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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뷔랑 인물 (1)

 철, 프렉시글라스, 접착제 바른 하얀비닐, 거울 217.5×217.5cm 2015

< The grid with 49 squares in frame, work in situ, Seoul NO.6 > 철, 프렉시글라스, 접착제 바른 하얀비닐, 거울 217.5×217.5cm 2015

무한의 영역으로 ‘현장’을 바꾸다

‘인 시튜(in situ)’, 8.7cm로 정확히 구획된 흰색과 원색의 줄무늬. 이는 다니엘 뷔렝하면 떠오르는 일종의 ‘연관 검색어’다. 그의 약력을 보면 거주 및 작업 장소는 늘 ‘in situ’, 즉 현장이다. 70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늘 ‘현장’에 있는 그가 개인전을 위해 서울의 ‘현장’을 찾았다. 313아트프로젝트에서 열리는 〈VARIATIONS, 공간의 미학전〉(6.6~8.8)을 위해 내한한 다니엘 뷔렝을 만났다.

작업에서 공간이 지니는 의미가 중요하다. 이번 전시에서 공간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점은 무엇인가?
313아트 프로젝트는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전면 유리가 있는 갤러리 앞쪽은 보도와 가까이 붙어 있다. 반면 갤러리의 내부는 전형적인 화이트큐브에 가깝다. 보통 작가들이 내·외부 공간을 철저히 구분해서 막는다든지 공간 내부만을 활용하는 데 비해, 나는 닫힌 내부공간을 막기보다 밖과의 소통을 위해 오히려 구멍을 뚫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313아트프로젝트는 건물 입구의 전면유리가 이미 그 구멍 역할을 했다. 그래서 정문에 있는 ‘인 시튜(in situ)’ 작업이 중요하다. 거울을 사용해서 길과 갤러리 안을 연결한다는 의미가 있다. 내부 작업도 거울을 많이 사용해 야외의 길이 내부에 비춰지도록 표현했다. 외부의 길이 갤러리 내부에 있다고 보았다.

‘인 시튜’는 전시기간이 지나면 해체되어 사라지는 현장 작업이다. 최근 인터넷을 통해 이미지만으로 작업을 보는 관객이 늘었다. 이러한 관람 자세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전부터 사진으로 작품을 보는 풍조는 있었다. 여행 할 여유가 없는 학생들이 사진을 통해 작품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잘못됐다. 사진 속 작품과 실제 작품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사진 이미지로만 보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수단 이상은 될 수 없다.

관람객이 확장된 것은 사실 아닌가?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실제로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확산되는 것은 부정적인 결과다. 이미지로만 작품을 기억해서는 안된다. 덧붙여 빠른 속도로 이미지가 전파되는 현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예전에는 나의 작품을 보고 몇 년이 흐른 뒤에 작품을 카피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에 사진이나 영상을 올린 지 1분만 지나도 영감을 얻거나 혹은 카피 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실제 작업이 아니라 사진을 보고 카피했다는 점이다.

큐레이팅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작가와 큐레이터 사이의 개연성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사실 개인전의 경우는 예술가가 기획부터 작품 제작 전체에 관여하기 때문에 큐레이터가 필요 없다. 그러나 그룹전은 다양한 작가와 큐레이터 간의 조율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1970년에 쓴 에세이 〈Fonction du Musée〉에 자세히 서술한 바 있다.

줄무늬에서 흰색과 함께 사용되는 원색을 전시하는 나라의 알파벳 순으로 배열한다고 들었다. 색 배열의 의미가 궁금하다.
50년간 항상 색과 함께 작업했다. 예술가는 ‘비주얼 아티스트’다. 색이야말로 예술가가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색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작품의 추함 혹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색을 사용하지 않는다. 색은 유일하게 말로써 개념 설명이 불가한 구성요소다. 예를 들어 빨간색을 사과색과 자두색 사이 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오히려 설명할수록 꼬인다. 하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유를 담고 있는 것 또한 색이다. 어떤 작품이더라도 색은 그 자체만으로 살아있다. 나의 경우, 하나의 색을 사용할 때는 이전부터 어떤 사용체계를 전달하고자 하는 형태가 있다. 그러나 다수의 색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이 색들이 새로운 하모니를 구성한다. 작품에 사용하는 색을 전시하는 나라 언어의 알파벳 순으로 나열함으로써 나의 취향을 철저히 배제한다. 같은 색을 쓰더라도 나라마다 다른 오더를 사용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전달된다. 색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스스로 이야기하고 나는 그것을 펼쳐놓을 뿐이다. 나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변 사람에게 색의 순서를 골라달라고 할 때도 있다.

당신의 작품은 모더니즘의 거부로 해석된다. 당신의 작업이 꾸준히 변화해왔다고 하지만 큰 그림 안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생각이 유지되고 있는것 아닌가?
큰 틀에서 본다면 맞다. 작업을 하면서 더 나은 해결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이론을 이어가고 있다. 50년간 작업하면서 나는 특정 사조에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 나만의 방식을 고집해왔다. 작업이 객관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이유다. 물론 객관적 지표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작업이 미술사적 연대기 안에 영향을 미쳐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99%의 작가가 근대미술이 추구해온 ‘자율성’을 지닌 작업을 한다. 어떤 화이트큐브에 걸어도 무관한 작업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율성’을 가진 작품은 폭력적일 수 있다. 미술이 ‘자율성’을 갖지 않는 이상 판매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당연한 순리이다. 나는 1% 속에서 작업한다. 물론 나 또한 작품을 판매하고 있지만 공간과 함께 존재했던 작품을 파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감각은 더욱 무겁다. “한때의 그것이었던” 콘텍스트가 함께 이동하는 것이다.

임승현 기자

Daniel Buren 다니엘 뷔렝 프랑스 설치미술가
193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중반 반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6년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관 전시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2005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고 10여 차례 베니스 비엔날레 및 카셀 도쿠멘타에 참가했다. 2012년 파리 그랑팔레 <모뉴멘타전> 2014년 스트라스부르 현대미술관 <Like Child’s Play, Works On-site> 등의 전시를 이어오며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다. 6월 10일부터 8월 8일까지 313아트프로젝트에서 개인전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