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 THEME 〈Under My Skin〉& 〈누구에게나 시선은 열려있다〉

젊은 작가로 구성된 그룹전이 비슷한 시기에 열리고 있다. 하이트컬렉션에서 계속되는 〈Under My Skin〉(2.26~5.21)과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열리는 〈누구에게나 시선은 열려있다〉(3.4~5.15). 이 두 전시는 작가 뿐 아니라 기획자의 개성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월간미술》은 이 전시를 기획한 이성휘(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와 이관훈(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을 만나 각 기획의 초점을 짚어보았다. 또한 그들이 추구하는 큐레이팅과 젊은 작가들에 대한 인상을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다른 듯, 닮은 두 기획자의 분위기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미술현장에서 살아남기

이성휘 각자 큐레이터로서 현장 경험과 전시 방향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관훈 저는 미술사나 미학, 예술학 등의 미술이론 전공자가 아녜요. 큐레이터로서 첫걸음은 1990년대 초 미술현장 밑바닥에서부터 내디뎠어요. 처음에는 막막했죠. 전시기획의 의미도 모르고 몸을 막 던지면서 겁 없이 행동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렇다 보니 백지에 글을 쓰듯, 현장에서 만나고 교우하는 작가들 하나하나가 기획을 구상하는 뼈대 역할을 했어요. 그 위에 책, 잡지, 영화, 인터넷 등에서 얻은 지식과 자연체험을 통한 감성을 올려서 자연스레 직관이 생겨난 거죠. 동아갤러리에서 8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이하 사루비아다방)에서 18년을 보냈네요. 생리 구조가 너무나 상반된, 표정 없는 냉정한 화이트 큐브와 표정 많은 날것의 시멘트 공간을 모두 경험하면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삶의 형태를 변모시켰고, 큐레이터로서 폭넓은 경험을 갖게 됐어요. 하지만 작가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죠. 그들과 작업실에서, 길거리에서, 뒤풀이와 카페에서 그리고 전시장에서 거침없는 대화와 논쟁, 삶의 에피소드를 나누고 공감하며 수많은 시간을 보냈네요. 그 속에서 작가들의 감성언어를 배웠고,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진실한 아름다움을 찾았어요. 조형의 낱낱이 어떻게 언어화되는지, 드로잉적인 사고와 사유로 작가적 태도를 견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당위성을 깨달았지요. 그리고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만의 기획과 연출방식을 체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하는 기획의 모토는 기성 작가들의 성향과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젊은 작가들의 창작 흐름을 주시하며, 내 성향에 맞는 ‘관계 짓기’를 하는 거예요. 그 속에 여러 가지 현상이 얽히고 설킨 ‘태’의 모습을 들여다보는데, 이는 텍스트보다 직관으로서 이미지를 그려낸다고 볼 수 있어요.
이성휘 전 제 기획의 방법론을 논할 만큼 경력이 오래지 않아요. 하이트컬렉션에서 3년 반, 그전에 사무소에서 1년 남짓 근무했으니 전시기획 경력이 겨우 5년 정도 됩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후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늦게 미술계에 입문했지만 중간에 휴식기가 있었기 때문에 동년배 기획자에 비해 경력은 짧은 편이죠. 반면 저랑 비슷한 시기 현장에서 활동한 작가들과 비교하면 나이는 많아요. 어중간한 위치죠. 그렇다 보니 저는 아직까지 어느 세대를 대변할 만한 큐레이터는 아닙니다. 전시 기획 횟수도 많지 않으니 제 스스로 기획의 방향에 대해 말하기 어설프지만, 돌아보면 마음속에 뭉쳐있던 것(예컨대, 〈쭈뼛쭈뼛한 대화〉(2013)), 또는 크든 작든 어떤 반발심이 기획의 동력이었습니다. 마음이 내키는 걸 하는 편인데, 방법론까진 아니지만 전시 만들 때 취하는 태도입니다. 한편으로 바로 이해가 안 되는 작업이나 작가는 오래 지켜보는 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답답할 정도로 생각만 하면서 시간을 끄는 편이에요. 아무튼 제게 별다른 방법론이 없기 때문에, 전시를 만들 때는 작가와 그들의 작업을 최우선에 두려 합니다. 그러나 연륜이 쌓이면 제가 어느 순간 오만해질 수도 있겠지요? 두렵습니다. 평생 초짜여야겠어요.
이관훈 작가의 움직임과 그들의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곳에서 기획의 소스를 추출한다는 면에서 저와 비슷하네요.
이성휘 기획의 불씨는 제 안에서 지펴지는 편이지만, 전시를 만드는 단계에 들어서면 기획의 목소리보다 작가와 작업이 전면에 부각되길 원합니다. 그때부터 저는 뒤로 숨는 편이죠. 하지만 크게 보면 저도 (주변에서 접하는)작가의 움직임과 그들의 생각에서 기획의 소스를 뽑는 거지요. 기획 소스에 대한 말씀을 하셨으니, 이 선생님이 이번에 기획하신 〈누구에게나 시선은 열려있다전〉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사실 이 전시 참여 작가가 지난해 사루비아다방에서 진행해 공모 기획한 〈제3의 과제전〉에서 선보였던 작가와 겹치는 면이 있어서 그 프로젝트부터 이번 전시를 염두에 두신 것은 아닌지 궁금했어요.
이관훈 화이트블럭으로부터 전시기획 제안을 받고 2012년부터 3년간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멘토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만난 작가들,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린 2014년 〈지역네트워킹프로젝트-시선의 차이〉와 2015년 〈제3의 과제전〉에서 소개한 작가들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평소 관심 있게 본 작가들과 어떻게 엮을 지를 염두에 두었죠. 이들을 어떤 의미로 공간에 그려야 할지 고려할 때 공간 특성을 캔버스 혹은 생성소로 생각하고 주어진 공간의 크기, 부피, 재질, 동선의 흐름 등을 고민했지요. 머릿속에 작가들의 작품이 놓일 공간이 그려진 후 전시제목을 자연히 떠올렸어요. <누구에게나 시선을 열려있다>란 제목은 전시 주체인 작가와 타자인 관객의 시선이 엇갈릴 수밖에 없는 양면성을 ‘창(프레임)’이라는 개념에 비유한 거예요. 창은 인식을 전환시키는 경계지점으로 볼 수 있는데, 작가가 창작할 때 주어진 캔버스 앞에서 끊임없이 화두를 던지고, 관객은 그 결과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지점이 인식의 창으로서 각각 자리한다고 여겼죠. 막연할 수 있지만, 저는 이런 시점의 다양성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휘 저희 전시는 하이트컬렉션에서 젊은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예요. 올해 3회를 맞았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미술계를 바라보며 느낀, 198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출생, 이른바 포스트 인터넷 세대 작가들에 대한 생각을 풀어보고자 했어요. 저는 우리 미술계가 종종 이들을 표피적인 세대로만 뭉뚱그려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들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이러한 점을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이용하는 작가도 있지만 이들이 모두 동색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미지를 표피, 살갗이라고 한다면, 그 밑에 있는 지방, 핏줄 등이 있겠다 생각했고, 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을 보여줄 방법을 고민하다가 “스토리텔링”을 생각했어요. 내러티브와 구조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잖아요. 기성작가 중에서 스토리텔링에 탁월한 분들-김범, 김성환, 박진아, 양혜규, 함양아-에게 작가 추천을 부탁했어요. 그리고 그분들이 추천한 8명의 작가-양희아, 윤형민, 염지혜, 이동근, 이솝, 이혜인, 전혜림, 함혜경-는 이제껏 그랬듯이 무조건 수용하고 파악해야 했습니다.
이관훈 참여 작가를 추천받은 이후부터 모든 전시 연출은 이성휘 큐레이터의 몫 아닌가요?
이성휘 물론 연출은 작가와 상의해서 같이 했죠. 연출에 추천인은 일절 관여하지 않아요. 다만 추천인과 피추천인이 상하관계로 비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추천인에게 의무적으로 인터뷰나 리뷰 글을 부탁해요. 기성세대가 그들이 추천한 젊은 세대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죠. 그리고 젊은 세대도 기성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소통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이번 전시를 만들며, 유명한 작가 5인의 이름을 큐레이터로서 너무 쉽게 가져가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들었어요. 작가 선정은 사실 큐레이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냐는 거죠. 추천인들과 저는 위치와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견해가 가능하죠. 그러나 작가들을 위해서는 추천제가 낫겠다 싶어요. 좀 더 멀리 내다봤을 때 작가들 간의 연결과 상호 이해도 중요하거든요. 예를 들어 김성환 작가는 이혜인 작가의 작업을 뉴욕에서 잠깐 봤을 뿐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건 아녜요. 그러나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꿰뚫어본 것이 있었으니 저희 전시에 추천한 거죠. 아마 두 사람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졌을 거예요.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예요. 피추천 작가들이 지금은 신진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4~5년만 흐르면 선배 작가들과 같은 전시에서 동등하게 활동하게 되니까요.
이관훈 어떤 평자는 전시할 작가들을 추천받으면 기획자의 정체성이 결여될 수 있다고 보는데, 저는 좀 달라요. 넓은 의미에서 추천인들도 작가들과 같은 의미로 다가와요. 기획자가 그리는 큰 그림에서 형식이 다를 뿐, 결과적으로 주제는 기획자가 제시하고 추천된 작가들 전체적으로 작업을 들여다보며 논의하고, 연출하고, 글 쓰고, 진행하는 형식으로 이뤄지잖아요.
이성휘 그렇다면 선생님의 경우에는 전시 연출에 큐레이터의 자의식을 많이 반영하는 편인가요? 작가들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전 작가에게 양보하고 제 자의식을 최대한 누르려는 편이거든요.
이관훈 꽤 많이 투영하는 편이라고 볼 수 있죠. 제1의 창작자인 작가는 작업실 안에서 빈 여백에 모든 에너지를 집결하여 응축시킨 창작물을 내어놓았다면, 제2의 창작자인 큐레이터는 제도 공간인 전시장에서 작가와 논의하여 또 하나의 캔버스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작품 선정도 작가와 논의해서 결정하는데 전체의 흐름을 그리고 있는 큐레이터 입장에서 주도한다고 봐요. 이런 의미에서 전시 연출은 기획의도 및 개념과 동일선상에 있으며, 전시라는 총체적인 방향에서 50% 정도 차지하죠. 현대미술이 1970년대 이후 전시사로 쓰인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보면 연출된 작품은 작가를 비평 혹은 평가하거나 담론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수단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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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근 < Trace of Flight > 207×150cm 혼합재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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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아 <눈의 밤>(왼쪽) 종이에 수채 76×56cm(각) 2014

젊은 작가를 말하다
이성휘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큐레이터로서의 고민이 있었어요. 바로 ‘젊은 작가전’이라는 화두를 꺼내는 자체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이에요. “과연 4번째 시리즈 전시를 이어갈 수 있을까”하는 회의감도 있었죠. 막상 전시를 오픈하니, 3회째 지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체의 이야기가 생기더라고요. 결국 좀 더 반복하되 보완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젊은 작가라는 표현은 처음 이 시리즈 전시를 열 때 상대적으로 젊은 연령대의 작가를 통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에요. 상대적인 개념으로 정의 내렸지만 여전히 젊은 작가란 말을 모호하게 두어야 할지 고민됩니다. 단 이번 전시 참여 작가가 앞선 두 전시보다 연령이 높은 (30대 중반 이상이 다수)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봐요. 첫째는 추천을 의뢰받은 5명의 작가에게 더 어린 작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일 수 있겠죠. 둘째는 20대에게 이야기를 구조화하고 풀어내는 것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할 수 있겠단 생각도 했어요.
이관훈 이성휘 큐레이터가 말한 것처럼 ‘젊은’, ‘신진’ ‘중견’작가라는 말에 회의감이 분명 있죠. 저도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서두에 ‘신진’, ‘젊은’ 등의 표현을 쓰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요. ‘젊다’는 표현은 시대적인 문화 현상의 가치에 대해 피드백이 되어 생겨나오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1980년대, 1990년대에도 젊은 작가는 존재했어요. 제가 기획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젊은 작가들과 늘 함께 활동해왔는데, 세월이 흐르며 저도 모르게 나이든 기획자가 되버렸네요. 미술계 현장은 시스템 측면에서 2000년대를 기점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 즈음인 1999년에 대안공간도 등장했지요. 1950~1960년대 즈음 미술계에 대략적인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 이래 50여 년간 변화한 내용보다 2000년 이후 10여 년간 일어난 변화가 훨씬 크고 급진적이죠. 거칠게 예를 들자면, 이전에는 작가들이 추상, 모던 등의 거대 담론이라는 프레임을 넘지 못할 미술사적 벽으로 바라본 측면도 있어요. 그러나 거대 담론에 대한 비판과 자의식으로 2000년대 이후 작가들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내러티브적 요소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로 ‘기억, 사건, 현상’을 들고 싶어요. 덧붙여 변화의 주기가 더욱 가속화됐어요. 2000년대에 등장한 젊은 작가들과는 또 다른 변모로 2010년대에 등장하는 젊은 작가들이 번역되거든요. 이러한 변화로 다양성과 해체론이 계속 전개되는 것을 저는 긍정적으로 봐요.
이성휘 ‘젊은’ 작가만큼 ‘기성세대’의 위치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전시 추천인을 선정할 당시 ‘스토리텔링’이라 하면 일단 영상작업이 다수를 차지할 것 같았어요. 그러나 매체가 다양했으면 하는 마음에 추천인에 화가를 포함시키고자 했죠. 평소 스토리텔링 부분이 강점이라고 생각한 모 화가에게 먼저 부탁했어요. 그분이 처음에는 흔쾌히 응했지만 이후 다른 추천인 명단을 말했더니 부담스럽다고 사양하더라고요. 전 추천과 비추천인을 신·구세대 작가로 획일적으로 나누거나 경력을 계량하듯이 접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나 경력이 그다지 중요치 않았는데 말이죠.
이관훈 최근 세대론이 대두되잖아요. 2000년대 세대라고 하면, 1980년대는 국내에서 대학을 다니고 유학 간 세대가 꽤 많았어요. 당시 유학에서 돌아온 이 젊은 세대가 대안공간의 출발점을 함께 했어요. 시간이 흘러 지금은 미술계에서 하나의 문화적인 지형을 이루는 작가가 되었죠. 2010년도가 되니 젊은 세대 중에 유럽을 중심으로 유학한 작가가 활발히 활동하는 듯 보여요. 2014년 사루비아다방의 운영체제 변환도 이 시기와 맞물리죠. 특히 작년 3월부터 황정인 큐레이터와 함께 하면서 젊은 작가, 비평가들의 네트워크가 생겼어요. 관객에도 변화가 있고요. 2011년 1월 전시공간을 인사동에서 창성동으로 옮긴 후에 유독 젊은 세대가 전시장을 많이 찾아요.
이성휘 저는 세대 간 불통이 심화되고 있는 지점이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제 또래들은 자기가 먼저 작업을 하고 그 결과물로서 작가 또는 큐레이터로 인정을 받느냐 아니냐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반면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생 작가나 큐레이터는 자기 정체성을 먼저 작가로 혹은 큐레이터로 규정한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해요. 현 사회와 시대가 생존을 위해 버티려고 아등바등하게 만들고 있잖아요. 젊은 세대는 생존을 위해 자기 규정을 우선시하는 것 같아요. 물론 어떤 순서가 옳고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녜요. 단지 이 시대가 자기에게 스스로 정체성을 부여해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런 길을 택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관훈 과거와 현재 세대가 가진 감성도 다르죠. 최근 미술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키워드가 ‘재생과 반복’이 아닐까 싶어요. 소비문화시대에서 답습되고 쌓인 내용이죠. 재생과 반복이란 면에서 완전한 창작의 자유로움도 새로운 창작도 없죠. 요즘 젊은 작가들이 이를 인식해서 수용하기보다 무의식적인 흐름에서 본인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 같아요. 하지만 몇몇 작가에게서 비상적인 모습이 보이기도 하죠. 재생과 반복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저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봐요.
이성휘 물론 모두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 젊은 작가들 또래에게는 ‘팬덤’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아이돌에 열광하는 대중문화에 익숙한 세대가 가진 특징일 수도 있겠네요. 작가들 사이에서도 팬덤이 존재해서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호불호가 갈리는 현상은 조금 불안해 보이는 요소예요. 모든 개인이 각자의 판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휩쓸려가는 모습을 보면 아슬아슬하죠. 반면, 작가 혹은 큐레이터로서 자기 정체성을 먼저 부여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 같은 또래 작가를 보기도 해요.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눌 수 없겠죠.
이관훈 긍정적인 편견은 여러가지 양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좋아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몸짓까지 포함한다는 거죠.
이성휘 충분히 공감해요. 그럼에도 세대론으로 작품을 규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또래 작가라고 해서 전부 공감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물론 세대들의 공통분모도 있지만 집단보다 개인으로 파고들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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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센터 화이트블럭 2층 복도에 설치된 류민지의 작업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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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전시 전경 최지원(왼쪽), 이은새(오른쪽)

큐레이터로 살아가기
이관훈 대안공간은 존재 자체가 당위성보다는 척탄병처럼 일선에서 움직여야 하는, 그래야만 가치와 역할이 생기죠. 그래서 저는 항상 촉수를 세우고 작가를 살피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국내 미술계의 작가 및 전시 시스템은 매번 새로운 것을 보이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어떤 정신적인 병리현상에 걸린 느낌이 강해요. 60세에 그동안 했던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첫 개인전을 연 작가 사례가 있었는데, 가슴 뭉클하게 하는 존경심이 자연스레 우러났어요. 현 시대적 속성인진 몰라도 작가들, 아니 미술현장의 시스템은 창작물을 너무도 빠르게 보여주려 해서 작가들의 작업실과 창고에 방치된 것이 너무 많아요. 시대가 지났다고 계속 새로운 것을 해야 하고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요. 현 시대는 새로운 창작도 사고를 증폭시키는 전환의 계기로 삼지만, 예전의 기억 속으로 묻혀버린 존재도 다시 여기에서 재편집하여 좋은 전시를 엮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다고 봅니다. 저는 현시점에서 ‘기억과 낭만’이 예전보다 더 중요한 세대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흐를수록 작가와 작품은 쌓이고 있잖아요. 개인전을 다루더라도 재기획 차원에서 달라진 혹은 더해진 문화의 층위에서 재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작가의 담론과 재평가가 이뤄져야하지 않을까요. 시대가 지나면 다시 아이콘이 형성될 수 있어요. 비평·미술사적 측면에서 어떻게 편집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에요. 대중문화에서도 복고 열풍이 불어 기억에 대한 복원을 통해 희열과 감동을 느끼잖아요. 큐레이터들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에요. 현장에서 보이는 것은 결국 작가들이 힘들게 가꿔온 영혼을 머금은 잔영물이죠. 큐레이터들은 나침반과 같이 작가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하며, 모든 사회관계 안에서 그들을 밖으로 연결해야 하는 네트워크로 작용해야 합니다. 네트워크는 정보의 흐름이며, 신뢰의 흐름이며, 자본의 흐름이며, 시스템의 흐름일 뿐 아니라 끊임없는 조력자의 역할을 지닙니다. 말하자면 무형의 존재인거죠.
이성휘 저는 전시의 여러 형식 중에서 개인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개인전에서 작가만 보려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개인전에도 큐레이터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작가-큐레이터 간의 긴장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전이 작가의 역량도 고스란히 보이는 것이지만, 큐레이터의 역량도 고스란히 보인다고 보고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큐레이터로서 잘 버텨야 앞으로 최장 10년이 한계일 거 같아요. 저는 대체로 허송세월하며 살아왔어요. 그러나 어릴 때부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이 먹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그 10년을 위해 5년을, 또 그 5년을 위해 올해 1년을 잘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어요.
이관훈 ‘버티기’란 말이 인상적이네요. 지금 사회의 키워드가 아닐까 해요. 사회에 희망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버틸까 하는 생존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인 것 같아요. 작가도 공간도 큐레이터도 모두 마찬가지죠. 작가의 경우, 사실 어떻게 작가가 되느냐는 것은 막연하거든요. 버티는 게 답일까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이성휘 ‘잘’버텨야겠지요. 저는 유한한 시간 동안 잘 버티려고 노력하려해요.
진행 정리•임승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