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정영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적멸의 화가, 정영렬전>(8.14~11.2)이 열렸다. 전후 앵포르멜에서 전통적인 한지작업까지, 추상화가 故 정영렬(1934~1988)의 30여 년 작업세계를 대표하는 60여 점이 소개됐다. 이번 전시는 단색화를 중심으로 인식되어 온 한국의 전후 추상미술 흐름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정영렬의 회화 그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다.
청년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김영호 미술 비평, 중앙대 교수
지난 8월 14일부터 11월 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정영렬 회고전이 열렸다. 53세, 지천명의 나이에 아쉽게 생을 마감한 지 26년 만에 열리는 국립 기관에서의 첫 개인전이다. 이곳 덕수궁 전시관을 찾은 신세대 관객들은 이 낯선 화백의 그림 앞에서 세 번 놀란다. 1960년대 전반에 제작된 비정형적 추상미술이 주는 질료의 강렬한 힘에 한 번 놀라고, 그 에너지를 명상의 세계로 급속히 전환시켜 ‘적멸의 세계’로 귀의한 1970년대의 작품 앞에서 다시 한 번 놀라는 것이다. 이윽고 캔버스의 틀을 벗어나 재료로서 한지 자체에 주목하면서 ‘종이조형’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1980년대의 작품 앞에 서면 변혁의 시간을 살았던 작가의 치열한 삶에 고개 숙여 감복하게 된다. 그러나 전시회를 둘러본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미술사가로서 한국 전후 추상미술의 현장을 그대로 반영하는 화백의 작품 발굴과 조명 노력이 미미했다는 자책 때문이다. 정영렬 화백이 운명을 달리한 1988년 이후 워커힐미술관의 <정영렬 유작전>(1995)과 타계 10주년을 맞아 광주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정영렬-침묵의 빛>(1998)이 있었음에도 그의 예술은 여전히 대중에게 회자되지 못했다.
한국의 전후 추상미술 영역에서 ‘단색화’가 핵심적 경향의 하나로 정착된 지도 오래다. 그리고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그 영향력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특정한 미술경향이 화단 현장에서 오랫동안 맥을 유지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전후 한국 추상미술의 맥을 잇는 새로운 경향이 등장하지 못하는 현실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한국 전후 추상미술의 세포분열을 위한 에너지가 모더니즘과 함께 고갈된 것일까? 주변을 보면 추상의 영역에서 새로운 형식의 개발과 매체실험을 묵묵히 전개하는 신세대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추상화 경향이 하나의 미술양식으로 정착되지 못하는 현실을 포스트모던의 기후 탓으로만 돌려야 할 것인가? 한국의 추상미술은 단색화에서 시작해 단색화로 끝나야 하는 것일까? 화려한 색채와 거친 질료의 실험들은 언제까지 단색화의 행로를 위한 수레바퀴로만 존재해야만 하는가? 전시장을 찾은 신세대 작가들에게 정영렬 화백은 자신의 분신인 작품을 통해 말한다. 모더니즘의 핵심 경향으로서 서구 앵포르멜 추상회화가 이 땅에 유입된 이래 자성(自省)과 비판(批判)의 과정을 거치며 펼쳐온 치열한 실험정신은 오늘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다시 묻는다 : 청년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정영렬과 동시대 한국미술의 맥락
정영렬 화백은 한국 현대미술의 도입(導入)과 모색(摸索) 그리고 정착(定着)의 시기인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에 이르는 30여 년의 기간 동안 화단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면서 미술계의 변화와 단절의 마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뿌리를 선불교의 적멸사상에 접목시킴으로써 독자적인 세계를 정립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정영렬 화백의 위상은 그가 남긴 예술적 성과와 국제전 참가 경력 그리고 전위적 그룹 활동을 통해 확인된다. 미술평론가 이일 선생은 그를 한국현대회화 12인의 한 사람으로 주목했으며, 동시대 평단을 주도한 평론가 유준상, 김인환 등과 미술사가 정병관 교수 역시 현대미술을 둘러싼 단절과 지속의 관계항 속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 온 정영렬 화백의 노정에 대해 합당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정영렬 화백은 격변하는 1960년대, 국내외 문화적 상황에 부응하여 한국미술이 국제화단에 진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화가의 한 사람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유럽과 남미 그리고 인도와 일본 등지에서 개최되는 유수 비엔날레와 국제미술제에 연속적으로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현대미술을 국제적 네트워크에 접속시키는 데 기여했다. 1965년에 열린 <제4회 파리비엔날레>를 서두로 1967년의 <제9회 상파울루비엔날레>, 그리고 1970, 1975, 1977년에 열린 <제2회, 제7회, 제9회 카뉴국제회화전>에 출품했으며, 1975년에 열린 <제3회 인도트리엔날레>에 참여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정영렬 화백이 차지하는 위상은 전후 한국미술의 전위적 그룹 활동에서도 드러나는데 1962년에 창립동인으로 참여한 미술단체 <악튀엘>의 위상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밖에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과 <앙데팡당>, <서울현대미술제>, <에콜 드 서울>과 같은 실험미술 단체를 자신의 예술적 산실로 삼고 있었다.
이상에서 보듯 정영렬 화백의 위상과 예술적 성과는 급변하는 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전개 양상과 발걸음을 같이했다. 세속과 타협하기를 싫어했던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정영렬 화백에게 작품이란 삶을 둘러싼 존재의 조건과 투쟁의 방식 그 자체였다. 작품의 미적 자율성이나 경제적 가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만큼 그는 생전에 개인전에 대해 무심했다. 1969년 화백의 고향인 광주에서의 첫 개인전에 즈음해 가진 일간지와의 대담에서 그는 개인전 자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한바 있다. “아마 내 개인전은 이것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그 발언은 그 후 10여 년간 유효했고 1980년에 한국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기까지 지속되었다. 공공미술관이 아닌 국내 화랑에서의 개인전은 1983년 동산방화랑 전시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유일한 것이었다. 작품을 상품으로 여기지 않은 외곬의 성격 탓에 화백의 작품이 화랑이나 미술시장의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작품 제작에 치밀하면서도 열정적인 화가였고 많은 양의 작품을 생산했으며 편집광적인 작업의 결실들은 고스란히 유족의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정영렬 화백의 작품은 캔버스와 종이작업으로 구분된다. 매체를 넘어 시대별로 전개되는 표현형식의 차이로 작품세계를 정리하면 ‘비정형적 추상의 시기’(1959~1974), ‘기하학적 추상의 시기’(1974~1978), ‘종이조형의 시기’(1978~1988)로 나눌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59년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한 것을 데뷔시점으로 삼는다면 이후 전개되는 작가로서의 화력은 30여 년간의 노정으로 마감된다. 이 예술적 노정은 제3공화국 출범 이후 격변의 시기에 전개되었던 외래미술의 수용(受容)과 정착(定着) 그리고 극복(克復)이라는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양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정영렬 화백의 예술적 노정 30여 년은 명확한 마디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전위적 예술가로서 그의 족적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을 재차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영렬 화백은 동시대의 동료들에 비해 덜 알려져 있으나 결코 전위미술의 주변부에 속해 있지 않았다.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실험적 경향들이 미술시장과 타협하고 새로운 제도권미술로 정착한 이후에도 변방의 첨병 역할을 고집했던 그야말로 당대의 진정한 전위적 미술가였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정영렬 회고전의 의미는 우선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로 대변되는 전후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의 비정형적 추상회화의 발아와 성장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역사의 흔적으로서 현대미술의 모색과 정착의 시기로 불리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는 그의 작품에서 ‘단색화’에서 ‘종이조형’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단면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회고전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의 극명한 예술의지와 선명한 작가정신을 발견하고, 추상회화가 지닌 항구적인 가치가 아직도 우리 화단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새로운 형식논리로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영렬 화백은 지적인 풍모와 보스적 기질이 넘치는 화단의 리더였다. 한국적 형상과 빛깔에 대한 탐구와 동양사상의 전통을 예술의 언어로 담아내기 위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 제작에 헌신했던 치열한 정신의 작가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과 함께 불어닥친 평면회화에 대한 도전과 예술의 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술충동의 한 본령으로서 추상미술은 오늘도 굳건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정영렬 화백의 실험정신이 추상회화의 창작과 비평 원리로서 ‘평면에 대한 인식과 페인팅 자체의 프로세스 그리고 질료의 물성’에 대한 재해석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에너지가 될 수 있기를 삼가 바란다.●
故정영렬은 1934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69년 광주 Y싸롱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6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1988년 작고 이후 워커힐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1962년부터 1986년까지 중앙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1976년 카뉴국제회화전 커미셔너, 광주현대미술제 운영위원, Ecole de Séoul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1968년 문예상(문교부)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