 여느 사진가들처럼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보도사진 기자로 오래 일한 전력이 있다.) 그녀의 초기 작업은 별다른 변형을 가하지 않은 흑백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1966년 열린 첫 개인전을 비롯해 각성의 계기가 된 유방암 수술 후의 대표작 <36인의 포트레이트>(1981) 역시 별다른 변형을 가하지 않은 흑백 초상 사진이었다. 하지만 여성주의 의식이 확립되고 문화운동을 본격화한 1990년대 이후 그녀의 사진은 모두 구성 사진(constructed photography)으로 전환된다. 다큐멘터리 사진 및 작가주의 사진의 원칙인 흑백 스트레이트 사진의 퇴조가 작가의 사상적 재탄생과 시기상으로 일치하는 것은 주목해야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스트레이트 사진의 전제는 페미니즘 사진의 이념적 지향과 근본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젠더나 섹슈얼리티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었음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사진 이미지는 구성된 것이고 작가와 관객은 모두 의미 작용의 생산과 해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참여자다. 그런 점에서 사진을 ‘세계에 대한 투명한 창’으로 바라보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개념은 여성주의 사진에 부적합하다. 여성주의적 각성 이후 박영숙의 사진이 연출되거나 구성된 사진으로 전회한 것은 표방하는 메시지에 부합하는 사진 형식에 대한 추구로 정합적이자 필연적인 행보였다.
1999년 이후 현재까지 9개의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는 <미친년 프로젝트>는 박영숙의 연출 사진의 다양한 면모가 포괄된 방대한 작업이다. 여기서 만들어진 사진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인물 및 여타의 사물 이미지를 합성한 포토몽타주와, 인공적 합성 사진은 아니지만 가상의 무대에 특정 상황을 재현한 연출 사진이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 주로 목적이 분명한 외부 전시 출품작인 경우가 많은데, 헤이리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제작한 <헤이리 여신 우매드>(2004)와 돈이라는 주제에 따라 가상의 한국 여성 위인의 화폐 이미지를 구현한 <화폐개혁 프로젝트>(2003)가 대표적이다. 명백히 인위적 구성과 상징이 두드러지는 포토몽타주와 달리, 실내나 야외에서 상황을 재구성하는 연출 사진은 특정 장면을 설정할 뿐 촬영 자체는 조작 없이 이루어진다.
<미친 년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주요 이미지들이 대개 이 부류에 속하는데,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2002), <오사카와 도쿄의 페미니스트들>(2004), <꽃이 그녀를 흔들다>(2005)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때 연출의 정도는 인위적 연극성이 두드러지는 것부터 일상 속 한 장면 같은 자연스러운 연출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일견 스냅사진 같은 가장 일상적인 사진일지라도 관객은 그것이 연출 사진임을 인지한다. 피사체가 사진 찍힘을 주지하고 있고 나아가 주체적으로 상황을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33 2004 Mad Women Tokyo

<미친년 프로젝트> 중 < Feminists in Tokyo #6 >디지털 프린트 120×120cm 2004

139 2005 A flower shakes Her

<미친년 프로젝트> 중 < A Flower Shakes Her #2 > 디지털 프린트 120×120cm 2005

사진가와 피사체의 연대 일반적으로 사진가는 촬영의 절대적 권력자다. 사진기를 총에 비유한 수전 손택의 유명한 말이 아니더라도, 피사체는 찍히는 대상이요 사진가는 찍는 자라는 엄연한 구분은 촬영의 역학을 지배한다. 박영숙의 사진이 남성 사진가들의 사진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녀의 촬영에서 인물들은 수동적 피사체에 머물지 않는다. 박영숙의 사진에서 피사체 여성들은 촬영의 협업자이자 설정한 상황을 스스로 해석하는 연기자다. 작가가 각 상황을 설정하고 구체적 소품과 장소, 인물의 행위를 계획하는 것은 여느 사진가들과 동일하지만, 피사체에게 부여되는 자유의지의 정도가 다른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박영숙의 사진이 피사체와의 공감대 형성을 전제 조건으로 설정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고등어를 토막 내다가, 화단에 물을 주다가, 아이를 돌보다가 문득 넋이 나가버린 그녀들의 심정에 피사체가 동조해야만 사진이 만들어 질 수 있다. 여기서 박영숙의 사진 속 인물들이 왜 모두 사진가의 지인이자 나아가 오랫동안 교류해온 페미니스트 동지들일 수밖에 없는지가 드러난다. 작가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스스로의 경험을 이입해 그녀들을 살아있는 존재로 육화하려면, 피사체가 같은 고충을 공유하고 분투해온 이력이 필수적인 것이다. 이에 따라 박영숙의 피사체-협업자들은 사진가가 고안한 일상의 시공간들을 제 것으로 풀어낸다. 각자의 방식으로 한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일종의 이심동체라고 할 수 있는 이 몰입은 ‘여성으로 살아내기’라는 공동의 원체험에 대한 접속이다. 설정한 상황과 피사체의 실제 삶이 합치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은 박영숙의 사진이 특정 인물의 개인사에 대한 다큐멘터리적인 기록이 아니라 ‘그녀들의 삶’이라는 보편적 지점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리되어 있으나 한 몸이기도 한 사진가와 피사체의 독특한 연대는 <미친년> 연작의 고유성이자 차별점이다. 사진가와 피사체가 완벽히 일치하는 낸 골딘의 자폐적 현실 공동체(그녀의 모든 사진은 자화상과 다를 바 없다)와 달리, 박영숙의 여성 공동체는 훨씬 넓고 열린 원형적인 장이다. 그 속에서 차이들은 녹아들어 다르고도 같은 상징적 유기체가 된다.
내용을 뒷받침하는 형식 사진가와 피사체가 함께 그려내는 여성적 시공간의 구현에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정교한 형식적 지원이 자리한다. 우선 <미친년> 연작에는 구체적 상황을 설명하는 텍스트가 없다. 우리는 사진 속 그녀가 어떤 연유로 욕탕에서 물을 뒤집어썼는지, 자목련 꽃잎 위에 난데없이 왜 드러누워 있는지 모른다. 작업 설명도, 암시를 주는 표제도 없는 까닭이다. 어떤 이야기를 상정하고 있으면서도 구체적 설명을 피하는 것은 관객의 감정 이입을 제한하지 않으려는 의도다. 이미지의 모호성을 텍스트로 고정하면 자신의 방식으로 공감할 관객의 동조 가능성을 차단해버릴 수 있고, 이는 보다 넓은 연대를 추구하는 작가의 의도에 위배된다. 한편 클로즈업이나 반신상보다 인물의 전신상을 선호하는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작가의 초점이 인물이 처한 심리적 억압에 있기에 중요한 것은 피사체의 묘사가 아니라 피사체와 공간이 맺는 심리적 관계다. 심리적 공간에서 인물이 어떻게 억눌려 있는지를 드러내야 하므로 공간 속에서 인물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며, 상황을 몸으로 뿜어내는 인물의 육신 전체를 보여주여야 한다. 군상보다는 단독상이 다수인 것도 동화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피사체나 관객이 해당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진에 하나의 인물인 것이 유리하다. 그런 점에서 같은 설정 사진이어도 제프 월과 박영숙은 다르다. 월의 경우 인물은 설정한 상황을 연출하는 여러 장치 중 하나일 뿐, 공간 속 다른 소품과 위계상 차이가 없다. 반면 박영숙의 경우 인물은 사진의 절대적인 중심으로 사진가와 피사체, 관객을 하나로 묶어주는 축이다. 박영숙의 사진이 심리적 공간으로 배경을 중시하면서도 인물이 약화될 만큼 카메라를 뒤로 빼거나 배경의 비중을 늘리지 않는 것은 인물을 통한 공명이 그녀 사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개별 이미지가 아닌 연작이라는 점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하나가 아니고 복수이기에 작업 또한 여럿이어야만 의미가 있다. 대형 인화되어 단단한 존재감을 갖춘 복수의 그녀에게 둘러싸인 관객들은 실제 인물들과 마주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각기 다른 복수의 관객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녀들과 대화하는 순간, 거기서 또 다른 들림/홀림이 발생하고 나눔의 장이 펼쳐지리라. ●

박 영 숙 Park Youngsook
1941년 태어났다. 숙명여대 사학과와 숙명여대 산업대학원 (사진전공)을 졸업했다. 1966년 첫 개인전 이후 지금까지 12회 개인전을 열었다. 2007년부터 트렁크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으며, 올해 5월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