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FACE 2015 지희킴
“자화상은 작가 자신의 심리적 전이의 효과들이 기록되는 도상적 기호로, 거기에는 항상 작가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 개인적 욕망을 접목시키고 사회의 표준적 경계 내에 포착되지 않은 모호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마두-여성은 그 자체가 자화상이자 작가의 투쟁 장소이며 혼성과 경계 넘기를 실현하는 시대적 표상이다.”
– 배명지 코리아나미술관 큐레이터
마스커레이드는 끝났다
12시 종이 울리면 신데렐라의 마법은 사라진다. 화려한 치장은 사라진다. 그렇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이 한낮 백일몽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본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최근 지희킴이 선보인 작업은 12시가 지난 신데렐라 같다. 마스커레이드가 끝나고 베일을 벗은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희킴의 최근 작업은 책에 기반을 둔다. 그녀의 북드로잉 작업은 텍스트에 담긴 논리적 인과관계를 무시한다. 그리고 책 위에 드로잉을 그림으로써 텍스트를 지운다. 이 행위는 단순히 글자를 그림으로 덮어쓰는 것이 아니다. 책 위에 그려진 드로잉의 주제는 텍스트의 서술적 내용을 무력화한다. 드로잉은 철저히 개인적인 기억과 감정에 의지한다.
북드로잉 작업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책을 펼쳐서 눈에 띄는 한 단어를 포착한다. 그 단어에 뿌리를 두고 브레인스토밍을 이어간다. 잊고 있었던 내면에 자신을 맡긴 채 생각의 길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기억 앞에 발걸음이 멈춘다. 바로 그 종착지에서 마주하는 장면이 책에 그려지게 된다. 작가는 개인적인 기억의 조각을 책에 활짝 펼쳐 보이지만, 관객이 그 의식의 흐름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는 없다. 마치 남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데 모르는 언어로 쓰여있어서 해석 불가한 상황 같다. 영국 유학시절, 언어의 장벽에 부딪힌 지희킴은 유독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흔히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다”라는 표현처럼 작가에게 독해가 어려운 영문 텍스트 단락은 이미지 덩어리와 같았다. 이미지화된 텍스트 위에 그려진 그림은 레디메이드(책)를 사용한 작업이다. 검은 덩어리(텍스트)와 조응을 이루는 콜라보레이션이다.
의식의 과정을 생략한 결과물로, 내면을 한 단계 감추면서도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지희킴의 작업에서 꾸준히 나타난다. 책을 지지체로 사용하기 전에는 얼룩말 탈을 쓴 여성이 등장하는 회화를 주로 했다. 얼룩말의 줄무늬는 카모플라주다. 얼룩말 모양 탈로 그림 속 인물은 이중으로 자신을 숨긴다. 이를 통해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반항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의 모습을 감춘 여성이 등장하는 유학 이전 작업은 어딘지 모를 불편함이 있다. 반면 유학 후 작업에 등장한 여성은 훨씬 직접적이다. 풍자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여성은 얼룩말 탈을 벗고 실존 인물로 등장한다. 작가는 너무나 명확하게 규정지진 아름다움의 기준에 염증을 느꼈다. 한국 여성은 큰 눈, 높은 코 등 서구의 아프로디테를 설정하고 이를 위해 몸부림친다. 이러한 기준에서 작가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작가는 과연 우리의 이러한 미적 기준이 옳은지 질문을 던진다. 잡지에 등장한 서양모델들을 지知의 아이콘인 책과 함께 배치해 문제를 제기한다. 얼룩말 탈로 얼굴을 가리고 다소 폭력적으로 드러내던 반항적 표현과 사뭇 다른 변화다.
지희킴에게 책은 무한한 자유의 창작소다. 도서관에서 기증 받은 책에는 많은 사람의 추억과 기억이 남아 있다. 책장 사이에 사람을 찾는 편지가 끼워져 있기도 하고, 압화가 발견되기도 했다. 책 위에 식물도감에서 스캔 받은 꽃을 오려붙여 정원을 만드는 작업도 이러한 타인의 흔적에서 시작되었다. 결국 책을 펼쳐 눈에 띄는 한 단어에서 시작해 자기 자신의 의식이 닿는 어느 지점을 표현하거나, 또 다른 책에서 차용한 이미지와 부착해 사회를 풍자하거나, 타인의 흔적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며 작가는 이전보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책이라는 지지체에 의지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작가는 이 위험성을 자각하고 기존의 작업을 확대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 중이다. 앞으로 펼쳐질 지희킴의 작업이 기대되는 이유는 그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 드러날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날 전면에 자신을 드러낼 수도, 혹은 사회나 관객을 드러낼 수도 있다. 자신의 모습을 한 꺼풀씩 드러낼 때마다 우리는 작가와 가까워질 것이다.
임승현 기자
지희킴은 1983년 태어났다. 동국대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골드스미스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7년 진흥아트홀에서 열린 〈Finding my other self〉를 시작으로 서울과 런던에서 4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서울시립미술관, 골드스미스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3월부터 2016년 2월까지 인천아트플랫폼 6기 장기 입주작가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