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권경환 & 금혜원 한숨과 휘파람
원앤제이갤러리 4.15~5.13
김남인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노래의 기원을 두려움과의 관계에서 찾기도 한다. 어두운 곳을 혼자 걸어갈 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아이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존재는 감지하지만 정체를 파악할 수 없을 때, 아이는 발소리를 크게 하고 노래를 부르며 자기 주변의 공기를 흩뜨려 본다.
권경환·금혜원의 2인전 <한숨과 휘파람>은 지금 시대의 이주(移住)와 정주(定住), 그리고 그것이 파생시키는 삶의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권경환은 철제 앵글을 활용해 전시장 곳곳에 어떤 구조물들을 설치해 놓았다. 작품들은 최소 단위의 앵글들이 연결된 형태이기 때문에 조립, 분해, 재조립이 용이하지만, 추상적이면서도 아직 하나의 완결된 기능성에 이르지 않은 상태라 불안정해 보이기도 한다. 벽의 한쪽 구석이나 모서리의 형태에 맞춰 설치된 크고 작은 구조물들은 주어진 공간의 크기가 구조물의 규모를 결정짓는 공간의 메커니즘을 부각시킨다. 색이 칠해진 앵글들을 볼 수도 있는데, 이때 그가 사용한 재료는 외부 구조물의 부식을 막는 방청도료이다. 임시 구조물의 건축용 재료들은 작가에 의해 추상적, 기하학적 형태들로 만들어지고 전시장에 배치된다. “가정식 조각-균형”과 같은 작품 제목은 현재 주거문제로 말미암아 이동과 정착을 빈번히 반복해야 하는 사람들이 편의를 위해 선택하는 조립과 해체식 가구를 구체적으로 떠올린다.
권경환의 작업이 공간을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그곳에 맞추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상기시킨다면, 금혜원의 사진작업들은 공간을 한때 점유했었으나 이제는 떠나가버린 삶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5년 이상 사용되지 않는 공간으로 남아있던 질병관리본부의 건물 내부를 촬영한 작가의 사진들에는 무신경하게 놓인 판자, 영화 포스터, 낡은 의자와 전화기 등이 등장한다. 얼룩덜룩해진 녹색의 유리창 시트지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캐비닛 안의 물건들은 정체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 먼지가 자욱하고, 누가 누웠을지 모르는 침상은 그 부재의 존재감을 드러낼 뿐 시커멓게 때가 타 있다. 당직실이 갖는 공간의 임시성은 많은 사람이 머물러야 했지만 결국 주인 없이 방치될 수밖에 없는 공간의 운명을 예견한다. 사진의 구체적 시간성은 영화 <타이타닉>(1997)의 포스터와 같은 사물들의 존재로 암시될 뿐이다. 내부의 공간 곳곳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버려진 공간들로부터 어떤 정서들을 이끌어낸다. 한 개인이 사용했을 물건들이 버려진 채 나동그라져 있는 장면을 가만히 보다 보면 지금의 삶들에 존재하는 숱한 유기(遺棄)의 가능성이 떠오르기도 한다.
1층과 2층 전시장이 무게 중심을 달리해가며 두 작가의 작품을 공간상에 함께 배치했다면 3층에 전시된 <한숨과 휘파람>(2016)은 금혜원의 사진 속 공간이 물리적 공간으로, 권경환의 기하학적 조형물들이 내러티브의 단서들로 치환된 듯한 설치작품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본 설치작업에는 ‘소리’가 작품의 새로운 요소가 된다.
오랫동안 버려진 빈 공간에서는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는 바람소리, 삐걱거리는 소리, 금속 울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짐을 정리하며 한동안 사용하던 책장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이주자들이 있을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공간을 찾고 그 공간 안에서 살아갈 방법들을 궁리한다. 그 궁리는 실질적이지만 또한 절박한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소리처럼 삶의 토대에 대한 두려움은 산포된다. 발소리와 노래를 말한 이유는, 이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길을 터가는, 옮기고 옮아가는 많은 사람의 움직임 속에서, 두려움을 헤쳐 나가는 예술 행위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두 작가의 작품이 서로의 이해를 도우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문제의식의 지점을 환기시키는 전시였다.
위 원앤제이갤러리에서 열린 <한숨과 휘파람> 전시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