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ARTSPECTRUM 2016
삼성미술관 LEEUM이 2016년 첫 전시로 〈아트스펙트럼 2016〉을 개최한다. 〈아트스펙트럼전〉은 한국 현대미술의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해 2001년 처음 시작된 격년제 전시이다. 올해로 6회째를 맞았으며 예년과 같이 작가 선정에 리움의 학예연구원뿐 아니라 외부 큐레이터 및 비평가가 참여했다. 선정된 총 10팀의 작가들은 개인사부터 한국의 근현대사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며, 회화·조각·영상 등의 매체 작업과 퍼포먼스·사운드·통계 및 그래픽 등을 시각화한 작업을 선보인다. 동시대 미술의 변화 양상을 개성 넘치는 형식미로 승화시킨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5월 12일부터 8월 7일까지 삼성미술관 LEEUM 기획전시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부의 다른 아트스펙트럼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뒤샹의 ‘레디메이드’ 덕도 아니고 워홀의 ‘팩토리’ 탓도 아니다. 정확히 짚자면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어지는 세계의 기술, 사회, 산업, 경제 조건 변화와 그에 결부된 인간 삶 전반의 변화가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예술의 종말(end of art)’ 그리고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다(anything goes)’는 아서 단토 식 미학이념의 뿌리다. 동의하든 않든, 좋아하든 안 하든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남성용 소변기가 예술작품이 되고, 브릴로 세제 상자의 대리/대량 생산이 독창적 창작 방식이 되는 단계를 오래전에 넘어섰다. 현재는 작가의 특정 의도가 효과적이기만 하다면, 미술계에서의 효용 및 이해관계에 부응하기만 한다면 무(無)에서 무(無)로 이어지는 어떤 것도 기꺼이 미술이라고 박수 치는 현실 원칙의 조류 속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아무것도 그리거나 만들지 않는 것은 물론 원칙적으로 도판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티노 세갈(Tino Sehgal)의 작업이 그 세태의 절정을 보여주지 않는가.
하지만 나는 ‘잘만 하면 아무거나 미술’이 될 수 있는 미술계의 느슨한 자유가 창작자의 쾌락이자 고통이 되는 지점에서 현대미술의 두 번째 국면이 시작됐다고 본다. 무엇을 할 것인지와 왜 할 것인지가 ‘미술’이라는 선험적 원리 아래 미리 주어져 있지 않기/못하기 때문에 작가들은 끊임없이 이것도 되었다가 저것도 되어야 한다. 과거와는 달리 꽤 다양한 배경과 이질적인 기질 및 능력으로도 충분히 미술계에 진입할 수 있다. 다만 그 배경, 기질, 능력을 미술로 적절히 활용할 때만 제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다. 디자인이나 비디오/영화 연출은 기본이고 작곡, 악기 연주, 밴드 활동, 여행, 자료 조사, 빅데이터 분석, 디지털 프로그래밍, 건축, 엔지니어링, 오타쿠 행태, 수집, 디스플레이 및 연출, 컨설팅, 마케팅, 사회운동 등등을 미술로 이전 융합하고 종합 도금하기. 이미 어디선가 누군가 다 한 것 같은 데서 출발하지만, 그로부터 감각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아주 작은 차이를 만들어내 동시대 미술계의 유력한 맥락 안에 ‘작품’으로 안착시키기.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최한 〈아트스펙트럼 2016〉은 위와 같은 점에서 지금 여기 한국의 젊은 작가들 미술뿐만 아니라 동시대 미술 전반의 실재를 함축한 시그니처 전시라 해도 좋다. 1990년대 후반부터 지난 20여 년간 국내외 미술계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구축한 현대미술의 미학적 경향 및 물질적/정신적 구조가 거기 뚜렷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져 있어서다. 기획 글에 따르면 리움의 학예연구원과 외부(그러나 더 큰 틀에서 보면 미술계 내부) 전문가들이 “한국 현대미술을 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조망하기 위해 (…) 작가 선정”에 나서 참여한 열 명/팀의 작가들 각각에서, 그리고 그 열 개의 미술 입면체가 모인 집합적 구성물로서의 전시에서 말이다.
<아트스펙트럼>에서 찾은 미학적 특수성
우선 우리가 올해의 〈아트스펙트럼〉에서 한국 젊은 미술가들의 특성으로 인정해야 할 사실은 이전 세대의 어떤 작가들에게서도 발견하기 힘든 복합적 전문 능력과 잡학적 기술이다. 그것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천부적 미술 재능을 의미하지 않고 다재다능함과도 거리가 있다. 또 복합적이라고 해서 보편성을 띠는 것도 아니지만, 잡학적이라고 해서 수준이 낮거나 쓸모없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전문 능력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지거나 운 좋게 발현되는 미적 재능 대신, 의식적 학습과 지속적인 자기 훈련 및 실용적 조직화를 통해서 쌓은 현실 능력이다. 그런 이유로 여기 해당하는 작가들은 많은 경우 작가 개인의 특화된 경험과 이력, 창작으로의 에너지 투입과 노력의 정도가 작품의 성과 및 독특한 수준을 결정짓는 바로미터다. 이를테면 보헤미안 예술가처럼 방랑과 기행을 일삼아도 어쩌다 보니 뚝딱 천재적인 작품이 나와 있는 형편이 아닌 것이다. 그와 달리 〈아트스펙트럼〉에 근거해 볼 때, 여기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일명 ‘스펙’을 갖춘 전문직업인 혹은 성실 근면한 연구자의 그것처럼 인풋과 아웃풋의 인과관계가 투명에 가깝다. 참여 작가 중 김영은, 옵티컬 레이스, 제인 진 카이젠이 그에 해당하는데, 특히 김영은과 그녀의 〈1달러어치〉 사운드&비디오 설치작품이 이를 잘 보여준다. 어릴 때 바이올린을 배웠고, 대학에서 전공 외로 밴드활동을 했고, 국내 대학에서 조각과 매체예술을 전공한 후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서는 음향학(sonology)을 공부한 배경, 그간 쌓은 전문능력은 김영은의 작업 이력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고, 최근에는 〈1달러어치〉로 구현된 것이다. 그 배경 및 능력은 김영은이 시각예술을 청각을 중심으로 자기 조직화하는 데, 소리를 점/선/면/볼륨 등 조형적이며 공간적인 조건들로 교환시키는 데, 디지털 음원 형태로 1.29달러에 팔리는 비물질의 노래를 두부 썰 듯 길이, 높이, 폭으로 절합시키는 데 스며들어가 있다. 그리고 〈1달러어치〉는 애초 계산상 1.29달러짜리 음원을 1달러만큼만 구매하는 것인 만큼 정직하게 분절되는 가사, 파쇄 음정, 삭제된 주파수 대역 때문에 얇아진 소리 형태로 시청각화돼 작가의 의도를 감상자에게 전달한다.
다음, 우리가 현대미술계의 실제적 경향이자 한국 젊은 작가들의 특성으로 반드시 지목할 점은 매체에 대한 다원적 접근이자 사용 역량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나 W. J. T 미셸 등 서구의 여러 이론가가 이미 논한 것처럼, 1960년대를 기점으로 미술에서 매체는 장르적 특성과 매체 자체의 속성이 일치하는 매체특정성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주제, 형식, 의도, 용도, 방법, 기교 등에 따라 얼마든지 광범위해지거나 이질적으로 혼용돼도 좋은 포스트 미디엄의 국면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그 국면은 2000년대 들어 미술의 다른 어떤 역사적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 복합화, 심화했다고 봐야 한다. 그 맥락에서 나는 지금의 미술 매체 환경을 ‘예술 매체의 헤테로토피아(artistic medium’s heterotopia)’라 부르고 싶다. 이 헤테로 토피아적 매체 환경에서 어떤 작가들은 기존의 사실들, 다양한 출처의 이미지들, 기록 파편들, 익명적 정보들, 이질적 객체들을 리믹싱, 리포매팅, 트랜스포팅, 레트로 컨버전스 하는 데 열중하고 능수능란한 수준이다. 〈아트스펙트럼〉에도 여지없이 이 같은 면모를 여러 작품에서 발견한다. 앞서 김영은의 경우도 그렇지만 명시적으로는 박민하, 백정기, 안동일, 제이 진 카이젠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의 작품은 시각적으로는 완벽하게 재현되지 않는 작가의 작업 의도, 매체 사용의 목적 및 논리를 창작의 배경 내러티브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대체로 개념적 미술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중 박민하의 〈리믹싱 타임스페이스〉는 우주를 키워드 삼아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비단 미국뿐일까마는)의 우주개발 열망과 그 실패 또는 부정성의 과정을 본인의 탐사 영상과 기성 SF 영화의 다수 풋티지로 리믹스해 만든 한 편의 영화다. 제이 진 카이젠이 취한 방법론도 크게 보면 박민하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작가의 개인사가 작업의 핵심 기저라는 점에서, 자신의 개인사를 한국인 해외 입양, 냉전기 아시아 디아스포라, 일본군 성노예, 제주 4·3항쟁 같은 역사적/동시대적 문제들과 구조적으로 엮어 탐구한 후 비디오(역사 자료, 인터뷰, 답사 등의 필름) 설치 및 포스터 제시로 형식화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면상 모두 논할 수는 없지만 〈아트스펙트럼〉에서 헤테로토피아적 매체성을 띠는 이 작가들의 특이성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매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최종 작품이 예술작품으로서의 미적 기능으로 소급된다는 점이다. 이는 빈 대학의 교수이자 미술비평가인 자베트 브흐만이 미술의 매체특정성과 그 이후를 “기록, 정보, 소통, 참여, 상호작용 등 매체의 특별한 [사용 및] 기능”(Sabeth Buchmann, 《The (Re)Animation of Medium Specificity in Contemporary Art》)에 따라 분류한 점에 비춰보면 다소 제한적이고 내부 지향적인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아트스펙트럼〉에서 주목할 한국현대미술의 미학은 여기 젊은 작가들이 사회현실과의 접점 맺기를 당연히 필요하며 적극적으로 수행해 갈 미술의 미션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예술과 삶/사회의 결합을 꿈꿨던 서구 20세기 아방가르드의 부르주아적 방식을 답습하는 대신 자기 현실의 날것 상태 세부에서, 한국 사회의 비린내 나는 생태에서, 척박한 대한민국 삶의 생활 구조에서 작품의 내용을 구상하고 미학적 형식을 결정짓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사실 이번 〈아트스펙트럼〉에 참여한 열 명/팀의 작가 모두가 그런 속성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지만, 특히 옥인 콜렉티브, 박경근, 옵티컬 레이스의 작업에서 그 특수성은 두드러진다. 옥인 콜렉티브는 거대한 마루와 언뜻 보면 미니멀리즘 영상 같은 모션 그래픽으로 이뤄진 〈아트 스펙트랄〉설치를 통해 현대미술계 내부의 작가이자 사회의 생활인으로서 딜레마에 빠진 이들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 박경근의 영화 〈군대: 60만의 초상〉은 이 전시의 최고 수작이라 평할 만하다. 그가 2010년 〈청계천 메들리〉에서부터 파고든 한국 근현대사의 미시적 실재는 그 영화에서 한국 사회 폐부 깊숙이 각인된 군대문화와 걸 그룹처럼 춤추는 전도사 소녀들 앞에서 넋을 잃는 까까머리 훈련병들의 얼굴을 횡단하며 트리밍 되기 때문이다. 옵티컬 레이스의 경우 그래픽디자이너와 “정보 시각화 연구자”(?)가 한 팀을 이뤄 한국 사회의 여러 현상을 통계/시각화하는 식으로 미술을 한다. 이 전시에서 이들이 건드린 현상은 1979~1992년에 출생한 이들(에코세대)의 〈가족계획〉이고,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 현상은 부모와 자녀의 소득, 결혼, 주거, 미래 설계 등이 걸려 있는 한국 사회의 복잡한 당면 문제로서 전시를 통해서는 수치를 담은 원, 막대그래프 등으로 그래픽 처리되었다. 이들 작품은 이전 세대의 사회적 미술과 비교하면 문맥이 훨씬 정교하고 담론이 풍부해졌는데 그와 동시에 시각적 감상의 대상으로서도 세련된 수준을 자랑한다. 물론 그 점이 지나치면 사회 참여적 예술에 필수 조건인 ‘신뢰’에 관한 한 민감한 지뢰가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국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는 예술이데올로기와 전략이 난무하는 현대미술계에서 〈아트스펙트럼〉 참여 작가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 거의 모든 작가와 그/녀의 작업이 미술에 대한 신뢰와 함께 절묘하게 맞춰야 할 감각의 다른 논리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