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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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Net-Being > 폐집어등, 소금, LED, 스테인리스 스틸, 진동자, 스피커, 앰프 가변설치 2016 아래< Net-Being > 폐집어등, 나무상자, 폐선, 무빙라이트, 스테인리스 스틸, LED 가변설치 2012

혹시 어두운 밤바다 저 멀리 수평선을 밝히는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을 본 적이 있는가?
먹고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 벌이는 사투는 그렇게 목격자와의 거리만큼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부지현의 집어등은 그렇게 ‘바다의 별’이 되었고, ‘절제’를 눌러 담은 용기(容器)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담담한 태도로 ‘확장된 판화’의 형식이 되어버린 작가의 집어등에 불을 밝혀본다.

반사하고 비추며 연결되는 인드라망

이나연 미술비평
보들레르의 통찰: “미미하고 아주 적을지라도 ‘현대사회’에 존재할지 모를 신비로운 미적 요소를 밝혀내는 데 투신하는 것보다 그저 ‘현대사회’는 모조리 추악할 뿐이라 단정짓는 일이 훨씬 쉽게 마련이다.” 덧없음 안에서도 영원한 것을 찾아내야 하는 작가의 사명이란, 아름답지 않은 현실에서 끝끝내 실 한 오라기만큼의 단서를 찾아내, 그 한 오라기의 실로 옷을 짓는 일일 것이다. 밤바다가 유난스레 아름다워지는 시기. 오징어잡이 배들이 바다로 나가는 시즌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서로 거리를 두고 오징어가 걸린 그물을 거두어 올리는 배들을 육지에 자리 잡고 관망하노라면, 수평선을 따라 일직선으로 놓인듯 보인다. 하늘과 바다를 잇는 오징어잡이 배에서 밝힌 등. 집어등이라 불리는 이 기능적인 조명은 하늘과 바다를 동시에 배경삼을 수 있다는 기막힌 조건을 이용해 한철 눈부시게 빛난다.
부지현은 자연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집어등에 관심을 둔다. 양성주광성을 가진 어류를 모으기 위해 만들어진 이 도구의 조형성에 사로잡혔다. 그에겐 이 집어등이 ‘바다의 별’로 보였다. 혹자에겐 판화를 전공한 작가가 2003년부터 판화작업으로 주로 찍어낸 어선이 있는 풍경에서 2007년 집어등 설치로 넘어간 경계가 당혹스러울 만도 하다. 그런데 동판화로 형상화된 집어등을 그리던 시기를 넘어가면서, 집어등에 다시 배의 이미지를 판화로 새기던 중간지점이 있다. 설치작을 소개하던 초기인 2007년에 사용하던 집어등에는 일일이 에디션을 단 어선이 찍혀 있었다. 2008년 이후론 레디메이드 폐집어등 자체로 설치에만 주력하지만, 기성품인 집어등에는 마치 판화처럼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다. 어떤 의미로 모든 공산품은 ‘찍어낸다’는 점에서 판화와 닮았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확장된 개념의 입체판화”다. 그렇게 판화에서 시작해 자연스레 설치의 일부분으로 넘어간 집어등은 바람, 수조, 모래, 소금, LED 등을 만나며 번번이 신비롭게 확장됐다.
그의 작업을 처음 본 건 2013년 여름이었다. 푹푹 찌는 날씨에 제주도에서 드문 화이트큐브 공간을 가진 노리갤러리에 들른 참이었다. 문을 통과해 상자 같은 공간으로 들어갔더니 포그머신에서 나온 안개가 투명한 판으로 가로막힌 너머공간에 가득했다. 그리고 안개 사이로 어렴풋하게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집어등 한 줄이 보였다. 안개가 걷혀 시야가 확보되려나 했더니, 다시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집어등은 아스라해졌다 선명해졌다를 반복했다. 그 좁고 폐쇄된 공간에 장대한 바다의 야경이 꾸려졌다. 그의 작업은 이상화된 바다의 모습을 닮았다. 하지만 바다도 집어등도 절대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시 작가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배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불빛이 굉장히 밝고 뜨거움을 주는 고통의 물건”인 것이다. 생존을 위한 밥벌이 공간인 동시에 목숨을 위협하는 공간인 바다에서 뜨거움을 견디며 오징어를 길어올리는 노동의 심상을 부지현의 작품에서 찾기는 어렵다. 굳이 구분짓자면, 바다라는 현장에 침투한 노동의 정서를 전달하기보다는, 바다라는 자연과 어울리는 인공의 미를 극단으로 끌어올리는 시도다. 그래서 작가는 바다의 이중성을 드러내기 위해 거울을 등장시킨다. 상을 똑같이 비추는 거울이 실제로는 허상을 진짜처럼 보이게 만드는 물건이라고 봤을 때, 집어등의 아름다운 표면을 비추는 가짜 이미지를 통해 그 이면을 성찰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게다가 거울은 반사되는 표면의 뒷면에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르는 불투명하고 폐쇄적인 재료이기도 하다. 이 아이러니에 진지한 의미를 담아 끌어들인 거울조차 여전히 표면적으로는 아름답기만 하다. 그래도 작품에 한걸음 더 다가가 깊이 들여다보도록 이끄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집어등의 경우야 부지현의 트레이드마크겠지만, 거울을 재료로 삼은 작가는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쿠사마 야요이의 <거울방>과 김수자의 <숨쉬기-거울여자>다. 거울이 제공하는 공간의 확장성과 반복성에 착안해 환상적인 연출을 한 이 두 작가의 작업 방식에 견줘 부지현의 거울은 좀 더 개념적이다. 사진작가 다니엘 커클라(Daniel Kukla)의 <가장자리 효과(The Edge Effect)>와 설치작가 엘리슨 쇼츠(Alyson Shotz>의 <거울 펜스>가 부지현이 사용하는 방식의 거울에 보다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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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 폐집어등, 나무상자, LED, 거울 실크스크린(100/100) 가변설치 2007 갤러리 모앙 설치광경

담담하게 감정을 자극하다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 다시 자연의 이면을 돌아보게 만드는 식이다. 2013년 시작된 <존재의 그물망(Net-Being)> 시리즈에도 아크릴 미러가 등장한다. 물과 빛, 거울, 유리표면 등 반짝이며 반사되는 많은 요소가 반사하고 움직이고 비춰내고 빛을 내면서 서로서로 영향을 준다. 그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들을 풀어내고 지휘하는 작가에 의해 하나의 섬세한 공간이 탄생한다. 신비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도구로서의 거울을 논하자니 다시 야요이와 김수자의 거울과도 깊은 연관성을 찾을만 하다. 그러자니 넓은 그물의 코마다 구슬이 달려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비춘다는 인드라망이 떠오르기도 한다. 세상에 무엇 하나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고,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작가는 2016년 2월, 제주현대미술관에 두 점의 설치작품을 소개했다. <존재의 그물망> 시리즈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들이다. 계단으로 이어진 갤러리, 발 디딜 공간없이 넓은 바닥 가득 하얀 소금을 채웠다. 파란 워셔액을 넣은 집어등 두 개가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노끈에 덩그러니 매달린 듯-사실은 집어등은 노끈과 별개로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와이어에 연결돼 있다- 설치됐다.
널찍한 하얀 바닥에 가는 선과 여린 푸른 빛과 푸른 액체가 어우러지는 이미지는 정갈하다. 미니멀하다는 표현이 어울림직도 하다.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의 전구를 늘어뜨린 작품 <무제(북녘)>가 떠오르기도 하고, 작가가 그간 해온 작업들-각을 딱딱 맞추고 나열한 다수의 집어등-과 상당히 큰 차이가 포착되기도 한다. 비워내는 경지에 이른 대가의 일필을 보는 기분도 든다. 따지자면, 집어등이라는 소재의 내외부를 집요하게 탐구한 세월만 이미 10년이 훌쩍 넘었으니, 집어등에 관해서라면 감히 마스터라는 칭호를 부과해도 무리는 없지 않겠는가. 사실 이 설치는 2010년 갤러리도올에서 소개한 <휴>와 궤를 같이한다. 관객이 들어갈 수 없도록 갤러리 바닥에 소금을 깔고, 오른쪽 모퉁이에 집어등의 무덤을 쌓아뒀다. 엷은 푸른빛이 사그라질것만 같은 여리여리한 구조물을 자연광이 비추는 설치다. 관객은 육지에서 먼 바다를 내다보듯, 거리를 두고 집어등 무덤을 보게 된다. 역시 곤잘레스-토레스의 <무제(로스의 초상)>가 떠오를 만한 조형미에 한국적이고, 제주적인 자연의 서정성이 보태진다. 결과물 자체만 보면 쿨해 보이는 작품의 안쪽에는 바로 그 서정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의중이 숨어 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제주에서 영감을 얻은 소재를 사용하며, 제주를 기반으로 작업 활동을 이어나간 작가에게, 고향에서 본인이 느끼는 정서를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주된 관심사였다. 육지에서 떨어진 섬의 슬픔과 척박한 삶의 고충, 고립된 갑갑함과 자연이 주는 위협 등의 부정적인 요소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 정서를 안개 속에 파묻힌 집어등처럼, 아스라하고 담담하게 숨겨둔다. 숨어 있어 궁금해지고, 단정한 절제가 깃들어 아름다운 작품은 그래서 역으로 극적이다.
최근 부지현의 관심은 집어등과 거울에서 확장돼, 소리와 소금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가 닿은 듯하다.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 또 다른 설치작은 그간 해온 작업의 모든 요소가 총망라돼 있다. 각을 맞추고 일정 부피를 가지고 깔린 소금바닥 프레임 위로 푸른 LED를 장착한 집어등이 열을 맞춰 정렬했다. 숨비소리, 파도와 바람소리가 섞여 편집된 음향이 공간에 퍼진다. 작가의 작품 대부분에 붙은 ‘휴(休)’의 감각이 몸으로 들어오는 듯한 공간이다. 외부세계와의 연결을 잠시 잊고, 그저 눈앞의 미를 감상하며, 편안함을 들을 수 있는 공간에서 내게 드는 감정은 안심이었다.
묘하게 마음이 놓이고, 내려놓은 마음 때문인지 가지런한 소금턱에, 푸른 빛에 쉽게 감동하고 만다. 아마 작가가 전달하려던 서정의 기운이, 동향 사람인 나에겐 좀 더 절절히 전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별다른 보조장치 없이, 일정한 수분을 접착제 삼아 그 두께와 각을 유지하는 하얀 소금의 존재감이 위태로워서 더 고와보였다. 익숙한 듯 새로운 소리가 감정의 폭을 배가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감정을 담아 풍경을 표현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풍경에 감성을 담는 일’이란 표현을 글로만 읽으면 인상주의 시절의 케케묵은 작품 해설 같다. 그런데 정말로 부지현은 현대미술의 언어로 자신이 느낀 풍경에 대한 인상을 풀어낸다. 신인상주의를 넘어서 대체할 새로운 용어를 찾느라 분주해진다. 제안해보는 표현 하나. ‘설치된 인상주의(Installed-Impressionism)’는 어떨까.
작가의 인상이 시작된 근처 바다로 나가 한 번 더 깊이 고민해 볼 참이다. 힌트를 내비쳤지만, 그가 보고 지낸 바다와 내가 보고 지낸 바다는 똑같은 제주바다다. 곧 오징어잡이 철이 시작될 테고, 부지현의 눈도 나의 눈도 한결 즐거워질 일만 남았다. ●

부 지 현 Boo Jihyun
1979년 태어났다. 제주대 미술학과(서양화 전공)와 성신여대 조형대학원 미디어프린트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부터 1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국내를 비롯해 중국, 타이완, 폴란드 등지에서 열린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중앙미술대전’ 입선, 제주도미술대전 대상(이상 2003), ‘ASYAAF PRIZE 7’(2008) 등을 수상했다. 현재 제주와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