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John Baldessari

존 발데사리 (7)

위 < Storyboard (In 4 Parts): Arm of Chair With Mans’ Hand Resting On His Knee >(왼쪽) 혼합재료 82.8×132.7cm 2013   아래 < Double Bill:…And Manet > (왼쪽) 혼합재료 152.4 ×152.4cm 2012

일상적 소재와 새로운 매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유분방한 작업으로 20세기 현대미술의 방향을 상징하는 작가, 존 발데사리의 개인전이 6월 3일부터 7월 12일까지 PKM갤러리에서 이어진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1996년 개인전이 열린 이후 처음 열리는 전시로 2008~2015년에 제작된 작품 15점을 선보인다. 80세가 넘은 현재, 팝아트와 개념미술 계보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경향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현대사회의 단편성들, 그 넌센스의 조합자

진휘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파편처럼 등장하는 일상적 장면들과 그 속에 숨은 현대사회의 민낯, 평이함에 가려진 모순들을 세련된 방식으로 전달하는 작가 존 발데사리 개인전이 서울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그는 모더니즘이 주도했던 1950년대, 미술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탈-모던, 반-모던의 해체적 관점과 대중문화의 급부상을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수용했다. 팝아트의 일상적 소재와 매체의 다양화에 영향 받은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가볍고 자유분방한 취향을 바탕으로 텍스트, 영화 스틸, 사진과 인쇄기법, 동영상, 퍼포먼스, 입체, 설치와 디자인 등 폭넓은 소재의 활용과 작품 제작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하나의 의미로 수렴될 수 없는 부조화의 기호들을 병치하고 분명한 주제의 전달을 방해하는 분절적 방식을 채택하면서 현대 도시와 개인의 삶을 반영하는 작가로 평가되었다. 이런 그의 미술은 20세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와 현대미술의 방향성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개념미술의 역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까지 미술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마르셀 뒤샹이후 언어기호의 사용과 그 구조분석에서 오는 기묘함-탈이성이나 범이성이라고 하기보다는, 단순한 신뢰와 수용에 대한 거부와 확대-을 이용하거나 미술과 예술에 대한 예술, 메타-아트는 꾸준히 탐색되고 시도되었다. 1960년대 이후 이런 경향은 일상과 미술의 관계, 미술과 하위미술(광고, 디자인, 상업적 이미지 등)의 관계, 매체의 전형성과 제작 방식의 회의로 이어지면서 재료와 내용, 작품의 존재 등에 변화를 가져왔다. 개념미술의 또 한 경향은 이미지의 차용인데, 특히 영화나 기타 대중매체에서 생산된 이미지를 선택하고, 그것에 변형을 가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낯익은, 익숙한 이미지의 분절적 상황은 이성적이고 일관된 이해를 좌절시킴으로써, 분명하게 도출되지 않는 기의를 더듬어내는 과정에서 관객들의 다양한 경험을 자극하고 즐거움을 유발할 수 있다. 동시에 로고스로 대표되던 합리적 인식과 기호의 투명성에 대한 반발을 가져왔고, 이것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자 현실문화의 한계로 이해되었다.

개념미술의 반미학적 반관습적 시각
이런 경향을 선도했던 미국 서부 개념미술의 대표적 작가 존 발데사리는 팝아트와 개념미술의 계보에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시각적 요소보다는 문자, 언어를 주로 사용한 회화작품인 글자 작업을 시도했다. 자신의 필치가 작가의 흔적이자 특징이 될 수 있기에 이를 거부하고, 글자를 쓰는 다른 사람을 고용해서 문자를 제작하게 했다. 또는 보편적 언어의 패턴, 공적 글씨 스타일을 빌려오고 장식 없는 글자체를 사용하는 등 작가의 주관성, 창조자로서의 신화를 해체하려고 노력했다.
1970년에는 자신의 대학시절 작품인 1953년부터 1966년에 제작된 회화를 모두 불태우는 〈화장〉프로젝트를 시도, 다 타고 남은 재를 모아 과자로 구워내고 유골함에 넣었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처럼 작품도 종결될 수 있음을 주장한 것으로, 작품의 영원성, 가치의 불변성 등을 거부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작품들은 주로 영화의 스틸컷을 비롯, 사진이미지와 문자(텍스트)를 결합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예를 들어 〈wrong〉연작에선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운 여러 장면과 글자를 함께 보여준다. 일상의 비틀기는 헛웃음이 나오는 유머를 느끼게도 하지만, 어떤 메시지도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 그는 시각적으로 화려하거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작품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미술과 장인정신의 고리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발데사리는 개념미술의 반미학적 반관습적 시각을 강하게 지지했다.
영화 속 배우들의 얼굴이나 이미지를 둥근 원으로 가리고, 서로 일치하지 않는 장면과 전혀 문맥을 파악하기 힘든 문서의 일부(주로 기술적 설명서에서 자주 차용)를 화면 안에 병치하는 방식도 기호의 전달에 스며든 각각의 채널과 상호간 소통의 장애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마 발데사리는 대중적 매체, 예술의 표현들에 숨어있는 어법의 전형화를 꼬집고, 이를 통해 무언가 공감을 창조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거부하길 원하는 듯하다. 이런 그의 작업은 신디 셔먼, 로버트 롱고, 바바라 크루거, 리처드 프린스 등에게 영향을 주고, 1980년대 이후 미국 미술의 중요한 방식의 하나로 자리 잡는다.
오랜 기간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제작하면서 발데사리의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무심함, 심각하지 않은 태도, 그리고 미학적 기술 없음이다. 물론 최근에는 작업방식이 훨씬 깔끔하고 미학적 완성도가 높아졌지만, 작가의 의도는 굳이 그것에 큰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 미국 동부, 즉 뉴욕을 중심으로 한 개념미술은 언어와 그 구조 속에 깃든 인식의 편재함, 관습적 사고와 미술제작의 전통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매체의 서열과 이데올로기, 자본력에 저항했다.
이와 달리 서부 개념미술 작가들은 특별한 사조에 공통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서부 작가들은 모더니즘적 전통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또한 미술사적 관습에 대항하는 방식에서도 조금 자유로웠다. 그들은 감성을 강조하거나 작가마다의 개별성을 존중하고, 이질적 상황이나 내용을 연결시켰다. 발데사리는 그런 점에서 서부 개념미술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생산한 다양한 대중적 이미지를 적극 사용하고, 그것에서 어떤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기보다는 맥락과 부분의 관계에서 보이는 애매성, 소위 메시지의 본질과 매체의 속성에 대한 질문, 그로부터 파생된 단편성과 유머, 재미 등을 추구했다. 언제나 영화, 문학, 기술 등 일상적 소재를 적극 수용하고 쉽고 단순한 이미지를 생산하지만, 동부의 남성성이 이끄는 거대하거나 치밀함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번 서울 전시에서 작가는 그의 특징적인 작품들을 보여준다. 〈Double Bill〉에선 미술사 거장들의 회화와 현대 이미지를 결합시켜서 이미지를 모호하게도, 동시에 대가들의 특징을 부각할 수 있도록 작품을 구성했다. 〈Pictures & Scripts〉는 영화의 한 장면과 상관없는 텍스트의 결합을 시도했는데, 발데사리의 대표적 구성법이다. 이질적이고 상이한 방향과 해석을 지향하는 기호의 충돌은 결국 어떤 의미로도 수렴될 수 없는 딜레마를 제공한다. 〈Board play〉 연작은 한 작품을 구성하는 주된 색채를 도출하고, 그것과 관련되기도, 관련 없기도 한 다른 이미지들을 병치하는 일종의 스토리보드 형식을 가져왔다. 영화나 광고에서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작가는 통일을 위한 과정이지만, 파편화되고 분절된 실체를 갖는 이상한 조합을 보여주었다. 전시에서 다 볼 수는 없었지만, 여러 매체, 다양한 레퍼런스들, 복합적 차용의 역사가 느껴졌다. 이런 긴 작품 활동을 이어오면서 그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기호들의 모호함, 언어, 시각적 이미지들과 그것의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허위의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비판한다고는 할 수 없다. 불일치를 받아들이고 다양성을 통해 시각예술의 범주를 확장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발데사리 미술의 특징으로 보인다. 단편화된 기호들과 파편화된 문장들을 표현함으로써, 현대 대중문화의 속성뿐 아니라, 단절과 몰이해, 소통의 부재와 표피적 관계의 일상성을 가리킴으로써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침투한다. 도시의 일상, 시각기호로 가득 찬 공간의 모습이 소외되고 주변화된 인간들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도 공감을 불러온다.
이번 전시 작품에서 보듯, 그는 화면을 그리드처럼 나누고 부분과 관계의 독립된, 또는 모호한 관계를 강조한다. 병치와 화면분할이란 형식과, 하나로 융합되지 못하는 관계라는 주제는 서로를 보완하고 더욱 굳게 한다. 작품의 어법과 메시지의 불변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그의 작품을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소통의 대상이 발견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개인전이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 열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또한 점차 장식적으로 변해가는 화면도 거장이기보다는 노장으로서 발데사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기운 빠지는 대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