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홍순명 개인전-스펙터클의 여백

회화의 순수성을 탐구하기 위해 주변의 풍경을 그려 온 작가 홍순명의 개인전 <스펙터클의 여백>이 6월 28일부터 8월 28일까지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열린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보도사진을 주요 모티프로 삼은 회화작품 <사이드 스케이프> 시리즈와 사고 현장에서 수집한 물건을 오브제로 만든 신작 <메모리 스케이프> 연작을 선보인다. 인생과 예술의 동반자인 홍익대 미술대학원 김미진 교수와의 대담을 통해 작가 홍순명의 작업과 삶의 태도를 조명해본다.

주목받지 못한 독립체들의 연대

김미진(이하 ‘김’) 내년이 벌써 우리 결혼 30주년이네. 1979년,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만나 지금까지 예술과 인생의 동지로 살아왔잖아. 그 시절부터 얘기해볼까.
홍순명(이하 ‘홍’) 학부 때부터 해외 미술전문잡지를 보고 이것저것 실험적인 작업을 했지. 그러면서 자신감이 생겼고 1985년에 이미 스무 번이 넘는 전시에 참여했었지. 당시 부산지역 젊은 작가들이 모인 미술그룹 ‘강패’, ‘황색벌판’ 등에서 활동했고. 사범대학을 나오면 선생님을 해야 하는데 나는 그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지. 그래서 무조건 외국 가서 공부하고 싶었고, 결혼하자마자 확 떠난 거야.
1985년 결혼하고 곧바로 파리로 유학을 떠나 같이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려고 했는데 나이제한이 있어서, 나는 파리 8대학 조형예술과에 들어갔고 당신은 한국에서 군복무한 것이 인정되어서 원하던 대로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지. 거기서 운명이 갈린 거 같아. 당신은 일찍부터 ‘부분과 전체’라는 개념을 화두로 작업했는데….
파리에 있을 때 서양인들 속에서 한국 사람으로서의 내 위치에 대한 고민이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제가 되었지. 특히 그 무렵 독일의 과학자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부분과 전체》라는 책을 읽은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같아. 과학 분야에 문외한이라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부분 안에 전체가 있고 전체 안에도 부분이 있어서 서로 간에 연결성이 있다는 내용이었지. 그 이야기를 나는 내 식으로 받아들였던 거야. 비록 서양 사람이 쓴 책이지만 그 책을 읽고 덩치가 작은 동양인인 내가 서양인에게 이론적으로 꿀리지 않는 당당함이랄까 자신감 같은 걸 갖게 됐어.
그때의 관심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사이드 스케이프(Sidescape)> 시리즈까지 연결된 건가?
파리에 있을 때 했던 작업 중에서 캔버스 옆면에 그림을 그려 책이 꽂혀있는 책장처럼 만든 작업 있잖아. 캔버스 옆면은 앞면을 존재하게 하는 보조 역할을 하지. 나는 일부러 보조 역할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을 택했어. 센터와 사이드를 와해시키고, 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 모두 동등한 것, 이런 생각과 의도가 파리시절 작업의 주제였지.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런 맥락에서 작업을 이어갔지. <사이드 스케이프> 시리즈로 넘어오면서 작업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지만 조금 각도를 달리한 게 뭐냐면, 보도사진을 보고 그렸다는 거야. 원래 보도사진에는 정확한 센터/주제/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사이드/주변/배경이 있을 수밖에 없어.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주변 풍경을 화면의 중심으로 가져와 ‘실존’시키는 것이야. 사이드/주변/배경은 주인공을 보조하고, 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데 나는 오히려 이런 역할을 없애버린거지. 뿐만 아니라 그 유용성이나 기능성까지 다 배제하고, 순수한 풍경 그 자체로만 존재하도록 만드는 거지. 그렇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야. 그래서 보도사진이 가장 적절한 소재가 된 거야.
우리는 20대 후반부터 40대까지 인생의 중요한 시절을 파리에서 보냈어. 1980년대와 2000년대에 아날로그와 디지털, 중심과 주변, 글로벌과 디아스포라라는 두 개의 강렬한 패러다임이 교차되는 시기를 다른 문화권에서 산 경험이 어쩌면 행운일 수 있어. 우리는 몇 십 년간의 시간을 통해 국적·모더니즘·형이상학 같은 거대주제가 해체되고 일상적인 개인의 삶 안에서 주제를 찾거나, 예술 자체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던 시대에 예술이 일상의 삶과 합쳐지는 변혁의 시대를 체험했어. 당시 프랑스는 미테랑이 재선되어 10년이나 대통령직에 있었고, 자크 랑 문화부 장관과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문화정책을 강력하게 펼쳤지.  사회주의 성격이 강한 정책으로 가난한 학생들과 예술가들이 많은 혜택을 받은 꿈의 시기였어. 덕분에 우리는 좀 더 자유롭게 사소한 곳에 눈을 돌릴 수도 있었고, 전체를 막 흔들 수 있었던 거야. 이런 경험 또한 당신의 작업 <사이드 스케이프>의 배경이 된 것 같아.
둘이서 꿈을 찾아서 유럽까지 갔는데 참 운이 좋았지. 요즘 같아서는 그 돈으로 거기 가서 한 달도 버틸 수 없을 거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가 있을 때 프랑스는 사회주의 정책이 강력해서 우리처럼 학비도 없고 가난한 유학생이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줬지. 그런데 작품이라는 게 한 작가의 사상이나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잖아. 한국에서도 대학생하고 정부하고 싸우던 시절이었는데, 파리에서도 10년 넘게 사회주의 성향이 짙은 정책을 경험하고 사회 분위기를 몸으로 직접 체험하면서 지금의 내 가치관이 더욱 굳어진 것 같아.
다시 매체 얘기로 돌아가서 질문할게. 지금은 컴퓨터가 우리 생활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고 매일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뒤적이는 시대잖아. 세계 각국에서 온갖 사건과 재앙이 발생하고, 우리는 그것을 단순하게 정보화된 이미지로만 접하지. 그런 점에서 당신이 단순한 이미지 정보가 아닌 실제와 가까운 풍경을 그리는 것은 기호가 아닌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행위가 아닐까?
나는 평론가들의 이런 말투가 불편하고 불만이야. 왜냐면 평론가들은 말이나 글로 나를 어떤 틀 안에 자꾸 집어넣으려고 해. 작품은 원래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스스로 생명력이 있는데, 크리틱에 의해서 오히려 그 생명력이 약해지는 거야. 대신에 작품은 유명해지고 비싸질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평론가들은 어떻게 하면 작품을 그냥 있는 그대로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그것을 많이 연구하고 개발하면 좋겠어. 자기들이 읽은 책에다 끼워 넣지 말고,
우리도 천재적으로 어떤 새로운 언어를 개발하면 좋겠지만 지금의 언어는 이미 사회적 약속이잖아. 그리고 평론가는 그것을 위해 훈련받은 사람이야. 비평이란 학문의 사회적 소통을 위해 그런 틀에 맞추어진 거지. 우리 같은 사람의 고충도 이해해주길 바라.
<사이드 스케이프>에서 회화의 소재로 보도사진을 사용하는데 그림을 그릴 때 물감 색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지? 컴퓨터 화면처럼 보정을 하나? 아니면 그대로 써?
어떤 사람들은 “어디를 보고 프레임을 잘랐나요?”, “어떤 기준에서 사진을 선정하나요?”라는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 “예쁘면 그냥 가고 안 예쁘면 색을 바꾸기도 한다”고.
평론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사건의 중요성이나 위급성을 떠나 전체를 완전히 탈맥락화시킨다고 봐.
그 지점이 바로 입체작품 <메모리 스케이프(Memoryscape)>와 연결되는데. 방금 얘기한 것과 결부시켜 이야기하자면, 나는 미술, 특히 회화는 굉장히 많은 부분이 ‘감각의 문제’라고 보는 거야. 조금 전에 말했듯이 나는 부분과 전체에서 상생과 조화, <사이드 스케이프>에서는 독립이 참 중요하다고 본다고 이론적 맥락을 세울 수 있겠지만 그 맥락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림은 그냥 그림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그 맥락이 결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야. 그러면 도대체 화면 자체가 뭐고, 그것을 언어로 어떻게 표현하냐는 거지. 이건 굉장히 어려운 문제야. 왜냐면 언어를 벗어난 다른 분야의 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니까. 나는 그 대부분이 ‘감각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면 감각적이라는 것은 사진에서 부분을 선택하는 감각이란 말인가?
그렇지. 부분을 선택하는 것, 또 그림을 그려나가고 완성으로 향해가는 것 등을 말하는 거지. 어떤 부분을 프레임으로 잘라낼지는 작가의 느낌으로 결정하는 거지. 그런데 이런 느낌을  정확하게 말해줄 수는 없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 ‘뿌옇고 일시적이고 가볍고 금방 사라질 것 같고 뭔가 견고하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인 모습’이라고.
그게 완전히 순수한 예술의 순간을 찾아가는 것이고 작가로서 당신의 꿈인 것 같아. 작가는 예술의 원래 모습을 찾아가는 거잖아. 낯선 형태를…. 하지만 평론가는 처음 보는 것을 해석하기 위해 이론을 집어넣어. 예전에 존재한 작품에 덧붙여 언어로 설명하다보니 작품이 낡아지는 것 같아. 많은 작가도 이 방법을 써. 그런데 당신은 자꾸 새로운 것을 추구해. 나는 그것을 애매함이라고 보거든. 당신은 애매함으로 자꾸 비켜나가. 애매하면 소통이 안 될 수도 있지. 애매함보다는 조금 더 우리가 원하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그런 작업들이 현재 소통되고 유명해지잖아?
그 소통이 미술에 애정과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있다면 그 미술판은 후진 거지.
알았어. 이제 회화와 장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봐. <사이드 스케이프>는 장소적 설치로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 같아. 당신은 설치작업도 많이 했고, 2008년 미국 뉴멕시코에서 열리던 <산타페 비엔날레>에서는 건축가가 당신의 작품을 미리 보고 작품에 맞게끔 건축적인 전시환경을 만들어줬어. 마찬가지로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만든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도 건축적 환경에 따라서 설치를 했지. 내가 볼 때는 3층의 <아쿠아리움-1402>에는 작품 사이의 틈이 창살처럼 보이기도 하고 공간에서 캔버스가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설치한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어. 마치 동양의 산수화 안에 여백이 사물과 공간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심리적으로 전달되는 것처럼 실제 공간과 캔버스가 소통하는 것 같아. 그런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줘.
아까도 말했듯이 회화는 그냥 화면 안에서 끝나야 된다고 난 생각해. 그런데 회화 몇 점 가져다 놓고 거기에서 이해해라. 그건 굉장히 불친절하잖아. 불친절한 것이 현대미술의 하나의 유행이기도 하지만 내 방식의 설치는 하나의 서비스이고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제스처라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냥 서비스라기보다는 내 작품에 사이드가 있고 비켜서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산타페 전시에서는 메인을 피해서 옆에 쭉 설치해서 작품이 가지는 의미를 좀 더 강조했지. 이 미술관은  공간 자체가 이미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이고 실제적로도 무척 아름다워. 하지만 작품 설치하기에는 솔직히 좋은 공간은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그런 맥락도 있고 이 건축물 전체가 이미 회화 같은 풍경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 전시 하면서 많이 들은 이야기가 공간하고 작품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거야. 나는 그냥 아름답게 보이는 상황이 어떤 것일까 고민했을 뿐인데 다들 너무 잘 어울린다고 하니까 내가 공간에 아부한 느낌이더라고. 그런데 공간을 바꿀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내가 거기에 맞춘 거지. 회화는 캔버스가 어디에 걸려있든 그 자체로 어떤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해. 그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회화라고 할 수 있어.
그럼 작품 안으로 들어가보자. 그림 안에서 붓 터치를 보면 무심한 듯 턱턱 던져놨는데 멀리서 보면 생동감이 들어. 이게 바로 감각과 연결되는 지점이야. 모든 힘을 빼고 붓하고 내가 일치되면서 붓이 가는대로 따라 가지만 서예를 하듯이 붓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야. 그래서 중성적이면서도 붓 자체도 독립적인 힘을 갖고 있어. 그림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독립적으로 존재하게끔 보이게 해.
오~! 이 얘기는 내가 원하는 것과 똑같아. 서로 말 안했는데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야. 사실 그림 대부분이 한구석을 그린 건데 나는 그 구석을 또 구석으로 몰고 나간거야. 그러다보니 한 개 한 개는 완전 비구상이 되어버리는 거지. 그때 남는 건 색, 터치, 느낌, 분위기, 마티에르 등 굉장히 재료적인 문제야. 형태가 아닌 재료적인 것이 어떻게 스스로 독립해서 서 있을 것인가. 까딱 잘못하면 비구상과 구분이 안돼.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 주제적인 면에서도 초월성을 싫어해. 재료들이 스스로 그냥 독립해서 화면에 존재하는 것. 한 개 한 개 독립체가 모여 하나의 화면이 만들어지고, 또 그것이 모여 또 다른 독립체가 되고, 이런 상황들이 혹시 가능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계속 시도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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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스케이프> 캔버스에 유채 18×14cm (각) 1700여 점 2005~2014

예술가의 삶의 방식
그것이 회화 자체가 갖는 힘이야. 작가와 관객이 서로 다르게 느낄 수 있지만 그 자유로움 속에 소통하는 순간이 있어. 그리고 삶의 태도를 볼 때 당신은 규칙적으로 작업실에 가서 일정량의 작업을 해. 주로 밤에 작업을 많이 하지. 그리고 집에 와서도 계속 컴퓨터로 소재를 찾고 있어. 잠도 3~4시간밖에 안 자. 거의 작품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거 같아. 은퇴 후 집에서 책 읽고 서예하시는 아버님의 영향을 받아선지 옛날 문인화를 그리던 선비의 태도를 가진 것 같아. 독서와 작업이 삶의 방식을 이루는 예술적 태도를 갖고 있어.
말만 들으니 너무 거대하다. 그렇지는 않아.
좀 찔리나보네. 하하
그 정도는 아니야. 잘 알잖아. 나 노는 거 무진장 좋아해.
물론 노는 것도 좋아하지만 55년 평생 그런 식으로 해왔기 때문에 작품이 쌓여 있는 것 같아.
그렇다기보다는 훈훈하게 마무리하려면 어쨌거나 내가 많은 시간을 작업에 투자하는 게 맞는 거 같애. 그런 조건을 당신이 다 만들어주잖아. 남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인 건 틀림없지. 또 하나 무척 고마운 것이 내가 밤에 작업을 많이 하는데, 작업이 새벽에 끝나면 집에 가기 애매해. 그냥 작업실에서 자는 거지.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작업실에서 밤새도록 작업하고 그 다음 날 저녁 때 집에 가고 이런 식으로 계속 살잖아. 그런 식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주니까 내가 아무리 작업실에서 빈둥거리고 놀아도 작업량이 꽤 많은건 당연해.
마지막으로, 최근작 <메모리 스케이프>로 넘어와서 좀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방식의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회화와 조각, 설치의 영역이 합쳐있는 상황인거 같아. 조각으로 보기에는 형태가 너무나 비정형이고, 얇은 표면 때문에 내부 오브제들의 형태가 짐작되고 일부는 노출되는 거. 버려진 장소의 당시  현장을 간직한 형태는 함께 뭉뚱그려져서 나와 매우 이질적으로 보여. 장르와 매체, 사건과 장소, 시간과 공간 등의 이질적인 부분이 합쳐져 만들어진, 그 안에는 무수한 혈맥이 흐르는 새로운 변종의 생명체처럼 새롭게 보여. 예술작품에서 ‘처음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은 아주 중요해. 그래서 매우 기뻐.
10년 동안 보도사진을 수없이 봐왔는데 사람들은 마치 내가 사회에 엄청나게 관심이 많은 줄 알지만 실제 나는 보도사진이나 사건 그 자체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든. 내 작업을 위해 이미지들을 빌려오는 것뿐이지. 그렇게 계속 작업 하다보니 예술은 인간의 삶에 대한 얘기인데, 내가 너무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삶을 너무 관념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죄책감이 들더라구. 특히 이 정부 들어서는 그래. 그래서 내 삶에서 내 손에 닿고 내 눈에 닿는 조금은 일상에 가까운 작업을 해보고 싶어서 이 작업을 시작한 거야. 뭔가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당시 이슈가 된 밀양 송전탑 현장을 직접 찾아가기로 했어.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건 보도사진을 볼 때에는 송전탑이 정말 가까이 있고 인근 마을에는 전류가 어마어마하게 흐를 것 같은데, 실제 밀양에 가서 보니까 내 눈에는 송전탑이 너무 멀리 있는거야. 이게 뭐지. 내가 보기에는 밀양 사람이 오버한 건지 한국전력이 거짓말을 하는 건지 뭔지 모르는 이상한 상황이 된거야. 현장에서 내 생각은 고발이 아니라 좀 더 솔직해지고 싶었던 거야. 그렇다면 작가로서 이것을 어떻게 풀 것인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보존’이라고 생각했어. ‘보존’ 하면 대부분은 숫자나 데이터, 증거 확보처럼 어떤 상황을 증명하는 식으로 존재하잖아. 나는 그런 거 말고 내식대로 감상적이고 시적인 생각을 한 거야. 그때부터 상황이 벌어지는 곳에 있었던, 그 상황을 자기 식대로 머금고 있는 물건들을 가지고 오기 시작한거지. 나뭇가지, 굴러다니는 석유통 등 쉽게 가져올 수 있는 쓰레기 같은 것들을 몇 차례 실어왔지. 그리고 내가 현장에서 찍은 수백 장의 사진은 데모하는 사진이 아니야. 전류에 대해서 무식한 내가 보기에는 문제가 되기에 너무 멀리 있는 송전탑, 그 옆에서 농부가 논을 태우는 일상적인 모습이지. 그리고 물건들을 랩으로 미친 듯이 감싸고 캔버스 천을 여러 번 덧붙여서 물건들 스스로 혼자 설 수 있도록 했어.
당신에겐 그게 굉장히 중요하지.
그렇지. 그리고 지금까지는 한 화면을 그리기 위해서 내가 프레임을 잘랐잖아. 처음에는 입체 형태에다 프린트한 사진을 보고 그리려고 했는데 전체 형태가 안보이고 돌아가면서 위 아래로 봐야 하는 입체 형태와 사각형 프레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야. 당혹감과 동시에 굉장히 재미있었어. 지금까지 그린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야 하는구나. 그걸 그려보고 알았어. 그 다음부터는 형태에 맞게 적절한 화면을 뽑기 시작했는데 한 화면으로는 해결이 안되서 결국 밀양사진 여러 장을 얼기설기 겹쳐서 그리게 되었지. 그동안 나는 스케치는 안하지만 포토샵으로 이미 그릴 범위를 결정하고 그렸거든. 원래 상상력으로 여러 장면을 끌어모아 그리는 거 잘 못하는게 나에게 콤플렉스였는데 이 작품에선 그렇게 안할 수 없는 거야. 내가 잘 못하던 어떤 부분을 요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작업하는 과정에서 큰 재미가 있어. 이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가 있든 그걸 떠나서 내가 이 사회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무심했던 부분이 조금이나마 해소되고 있고, 순수하게 내 시각으로 보고 이 사건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족감이 크더라고. 이런 과정이 주는 즐거움에 이 작업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한동안 더 하려고. 전시 오픈하고 나서 당장 세월호 사고 현장인 진도 팽목항으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이런 저런 일로 못가고 있어서 안타까워. 보도사진은 다 확보해놨지만 그 사건이 끝나기 전에 가서 실질적인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작업으로 보존하고 싶어.
앞으로의 계획까지 이야기 했네. 나는 아내이자 미술계 동지로 당신이 작가로서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한 길을 가는 것이 훌륭해 보여. 물론 나에게는 손해겠지만… 가난하지만 떳떳해. 그리고 조력자로서 예술의 순수 목적을 위해 온전히 독립하려는 시도에 동참할 수 있어서 참 좋아. 훈훈한 마무리네. 진행 정리・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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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열린 홍순명 개인전 광경 (맨 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89.5×145.5cm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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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명(오른쪽)은 1959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에콜 데 보자르를 졸업했다. 1989년 미국 티모티 티유 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0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2002 광주비엔날레, 2008 산타페 국제비엔날레 등에 참여했다. 서울시립미술관, 대법원, 미국 산타페 아트 인스티튜트, 경기도미술관, 호암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김미진은 1959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파리8대학교 조형예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파리1대학교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은미술관 부관장, 세오갤러리 디렉터, 예술의전당 전시예술감독 등을 역임했고,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