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김윤신

한원 (15)

아르헨티나의 자연을 담은 작가 김윤신은 80의 고령에도 청년작가보다 에너지가 넘친다. 전기톱으로 통나무를 잘라 조각하고, 햇살 머금은 빛깔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오로지 조각의 재료에 매료되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터를 잡고 오랜기간 작업해온 작가 김윤신의 화업 60년을 되짚어 보는 대규모 개인전이 6월 11일부터 7월8일까지 한원미술관에서 이어진다. 1세대 여성 조각가의 작품에 담긴 영혼의 울림에 귀를 귀울여 보자.

맑은 영혼이 엮은 생명의 얼개, 김윤신의 회화와 조각

최태만 국민대 교수

6월 11일부터 7월 8일까지 한원미술관에서 〈영혼의 노래·김윤신 화업 60년전〉이 열린다. 1980년부터 상명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김윤신은 1983년 겨울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자연과 문화, 사람에 매료돼 아예 학교를 사직하고 그곳에 정착했다. 그가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후 진화랑(1988), 현대갤러리(1990), 동아갤러리(1995), 박여숙화랑(2003) 등의 초대를 받아 국내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나 2007년 국민일보갤러리에서 회화를 중심으로 개인전을 가진 이후로 보면 이번 개인전은 근 8년 만에 한국에서 개최하는 전시다. 그것도 팔순을 맞아 조각과 회화를 엄선하여 보여주는 전시라는 점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부에노스아이레스 플로레스 지역에 있는 김윤신미술관의 김란 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윤신과 함께 연구실을 방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국현대조각사를 연구하며 1970년대 그의 나무 조각 자료를 수집한 바 있던 나는 그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를 만났다. 팔순의 원로작가임에도 활달한 그를 직접 대하였을 때 평생 작업에만 전념해온 한 예술가의 강한 아우라를 느꼈기 때문에 다른 분들은 김윤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중에서도 1988년 진화랑 개인전에 이일이 쓴 글이 인상적이었다. 이일은 1960년대 중반 파리에서 김윤신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단발머리에다 블루진 바지차림의 그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언뜻 분간하기 힘들었고 행동거지가 또한 그러했다”고 썼다. 과연 그러했다. 내가 만난 김윤신은 작업에 전념하다 방금 작업실에서 출발한 양 수수하다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닐 차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 때부턴가 나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 생각 속의 잡념을 모두 지워버리고 마음과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조각가 최종태 역시 어느 날 나에게 ‘이 나이가 되니 머릿속의 전쟁이 사라지고 생각이 투명해졌다’라고 말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요즘이야 80의 나이가 무색하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어르신을 일러 ‘노익장’이라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공자 때만 하더라도 나이 70에는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하여 종심(從心)이라 했으니 80쯤 되면 온갖 집착과 잡념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에게 김윤신은 투명한 정신을 지닌 원로예술가로 비쳤다. 그런 맑은 영혼은 그의 회화작품에서 깨끗하고 밝은 원색으로 표현된다. 그의 회화에서 특징적인 이 원색의 향연은 팜파스 대평원의 녹색과 푸른 하늘, 광활한 자연에서 성장하는 다양한 나무와 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화면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지그재그의 선은 산수를 단순한 형태로 표현한 고구려 고분벽화를, 그리고 적·청·황·흑·백색은 한국의 전통 오방색을 연상하도록 유도한다. 이 색채와 형태들로 직조된 화면은 말 그대로 낙원의 이미지이자 마음의 풍경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자연에서 추출한 모티프가 분명하게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을 분할하는 면과 면을 연결하는 곡선의 율동은 이 작품들을 서정적인 색면추상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우아한 회화는 그냥 순수한 추상화이거나 색채로 표현한 서정시가 아니라 작가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것임을 다음과 같은 작가노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의 회화작품은, 창세기부터 하느님의 말씀으로 모든 만물의 생명이 잉태된 순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까지, 영원한 삶의 나눔을(合과 分)주제로 하였다. 나눔의 본질은 사랑이며 그 깊은 내면에는 원초적 생명력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그것을 향한 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영혼의 노래, 그 영혼의 소리는 다양한 색상의 파장으로 선과 면을 이루어 사랑과 나눔을 표현하였다.”

어쨌든 나로서는 김윤신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특정한 형태를 입체로 표현하면 그의 조각이 될 것으로 믿는다. 단일한 것이 아니라 수평과 수직의 형태가 결합된 형태 속에 재료 자체가 지닌 결과 다른 결을 더 붙인 조각의 경우 회화와의 관련성이 더 높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조각이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경우가 많으므로 조각의 입체적 구조가 회화에서 평면적인 구성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추측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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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알가로보 50×47×45cm 2014

아르헨티나에 정착하다
1959년 홍익대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기 전해에 열린 제7회 국전에서 〈아침>으로 특선을 하며 조각가로서의 전도가 양양했던 그는 홍익대 미대 재학 중 구상인체조각을 추구하던 김경승으로부터 로댕의 조형을 터득했다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미국에서 철 용접기법을 배우고 돌아와 용접 실기실을 개설한 김정숙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용접기법을 이용한 철조작업을 발표한 것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였으며 사진자료만 보더라도 한때 이 새로운 기법에 깊이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철조작업보다 앞선 초기 작업이 민간신앙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반면 철조에서는 재료기법의 특성 때문인지 형태를 구축하려 했음이 두드러진다.
1964년 파리로 유학을 가서 파리국립미술학교를 다닐 때는 한국의 박을 이용한 부조와 판화에 전념했다. 귀국 후 1970년대부터 그의 작업은 목조에 집중된다. 특히 긴 통나무를 사용해 마치 돌탑처럼 표현한 조각에서는 토템을 현대조각의 논리로 소환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가 민속적인 것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십자가의 형태에 부적에서 볼 수 있는 조형적인 형태를 해체, 재구성하여 새긴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은 그가 파리 유학시절 제작한 판화에서도 나타난다. 자신의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할 즈음인 1973년 그는 권영우, 김구림, 김종학, 김창열, 송번수, 이우환, 정건모 등과 함께 제12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했다. 당시로서는 작품만 출품했지만 이것이 남미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자극했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아예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1974년에는 서울대 미대 출신인 이양자, 안성복 등과 의기투합하여 한국여류조각가회 창립에 앞장섰다. 여성조각가들의 활동무대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미술계에서 ‘한국미술의 발전을 도모하고 여류조각가의 권익을 옹호하며, 여류조각가의 국내외 활동과 상호간 활발한 협조를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1974년 1월 12일에 창립한 이 단체는 그해 9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33명의 창립회원이 출품한 작품들로 창립전을 개최했다. 당시 청주사범대학에 재직 중이던 김윤신은 초대 총무로 활동하며 한국 전통목조건축의 가구(架構)인 공포(栱包)를 연상시키는 작품을 출품했다. 같은 해에는 대학의 한 해 후배인 정관모가 회장으로 활동한 한국청년작가회도 창립했다. 이러한 단체에 왕성하게 활동하던 김윤신은 1983년 12월 학기말을 이용해 조카가 살고 있던 아르헨티나로 떠나 한 달간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기왕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였으니 관광만 하지 않고 대표적인 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하면서 그는 광활한 대지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 특히 유럽이나 미국에서 보지 못한 재료인 단단한 재질의 나무가 지천에 널려있음을 발견하고 아르헨티나에 흠뻑 매료되었다. 그래서 다짜고짜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을 찾아간 그는 이복형 대사에게 아르헨티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대사와 공보관의 주선으로 로베르토 델 비자노(Roberto del Villano)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미술관장을 만난 것은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김윤신으로부터 전시를 하고 싶다는 말을 들은 비나노 관장은 먼저 작품부터 보자고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빈민촌에 임시로 마련한 작업실을 방문한 비자노 관장이 부에노스아이레스식물원의 야외공간을 전시장소로 주선하여 시립미술관 초대로 1985년에 열린 전시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자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아예 아르헨티나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그는 국립미술관(Palais de Glace)을 포함하여 아르헨티나의 여러 도시의 주요 미술관은 물론 멕시코의 국립예술의궁전 등에서 작품을 발표하며 한국에서 온 중남미의 여성조각가이자 화가로서 자기 위상을 구축했다.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후 김윤신은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알가로보, 팔로산토, 케브라쵸와 같은 나무를 재료로 한 조각을 제작했다. 팔로산토는 전기톱을 사용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단단한 재질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무겁고 단단한 나무를 자르고 켜는 과정이 마치 성직자의 수행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김윤신의 조각은 대체로 수직적인 것이 많다. 그것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수직적으로 성장하는 나무의 생명력에 대한 그의 예찬이 추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안〉연작의 경우 축은 수직이지만 그것을 횡으로 감싸고 있는 고리와도 같은 형태가 많은 큐브로 구성돼 단순함 속의 복잡함, 질서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 규칙적이지만 그것을 단순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작품에 운동과 리듬을 부여한다. 겉으로 드러난 형태(shape)가 작품의 옷이라면 그곳에 새겨진 요철과 빗금은 조각의 피부이자 혈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내부로 우리의 시선이 틈입할 수 있는 공간의 여유를 허락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정중동(靜中動)을 획득한다.

20130729

20131018

부에노스아이레스 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김윤신

성장하는 생명에의 예찬
1987년부터 브라질에서 구한 오닉스와 같은 준보석의 돌을 사용한 작품도 발표하고 있다. 톱으로 자른 표면의 무늬는 이 돌에 축적된 시간의 궤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나무와 다른 정서, 즉 무한에의 동경, 대지의 알인 바위가 품고 있는 시간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아가 그의 조각은 수직적이면서도 수평의 구조가 교차하고 있기 때문에 건축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수직으로 직립한 두 개의 나무를 세워놓은 작품은 당간지주를 연상시키고, 나무의 표면에 새긴 사선의 흔적은 대지의 주름을 연상시킨다. 회화에서 보여준 낙원에의 동경이 조각에서는 그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나무들로 향한 생명예찬으로 나타난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변화가 있는 형태와 재료의 질감을 존중하면서 작가의 의지가 깃들어있는 표면의 작업의 흔적은 그의 생각이 자연 너머의 절대자를 향하고 있음을 추측게 만든다. 그것은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초월을 향한 수행의 기록인지 모른다. 아마 그에게 노동에의 헌신은 기도의 또 다른 방법일 것이다. 잡념을 비우고 작업한다는 그의 말, 그것이 최근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전기톱으로 나무의 표면에 상처를 내면서도 그것을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일체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합이합일(合二合一)’은 그래서 왠지 불교의 불이(不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장자의 만물여아위일(萬物與我爲一)의 경지를 추구한다고 할까. 그 궁극에 조물주를 향한 신앙고백이 있을 것이지만 나에게 그의 작품은 맑은 영혼이 엮은 생명의 얼개로 보인다.
불이(不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면 장자의 만물여아위일(萬物與我爲一)의 경지를 추구한다고 할까. 그 궁극에 조물주로 향한 신앙고백이 있을 것이지만 나에게 그의 작품은 맑은 영혼이 엮은 생명의 얼개로 보인다. ●

김 윤 신 Kim Yunshin
193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70년부터 14년간 홍익대 상명대 성신여대 등에 출강했다.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민, 정착해서 활동하고 있고 200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김윤신미술관을 개관했다. 아르헨티나와 서울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고 단체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