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 THEME 올해의 작가상 2015 하태범
한국 현대미술의 비전을 제시할 역량 있는 작가를 후원한다는 취지로 제정된 <올해의 작가상>이 올해 4회를 맞이했다. ‘2015 올해의 작가’ 후보 작가로 김기라, 나현, 오인환, 하태범이 선정돼 각자의 작업세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프로젝트 전시를 밀도있게 선보인다. 전시는 8월 4일부터 11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며 전시기간 중 최종 선정 작가 1인이 발표된다. 취재·인터뷰 이슬비 기자
하태범 |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 Gaze on the Incident
“나 또한 공범자임을 자각하는 순간”
2008년부터 각종 미디어 보도사진에서 주관적인 요소를 제거한 <화이트>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서 ‘화이트’의 개념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무엇인가? 백색은 보통 순결하고 깨끗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의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색은 사물을 인지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면서도 착시를 일으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같은 형태의 사물도 색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지듯이 색은 시각에 많은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사건현장을 담은 사진 속에는 부서진 건물과 울부짖는 누군가의 일그러진 얼굴에 붉은색 핏자국이 드러나면서 현장의 참혹함을 더해준다. 이러한 사건을 바라볼 때 갖게 되는 슬픔과 연민 등 감정을 탈색시키고 하얀색으로만 표현된 현장의 모습은 아무것도 없는 무감각한 상태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떤 사건의 기록 이미지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보도사진을 모형으로 제작해 다시 사진 또는 영상으로 완성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신의 조각과 사진 그리고 영상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야기해달라. 매체는 단지 표현의 수단으로 적절한 방법을 각각의 작업 특성에 맞게 사용했다. 사진작업의 경우 뉴스 미디어에서 보도사진을 대상으로 하면서 사진매체를 적용하였으며 영상작업의 경우 유튜브 등에서 실제 전투 장면을 담은 영상을 모티프로 작업했기에 그대로 영상매체를 사용했다. 조각작업은 약간 다른 의미로서 ‘모뉴멘트’가 갖는 의미를 차용하여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상징성을 말하고자 했다. 이 모든 매체는 방법에서 차이를 갖지만 어떤 대상(사건, 인물 등)을 극단적으로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미디어는 그 특성상 우리에게 공감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먼발치서 바라보는 방관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참고로 사진과 영상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생산되는 모형작업은 표현을 위한 방법적인 과정이면서 사건을 분석하는 과정이라 보면 되겠다.
기존 작업에서 사건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일부러 제거함으로써 사건 자체에 집중했다면 최근 작품에서는 인물이 메인으로 등장한다.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인가? 기존 사진작업과 최근 작업 모두 사건 자체를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사진작업에서 인물을 제거하는 것은 색을 제거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요인 중 인물이 갖는 범위가 크기에 그런 것이다. 반면 최근의 인물 작업은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룬 기존 작업과는 다르게 공익광고에 노출되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우리의 시각에 받아들여지는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인물작업의 경우 구호단체의 배너광고를 보면 그들의 슬픔과 처한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때묻은 얼굴과 허름한 옷차림 그리고 연민을 자극하는 눈빛을 강조한다. 더욱이 그 아이들 옆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짧은 문구가 강렬하게 반짝 거린다. 이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만들어진 작업에서 남은 아이들의 얼굴은 마치 천사를 표현한 고전 조각을 떠올린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 속의 신화처럼 말이다.
당신의 작업은 타인의 고통을 대상화하는 현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작업이 계몽적이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정 부분 계몽적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보다 미디어를 소비하는 나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이기에 누군가의 생각과 관점을 비판하기보다 공감하는지 물어본다는 것이 적절한 대답이 될 것 같다.
작가 스스로 경계하는 한편 미디어에 무뎌지는 딜레마, 죄책감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앞으로 이같은 면을 어떻게 풀어나갈 생각인가? 계속해서 고민할 숙제가 될 것 같다. 작품으로 보여지는 것들은 여과되고 변형된 내면의 기억 속 이미지이지만 그것을 제작하기까지 수많은 사진과 영상을 수집하면서 끔찍한 장면들을 반복적으로 보게 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감정이 무뎌져가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가슴 한구석에 충격의 찌꺼기가 조금씩 쌓여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미디어를 통해 바라본 사건사고의 뉴스를 소비하는 관람자의 자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생산하는 또 한 사람으로서 갖는 딜레마에 따른 상처일 것이다.
여하튼 딜레마와 그에 따른 죄책감이 앞으로 작업을 계속 해나가는 데 크게 작용하는 고민이다. 다만 내 자신이 어떻게 물들고 무뎌지며 혹은 반성하면서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딜레마의 연속을 고민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면 그것이 나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담아내지 않을까 기대해 볼 뿐이다. ‘우리 모두가 공범자’라는 말을 항상 되새기면서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 공간 구성과 동선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그리고 작업실 공간을 연출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금까지 해온 작업을 통해 내가 어떤 얘기를 하고자 했는지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어떠한 과정을 통해 작업들이 나왔는지 이해를 돕고자 했는데 그 방법으로 작업실의 일부를 재현했다. 전시 공간에 처음 들어서면 양쪽 벽면에 양각으로 돌출되어 있는 글씨를 볼 수 있다. 이는 사건사고를 다룬 기사 타이틀인데 우리가 뉴스를 볼 때 가장 먼저 ‘헤드라인’ 기사를 접하게 된다. 하루에도 수없이 떠오르는 기사 타이틀은 정작 사건의 심각성보다 얼마나 자극적으로 전달해 소비되게 할지 고민하듯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다. 그리고 이 통로의 끝에는 아프리카의 한 소년의 눈망울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그 조각상을 지나면 다시 통로가 있고 양쪽에 하얀색으로 제작된 50명의 인물 초상이 보인다. 모두 난민이거나 굶주림과 전쟁에 의해 괴로워하는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의 모습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하얀 판에 새겨진 이미지가 무엇인지 잘 파악할 수가 없다. 이 이미지를 지나면 또다시 한 소녀의 얼굴이 우릴 응시한다. ‘아프간 소녀’로 유명한 《내셔널지오그래픽》 표지사진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다음 지금까지 해온 사진작업과 구호단체의 배너광고에 나온 아이들을 부조로 제작한 새 작업들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꾸며진 작업실을 들어서면 자료를 수집하고 작업을 제작하는 과정의 일부를 엿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동안 해온 영상작업도 볼 수 있다.
이를 보고 나면 사건사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소비하는 나와 우리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다시 돌아나오면서 지금까지의 작업들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이번 전시 구성의 의도였으며 바람이다.
미디어의 범람으로 인해 사람들은 갈수록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리얼리티쇼가 범람해 실제와 가짜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아이러니하게도 가짜를 통해 더욱 강한 리얼리티를 느끼기도 하는데 이같은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본인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한 리얼리티란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기에 리얼리티를 추구한다기보다 오히려 판타지를 꿈꾸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미디어는 우리가 다양한 간접경험을 할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더욱 많은 욕망을 생산해낸다. 실제로 겪을 수 없거나 시간적 혹은 물리적 한계로 경험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장소를 미디어를 통해 보면서 ‘그것’ 혹은 ‘그곳’을 갈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경험’은 흥미롭지만 실천에 옮기는 데 따르는 ‘부담감’을 모르지 않는다. 그 부담이란 생명의 위험, 시간적인 한계 그리고 금전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안전하고 편안함을 인지할 수 있는 상태를 보장하는 범위에서 그런 욕망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 간접경험은 실제가 아니기에 현실에 가까운 경험을 느끼기 위해 더욱 자극적이고 강력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반면 이런 강렬한 경험(?)과 비교했을 때 현실의 내 삶은 너무도 평범하고 지루하다. 그렇기에 더욱 강한 판타지를 꿈꾸고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나의 안전은 보장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넘쳐나는 미디어의 정보는 우리에게 더 넓은 시야를 갖게 함과 동시에 우리 스스로의 한계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한다.
하 태 범 Ha Taebum
1974년 태어났다. 중앙대 조소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 국립 조형예술대학 조소학과를 졸업(MFA)했다. 2000년 서경갤러리에서 열린 <無=有>을 시작으로 서울, 베를린 등지에서 1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송은미술대상 우수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