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김미경 서 있는 시간
갤러리 비원 6.1~30
정현 미술비평
저마다의 욕망으로 가득 찬 도시의 소란스러움은 ‘사색’의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명상과 사색마저 자기 개발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는 성공만능주의 시대에서는 예술도 현실만큼 뒤틀리고 소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사색마저 생활의 지혜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된 셈이다. 김미경의 전시 <서 있는 시간>은 전속력으로 앞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에 길든 사람들에게 시간에 끌려가지 말고 시간을 마주하라고 말을 건넨다. 그녀의 회화는 작은 화폭 위에 미디엄을 이용해 여러 겹으로 색을 입히는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이전 작업에서는 이 겹들의 층이 두드러졌다. 반투명한 평면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통해 각 층의 색들은 서로 겹치는데, 이러한 겹침으로 나타나는 색은 광채를 띠기까지 했다. 이전 작업이 일련의 물리적 과정에 의해 겹침의 효과를 극대화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겹침보다는 스며듦을 강조하는 듯하다. <My heart is bleeding>(2013)은 흰 바탕 위에 강렬한 붉은색 직사각형이 화면을 분할한다. 두 개의 화면으로 구성된 <I write a letter(diptych)>(2014)는 마음의 상처를 써내려간 것처럼 붉은색 직사각형이 화면 상부에 수평으로 위치하고, 다른 화면은 빈 종이처럼 다음의 문장을 기다리는 것만 같다.
사실 한국 미술계에서 추상회화는 대중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최근 단색화 붐이 일어났지만, 개인적으로는 단색화에 대한 관심은 추상회화에 대한 관심과는 다른 것 같다. 헬 포스터의 말을 빌리면 “시뮬레이션의 시대에 추상화를 부흥시키려는 시도는 ‘자본의 추상화 과정’을 흉내 내려는 기회주의적 시도라고 생각한다.” 미술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웅장하고 영웅적인 해석을 강요당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으며, 무엇보다 예술을 통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보려는 여러 입장 덕분이었다. 추상을 개인적 차원의 감정이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관습을 파괴한 혁명적 실천으로 볼 것인지는 결국 미학이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W. J. T.미첼은 추상회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굳이 거창한 회화론이나 주체성을 운운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한다. 오히려 그는 작품에 다가가는 관객의 자율성과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종의 친밀감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교조적인 추상미술의 강령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신화적 영웅을 알현하기 위해 추상미술을 관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작품에 대한 친밀감이 샘처럼 솟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모방과 재현의 패러다임을 벗어나기 위해 형상을 지운 추상미술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미학적 강령 대신 작품 자체에 집중하라는 조언과 더불어 추상적 이미지는 이미 고대부터 존재했다는 익히 알려진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김미경의 회화는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다. 작품은 관객에게 자신에게 관심을 달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명상하라고 주문을 걸지도 않는다. 물론 전시장의 상태와 작품의 배치에 따라 이러한 느낌은 달라지겠지만, 내게 이번 전시는 내가 굳이 작품에게 말을 건네지 않아도 무방할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건 마치 편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드는 기분에 가까웠다. 친밀감은 소통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자유로운 상태일 것이다.
위 갤러리 비원에서 열린 김미경 개인전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