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젊은모색 201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2014.12.16~3.29
“우리가 이 때문에 이전의 삶을 버리고 사막에 오게 되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이 [적어도] 이야기의 소재가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Douglas Coupland, 《Generation X: Tales for an Accelerated Culture》,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1, p.8.)
쿠플랜드의 《제너레이션 X》는 전쟁 직후 유럽의 젊은이나 1990년대 일본에서의 신인류가 그러했듯이 무기력한 현실에서 그저 자신들의 도피처인 환상과 같은 설화(Tale)에 빠져버린 회의주의적이고 자기폐쇄적인 미국 젊은이들을 가리킨다. 2015년 새해 벽두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젊은모색2014전> 이라는 ‘일상의 잔혹동화’도 한국 젊은 세대들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고 여기거나 격리되고자 스스로 원하면서 만들어낸 개인적인 상징과 이야기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필자는 이제까지의 <젊은 모색전>이 대부분 ‘젊은 작가’라는 모호한 기준하에 다양한 매체를 다루는 작가들을 분배하듯이 선정해온 것에 비해 이번 전시가 우리 사회 청년들의 상황을 보다 전면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 주제 위주로 꾸려졌다는 점이 반가웠다. 하지만 우리 사회 청년문제가 결국 전체 사회구조적 문제임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청년들의 문제가 잔혹동화나 88만원 세대 정도의 주제로 축약, 분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잔혹동화의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특징은 젊은 세대의 소극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만 부각시킬 수 있다. 덕분에 필자는 젊은 세대 작가들과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동화가 아니라 잔혹성에 대항하는 연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비평적 연대에 대해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은 참여한 작가들의 고민이 지나치게 우회적으로 표현돼 있으며 그 고민의 출발점도 피상적이거나 모호했기 때문이다. 노상호는 작가가 만들어낸 설화의 이미지들을 관객이 랜턴을 비추면서 재구성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정작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된 동네에 대한 ‘설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 시대에 억압돼서 재발굴되어야 하는 사회적 진실을 말하고 있으며, 빛을 비추는 관객의 행위와 연관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유추해 내기 위해서는 관객들의 엄청난 상상력이 요구되었다. 오민이 말하는, 인간을 억압하는 족쇄와 같은 규칙들이 깔끔한 실내 영상을 통해 관객들에게 절실하게 전달될지도 의문이었다. 조송의 박제화된 동물들 이미지와 설치가 작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암울한 정서적 상태가 아니라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특정한 비판적 이슈를 전달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물론 이들은 직접화법이나 투쟁적 자세를 지양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폐쇄적인 상태에 놓여야만 했던 젊은 작가들의 고민을 관객이 공유하게 하려면 비평의 쟁점을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오히려 전시에서는 암울하고 답답하면서도 가벼운 일종의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외형들만이 강조돼 보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21세기 한국 젊은 작가들이 사막에서 방향성을 잃고 자신들만의 이야기나 만들어가면서 만족해야 한다면 이들이 처한 정서적, 사회적, 미학적 난관들을 피상적으로 묻어둘 것이 아니라 다각적으로 세분화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관객은 왜 이들의 대응전략이 개인적인 상징이나 동화의 형태를 띠어야 하는지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관객은 작가 개개인의 내러티브보다는 이러한 전략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달리 이야기할 방도를 찾을 수 없는 한국 젊은 작가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더 궁금해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전시에 참여한 작가뿐 아니라 기획자의 몫이기도 하다.
고동연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