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김성수 얼굴없는 장소들
갤러리 스케이프 2014.11.5~2014.12.19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은 삶의 조각을 묶어나가는 것이다. 조각글들을 묶어 한 권의 책을 만들고, 조각 이미지들을 묶어 하나의 전시를 만드는 것처럼. 살아가며, 어느 정도까지는 묶는 행위가 어렵지 않다. 그러다 삶의 조각을 맞춰나가는 일이 점점 힘들어진다. 그리고 알게 된다. 세상이 우리를 허락할 때만 조각을 끼우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조각을 묶어나가는 것이다. 삶의 조각을 묶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를 묶어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그려나가며, 어느 정도까지는 묶는 행위가 수월하다. 그러다 삶의 조각을 그려나가는 일이 점점 버거워진다. 그리고 깨닫는다. 세상이 그리는 자를 허락할 때 조각을 끼우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결국 미술은 삶이요, 삶은 미술이다. 그 진부함이 미술을 견디게 한다. 미술이 없는 세상을 나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미술이란 그리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지우개가 없는 글쓰기를 생각할 수 없듯이(김훈), 지움으로써 그리는 그림의 경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도시 풍경의 폐허, 그 ‘얼굴 없는 장소들(non-lieu)’을 그리는 김성수의 그림 덕분이다.
김성수가 그려낸 풍경은 양가적이다. 디지털 방식과 아날로그적 집착이 한데 고여 있고(사진과 포토샵으로 가공한 이미지를 OHP 필름으로 출력해 캔버스에 투사해 옮긴다), 세파를 견디지 못한 폐허의 풍경은 도리 없이 숭고하다. 그의 그림은 어쩔 수 없이 슬프다. 세상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 때문이다. 그것들이 빚어내는 세계는 추악하면서도 아름답다. 그 움직임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을 때 우리는 슬픔으로 떠나보낸다. 그런데 김성수의 그림은 그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에 흔적을 남기려는 것이 화가의 열망일 텐데, 그는 재현의 대상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그 당연함에 저항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본래의 풍경이 지워져가는 흔적 속에서 우리는 풍경의 본연을 눈으로 만지게 되고, 뒤로 숨는 풍경에서 실루엣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처연히 사라져가는 것들을 회상하며 존재의 무게를 측량한다.
회화가 한줌의 이미지로 소비되는 지금, 미술의 노정이 무거워 보여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더더욱 김성수가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겠다는 태도와 그리는 것과 지워지는 것 사이에 동요치 않는 단단함에서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에 능통할 필요가 없다. 세상살이에 무능한, 그래서 그릴 수밖에 없는 자라면 더더욱 서툴러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자의 인생이 아름답고, 그림의 한계를 아는 그림이 세상을 제대로 감각한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윤동희 북노마드 대표
위 김성수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30×162cm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