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

위성예술을 넘어서, 인터미디어 예술가로서의 백남준

1984년 1월 1일, 백남준은 위성을 이용해 뉴욕, 파리, 베를린, 서울 등지에서 100여 명의 예술가가 참여한 위성 텔레비전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생중계했다. 이 역사적인 프로젝트가 시도된 지 올해로 3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전>(7.17~11.16)은 백남준의 작업과 함께 예술과 매스미디어의 관계에 주목한 동시대 작가 16팀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김지훈  중앙대학교 영화·미디어연구 교수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전>은 1984년 새해를 열어젖힌 백남준의 기념비적 인공위성 생방송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3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요제프 보이스의 퍼포먼스와 뉴욕에서 열린 존 케이지의 즉흥연주를 실시간 네트워크로 접속시키고 앨런 긴즈버그, 로리 앤더슨, 톰슨 트윈즈(Thompson Twins), 오잉고 보잉고(Oingo Boingo: 팀 버튼의 영화음악가로 잘 알려진 대니 엘프만이 속했던 미국 록 밴드) 등을 한자리에 모은 이 프로젝트는 백남준이 개척한 비디오아트 하위 장르의 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예술과 사이버네틱스의 관계에 대한 백남준의 사유들을 가로질러보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위성 비디오아트 (satellite video art)’의 선구적 작품” 또는 “위성 텔레비전의 대안적 활용”이라는 기존 예술사의 통념들을 넘어선다. ‘백-아베 비디오 신서사이저(Paik-Abe Video Synthesizer, 1970)’를 완성하기 전인 1967년, 백남준은 벨 연구소(Bell Labs)에서 초기 컴퓨터 그래픽과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연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노베르트 위너와 마셜 맥루한의 방법은 확장된 예술 연구에 가르침을 준다. 이 둘은 단일 예술가에게는 출입금지구역이던 많은 구별된 지대들을 뛰어넘고 유영했다.”1 이렇게 볼 때 백남준에게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원격통신의 예술적 적용을 넘어 그가 신서사이저의 개발과 다양한 비디오 형성체들을 통해 구체화하고자 했던 인터미디어(intermedia) 이념, 즉 음악과 회화, 사운드아트, 퍼포먼스를 횡단하고 공존시키는 미디어예술이라는 이념을 연장한 결과다. 전자초고속도로의 구축이 예술과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하면서 백남준이 예술가를 “처음부터 여러 매체를 횡단하여 다루고 말을 넘어선 언어를 구사하는 전문가”2로 규정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인터미디어 예술가로서의 이상에 따라 기획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기존의 교향악과 오페라를 다른 지역으로 송신하는 것”이 아니었다. 위성예술로서 이 프로젝트는 백남준이 착안한 여러 가지 이념인 대화적인 예술구조, 열린 회로(open circuit)로서의 예술작품, 공간적 합성, 시간적 가변성과 다차원성, 즉흥성, 불확정성을 이용하여 창조한 “복합적인 시공간의 교향악”3이다. 그리고 텔레비전과 비디오의 기술적 특정성인 실시간성, 이미지의 변형성(transformativity), 시청각성(audiovisuality), 아웃풋의 다양성과 비결정성 등은 이러한 이념들을 가능케 하는 재료들과 기법들이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전>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선보인 “복합적인 시공간의 교향악”의 면모들을 새로운 전시 환경에 구현하면서 “인터미디어 예술가”로서 백남준이 가진 이념들, 그리고 위성예술로서 이 프로젝트가 펼친 회로들을 부각시킨다. 이 프로젝트의 안과 밖, 이전과 이후를 넘나드는 이 전시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기획 및 실현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자료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역사적 계보에 대한 통시적 조망,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협력자들인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 폴 개린(Paul Garrin) 등의 작품들에 대한 공시적 조망, 그리고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다양한 맥락 및 기술적, 미학적, 주제적 요소들과 조응하는 동시대의 미디어아트 또는 무빙 이미지 예술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장 1층과 2층에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다양한 모습들이 대형 프로젝션으로 펼쳐진다. 2층에는 뉴욕과 파리의 두 가지 방송 버전 및 KBS에서 방송된 서울 버전을 나란히 설치하여 이 프로젝트가 가진 시공간적 동시성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했다. 1층에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실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배열되었던 출연 예술가들의 퍼포먼스들을 10개의 클립으로 나누어서 동시에 보여준다. 이 10채널 동시 프로젝션은 각 퍼포먼스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규정했던 “복합적 시공간의 교향악”이라는 이념을 부각시키는 데 적합하다. 또한 이는 백남준이 1960년대부터 비디오와 컴퓨터를 통해 탐구했던 사이버네틱 예술의 특질인 정보 흐름의 다층성과 접근의 다방향성을 환기시키면서 관람자들에게 각 퍼포먼스들 사이의 자유로운 조합과 연결을 촉진한다.
위성예술이라는 한정된 장르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오랜 역사를 가진 프로젝트다. 백남준이 실시간 원격통신 테크놀로지가 예술의 형태와 경험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망에 도달한 시점이 1984년보다 훨씬 이전이라는 점은 1961~1962년 그가 샌프란시스코와 상하이에서 동시에 공연되는 피아노 콘서트를 구상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상이 실현된 것은 1977년이었다. 백남준은 그해의 도쿠멘타6 오프닝 기념행사로 요제프 보이스, 샬롯 무어만, 더글러스 데이비스와 더불어 위성 생방송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같은 해에 키트 갤러웨이(Kit Galloway)와 셰리 라비노비츠(Sherrie Rabinowitz)는 두 장소에서 서로 다른 무용가들이 펼치는 공연을 합성하여 단일 화면에 공존시키는 “위성예술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 모든 프로젝트가 전시된 “텔레커뮤니케이션 카페”(1984년 갤러웨이-라비노비츠가 LA 올림픽에 맞추어 기획한 프로젝트인 ‘일렉트로닉 카페’에서 이름을 따온)에서 관람자들은 위성예술이 소셜미디어 시대 이전에 선구적으로 실험하고자 했던 참여와 사회적 네트워킹의 이념들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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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후
전시의 나머지 반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기술적, 미학적, 주제적 이념들과 공명한다고 큐레이터들이 판단한 동시대의 여러 작품이 다양한 포맷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작품들을 지탱하는 매체와 예술형식의 스펙트럼 또한 비디오 퍼포먼스(리즈 매직 레이저, <PR(공적인 관계들)>, 2013), 원격현전 프로젝트 (엑소네모, <수퍼내추럴>, 2009~2014) 등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기술적 국면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작품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목탄 드로잉과 초기 애니메이션, 필름의 기법들을 재해석하여 백인 남성의 악몽을 전보, 전화 등의 통신매체를 매개로 역동적으로 표현한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의 <스테레오스코프>(1999)는 백남준 재해석을 비디오아트에 대한 매체 특정성의 신화에 가두지 않으려는 전시의 야심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진 하나의 섹션은 질 마지드의 <증거보관소(다시 추적한 사건)>(2004), 하룬 파로키의 <카운터-뮤직> (2004) 등 감시를 주제로 한 현대적 작품들의 배치다. 이는 언뜻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조지 오웰의 묵시록적 미래상에 대한 안티테제라는 세간의 통념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위성기술을 통한 ‘자유의 증대’는 기대와 달리 ‘강한 자의 승리’로 이어진다”4라는 백남준의 경고를 상기해 보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유토피아적 비전은 통제사회에 대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음을 알 수 있다. <카운터-뮤직>은 특히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릴(Lille)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교통 통제와 건물 온도 관리를 위해 폐쇄회로 비디오카메라와 적외선카메라로 촬영된 디지털 영상들을 지가 베르토프의 도시 교향악(city symphony)인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7)의 영상과 교차시킨다. 파로키가 이 전시를 위해 특별히 선정한 이 작품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미디어예술의 역사와 관련하여 가질 수 있는 접점들을 가시화한다. 한편으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시공간적 동시성은 사회주의 도시의 24시간을 관류하는 기계와 노동의 물질적 네트워크들을 탈인간적 시각과 몽타주 역량으로 통합하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의 전통과 공명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작품이 정교한 몽타주로 분석하고 있는 감시 카메라 이미지들의 순환과 처리 양상은 백남준의 비디오 매체에 대한 이념과 은밀하게 공명한다. 백남준에게 비디오는 기계의 눈으로 포착되는 시청각적 정보들의 모듈레이션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일상과 시공간에 스며든 통제와 감시의 이미지 또한 인간의 파악을 넘어선 네트워크들의 복잡한 모듈레이션에 따라 생산되고 순환된다.
이 전시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국내 작가들의 작품 선정 방식이다. 국내의 각종 기획전을 주름잡고 있는 옥인콜렉티브의 <서울 데카당스>(2013)는 가상의 상황을 던지고 그러한 상황이 부여하는 미학적, 사회적 코드들과 그에 반응하는 개인의 표정과 몸짓을 주시하게끔 하지만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쉽게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옥인콜렉티브의 작품을 배치한다면 제스처의 수행성과 현전을 탐구하면서도 비디오의 리믹스 미학과 파국에 대한 사유가 더욱 두드러진 <작전명-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2012)가 좀 더 적합했을 것이다. 송상희의 비디오 에세이 <그날 새벽,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2014)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를 인용하면서 일상적 세계의 풍경에 잠재된 폐허와 이상향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연결되지만 싱글채널 비디오 설치보다는 집중된 시간성을 가진 극장에서 상영되었을 때 더욱 적합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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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인콜렉티브 〈서울 데카당스〉(왼쪽) 1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48분 2013 이부록 〈워바타 스티커 프로젝트〉(오른쪽) 비닐 스티커에 프린트 300×450cm 120×480cm 2005~2014


1 Nam June Paik, “Norbert Wiener and Marshall McLuhan (1967),” in Judson Rosebush (ed.), Nam June Paik: Videa ‘n’ Videology 1959-1973 (Syracuse: Everson Museum of Art, 1974), unpaginated.
2 Paik, “Media Planning for the Post Industrial Age: Only 26 Years Left until the 1st Century (1974),” in Nam June Paik. Werke 1946–1976. Musik – Fluxus – Video (Kölnischer Kunstverein, Cologne, 1976), unpaginated.
3 백남준, <예술과 위성 (1984)>,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에디트 데커, 이르멜린 리비어 엮음, 임왕준 외 옮김 (백남준아트센터, 2010), p.137.
4 백남준, <예술과 위성>, p.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