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이윤엽 남풍리 판화통신
트렁크갤러리 3.5~31
이윤엽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부터 지금까지 주로 민중의 투쟁 현장에 참여했고 그것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 온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이 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작업과는 사뭇 다르다. 실제로 그는 “주먹 불끈 쥐고 머리에 띠 두른 것 말고 정말 민중이란 걸 형상화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김규항, <민중의 싸움터에 힘을 주는, 나는 파견 미술가>, 《한국현대미술선 25: 이윤엽》 (서울: 핵사곤, 2015), p128.) 여기에서 우리는 민중의 아픈 현실과 그에 대한 저항을 그린 1980년대 민중미술을 전화시키려는 의도를 보게 된다. 그에게 이제 민중의 형상화는 그들의 일상적 삶, 그리고 그 삶 속에서 그들의 시선에 비친 자연을 그려내는 것을 의미한다.
트렁크갤러리에서 3월 5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이윤엽의 “남풍리 판화통신”에 소개된 판화들은 남풍리의 굽이굽이난 길을 따라 산책하며 볼 수 있는 풀덤불과 엉겅퀴, 집 지키는 똥개들과 감나무 그리고 풍성한 여름 밭 등의 풍경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그리고 이 풍경에는 봄이 다가오면 농사일로 몸과 마음이 바빠지고, 여름 장마철에는 비닐우비를 입고 나와 논밭을 살피는 농부의 이야기도 있다.
그의 주변에 대한 애정과 발견의 기쁨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매체와 형식적인 면을 통해 잘 표현된다. 그가 창안한 ‘합판나사접합판화’ (목판 대신 파편합판을 못을 이용해 이어 만든 목판)와 ‘소멸식 다색판화’는 다른 매체보다 소형인 판화를 큰 이미지로, 컬라 판화로 만들 수 있게 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판화형식이 판화와 다른 매체 사이의 경계를 흔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관객이 작품의 조형요소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작품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게 하고 재현하는 대상을 여러 층위로 드러나게 한다.
장마철에 우비를 입고 삽을 가지고 나온 농부의 모습을 재현한 <비오는 날>은 ‘합판나사접합판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보통 목판은 판화칼로 깎기 때문에 칼 맛과 함께 양각과 음각의 조화, 선과 면 사이의 관계 등 “판” 안에서 생성되는 여러 시각적 요소 사이의 관계성이 중요시된다. 그에 반해 <비오는 날>은 여러 합판을 나사못으로 연결해 구축적인 목판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목판은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대체로 접합판화 형식을 썼지만 한 인간의 삶이 잘 드러나는 얼굴과 손은 판화칼로 묘사했다. 주름진 얼굴과 옆으로 긴 눈, 입가의 팔자주름, 그리고 밭일을 많이 해서 벼알이 여문 것처럼 탱탱하면서도 딱딱한 손의 현실성과 서술성은 기하학적 추상 같은 농부의 우비와 대비되어 더욱 강렬하다.
이와 같이 그의 작품은 판화와 조소, 평면과 입체, 양감과 표면 등 여러 경계를 가로지르며 자신의 주변과의 관계를 시각적 언어의 다양한 표현을 통해 보게 한다. 아마도 그가 생각하는 민중미술이란 단순히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술적 표현 안에서 이웃들의 시선과 삶의 방식을 보여주며 작가 자신이 그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구체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유혜종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