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FACE 2015 호상근

“이 모든 장면과 그림과 이야기들은 해석하려 하면 미신이 될 것이고, 가까이 다가가면 인생극장이 되어버리기 십상이고 좀 더 가까이 가면 그 장면을 야기한 사회구조와 삶에 관한 불신과 회의와 분노를 일으킬 테지만 거리를 두고 본 이 모든 것은 ‘영감’이라 일컫는 그 어떤 에너지가 되어 목격자나 재현한 자에게 남거나 때때로 휘발하는 성질의 것으로 변모한다.”
– 윤재원 독립잡지 《칠(Chill)》 전 편집장

혼자만 보기 아까운 풍경

‘호상근재현소’. 작가 호상근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수많은 사람과 마주치면서 자신이 본 것(내가 본 것) 혹은 타인이 본 것(네가 본 것)을 넘나들며 일상에서 경험한 소소한 풍경을 드로잉 형식으로 재현한다. 특별한 기준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작가는 사람들과 시시콜콜 이야기하면서 관심이 가는 부분을 포착해낸다. 이때 요구 사항은 한 가지다. TV나 인터넷을 통해서 본 것이 아닌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본 장면 혹은 특이한 꿈을 되도록 자세히 얘기해달라는 것이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 눈에 익숙해져서 주목받지 못하지만 머릿속 한 귀퉁이에 남아있는 구석진 풍경을 끄집어낸다.
손글씨처럼 정감이 넘치는 호상근의 그림은 SNS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호출한다. 손바닥 크기만한 작품이 완성되면 그림은 이야기를 들려준 이에게 우편으로 전달된다. 그림을 받는 이는 오랜만에 손편지 받을 때의 설렘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요즘 손쉽게 타인의 일상을 엿보고 자신의 일상을 노출하면서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을 가볍게 대상화해 현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SNS를 통해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쉽게 볼 수 있고, 덕분에 나도 살아있음을 힘들이지 않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들의 이야기들이 너무 가볍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즘 인터넷, SNS을 통해서 다양한 이미지가 범람하지만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인다.

3_끝까지얘기안하는사랑 사본

<끝까지 얘기 안하는 사랑> 관제엽서에 연필과 색연필 10.4×14.8cm 2014

 종이에 연필과 색연필 21×29.7cm 2012

<부드러운 침범> 종이에 연필과 색연필 21×29.7cm 2012

2011년부터 꾸준히 그린 그림은 어느 새 수 백장이 넘는다.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물어보자 작가는 ‘네가 본 것’ 중에서 한강 둔치에서 운동하는 한 아주머니가 얼굴에 검은 손수건을 얹자마자 빠르게 걸어 나가던 모습을 꼽는다. 천이 얇아서 앞을 보는데 전혀 지장이 없지만 햇볕을 가려주는 편의성과 동시에 속도측정도 가능한 손수건이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집중하는 이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주머니가 살면서 얻은 노하우가 압축된 장면이다. 자신을 소인배라 부르며 겸손함을 보이는 작가는 탑골공원 할아버지들이 손 안 대고 코푸는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타인이 주차하지 못하도록 자리 주인이 만든 다양한 모양의 주차금지 조형물에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한다.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의 단면에 매력을 느끼고 사람들이 살면서 축적해놓은 사소한 삶의 내공에 존경을 표한다.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사회적 모순, 부조리가 가득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작가들도 있지만 호상근은 조금만 관점을 달리하면 “수많은 잣대가 교차하는 치열함 속에서 스스로만의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호상근재현소’는 지금까지 하나의 장소에 머물지 않고 서울, 부산, 청주 등지로 이동하며 사람들의 사연을 모았다. 최근에는 한 라디오프로그램 코너에 고정적으로 참여해 선정된 사연을 재현하고 있다. ‘내가 본 것’, ‘네가 본 것’은 혼자만의 풍경으로 간직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호출된다. 그리고 전시로 펼쳐지며 많은 사람과 기억을 공유하고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같은 풍경을 두고도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느끼는 점이 다르다. 그림 원본이 실제 이야기의 주인에게 전달되다보니 작가에게 작품이 남지 않는 특성상 호상근은 이미지를 모아 책을 만들 예정이다. 그리고 제3자가 그림에 관한 글을 써 이미지와 텍스트의 간극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교차시켜 보여주고 싶단다.
최근 작가는 작은 그림뿐 아니라 대형 캔버스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작은 크기의 작품은 한 화면에 하나의 이야기만 담을 수 있지만 큰 화면에는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상근재현소는 앞으로도 계속돼 다양한 기억의 재현물을 축적할 계획이다.
이슬비 기자

청주 우민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광경

청주 우민아트센터에서 열린 <다시, 그림이다> 전시광경

호상근은 1984년 태어났다. 한성대학교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2012년 꿀풀에서 첫 개인전 <내가 본 것, 네가 본 것: 호상근 재현소>를 열었고 <산으로 간 펭귄>(백남준아트센터), <어쩌다 꾼 꿈>(부산시립미술관), <다시, 그림이다>(우민아트센터)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