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사임당, 그녀의 화원
사임당, 그녀의 화원
더 이상 신사임당을 ‘한국을 대표하는 어머니상’ ‘현모양처의 표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길 바라는 전시가 서울미술관에서 한창이다. 개관 5주년을 기념하는 이 전시에는 이미 뛰어난 작품성으로 인정받은 14점의 〈초충도(草蟲圖)〉를 비롯하여 총 15점의 작품이 관객을 찾아간다. 무엇보다 KBS 1TV 프로그램 ‘TV쇼 진품명품’에 2005년 공개된 후 처음으로 전시장 나들이에 나선 〈묵란도(墨蘭圖)〉에 주목하자. 이젠 사임당을 단순히 ‘女人’이 아닌, 시 · 서 · 화에 능한 예술가로, 시대적 제약에 굴하지 않고 자기 계발에 매진한 능동적인 한 ‘사람(人)’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오죽헌에는 정말 그 꽃이 피었을까
이홍주 |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임당 신씨(1504~1551), 현재를 사는 우리는 조선시대 여성의 전형으로 흔히 그를 떠올린다. 그는 출중한 기량의 화가이면서 효녀이자 양처이자 현모인, 가부장적 유교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추앙되어 왔다. 2009년에는 신사임당을 수수하고 점잖은 부인으로 그린 초상이 고액권 지폐의 도안으로 선정되어 과연 그를 한국역사를 대표하는 여성으로 삼는 것이 적절한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최근엔 일련의 소설과 드라마가 신사임당을 새롭게 해석하며 또다시 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중이다. 16세기 전반의 조선을 살았던 한 여성이 왜 이렇게 끊임없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신사임당이라는 여성의 실체와 얼마나 가까운가.
지금 서울미술관에서는 화가 신사임당을 조명한 작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사임당, 그녀의 화원”이라는 제목으로 안병광 서울미술관 관장이 소장한 신사임당 전칭의 〈초충도〉 15점을 선보이고 있다. 공개된 작품은 검은 종이에 채색으로 그린 〈초충도〉 10폭, 유지에 채색으로 그린 초충도 4폭과 송시열의 발문이 함께 장황된 〈묵란도〉 1폭이다. 규모는 작지만 그동안 공개된 적 없었던 작품들이 전시되는 것이라 주목할 만하다.
〈초충도〉는 수박, 양귀비, 구절초, 원추리, 가지, 오이, 달개비, 여뀌, 추규, 봉선화, 패랭이꽃, 맨드라미 등 우리 정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담한 풀꽃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생쥐, 개똥벌레, 개구리, 잠자리, 나비, 벌, 방아깨비와 같은 동물들을 윤곽선 없이 화사한 채색만을 사용하여 묘사하였다. 색색의 화폭들은 과연 신사임당이 가꾸었을 법한 오죽헌의 정원으로 관람자를 이끄는 듯하다. 전시장의 두 면을 차지한 흑지 바탕의 10폭 초충도는 2002년 일본에서 열린 “조선왕조의 미(朝鮮王朝の美)” 순회전에서 공개된 바 있다. 매 폭을 신사임당 그림에 대한 조선시대 문인들의 찬사와 병치하여 대학자 율곡을 키워낸 어머니, 현모양처라는 타이틀 뒤에 가려진 위대한 예술가 신사임당의 면모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시의도를 보여준다.
사실 ‘신사임당 초충도’가 한국회화사에서 16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혀왔음에도 신사임당의 화가로서의 진면목을 증명하는 확실한 진작(眞作)은 남아있지 않다. 현재 전하는 작품들은 모두 그의 화풍을 반영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전칭작(傳稱作)이다. 두세 종의 식물을 조합한 장식적인 구도와 도안적으로 평면화하여 단순하게 그린 꽃잎과 잎, 열매의 형태, 이들을 서로 겹치지 않게 배치한 점에서 신사임당 작으로 전칭되는 초충도들은 자수를 놓기 위한 밑그림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특히 검은 공단에 색실로 〈오이와 개구리〉, 〈맨드라미와 도마뱀〉과 같이 유사한 구도와 소재의 화면을 수놓은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자수초충도병〉의 존재는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특히 이번에 출품된 흑지 바탕의 채색 초충도는 자수로 제작했을 때의 효과를 최대한 살려 그린 것이다. 장식성과 생동감이 묘하게 공존하는 매력이 있다. 이 작품은 10폭 중 7폭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충도10폭병〉과 구도와 경물이 정확히 일치하고, 2폭이 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초충도병풍〉 속 화면과 일치한다. 이러한 사실은 ‘신사임당 초충도’로 일컬어지는 범본들이 반복적으로 자수와 회화로 모사되었던 정황을 시사한다.
이 전시에 출품된, 유지 바탕에 채색으로 그려진 4폭 초충도는 이보다 좀 더 원작으로부터 멀어진 모사도로 보인다. 화면의 한쪽 모서리로부터 대각선 방향으로 식물을 배치한 구도는 장식의 목적에 보다 충실하며, 화면에 등장한 검은 나비는 다른 작품에 대칭형으로 등장하는 나비와 달리 19세기 남계우 풍의 나비에 훨씬 가깝다.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묵란도〉는 2005년 KBS TV쇼 “진품명품”에 출품되어 진작으로 인정받아 1억3500만 원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은 바 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에 이후 문인들의 관심을 촉발시킨 송시열의 발문이 함께 장황되어 있다. 사실 이 그림에 그려진 것은 난이 아니라 원추리꽃이다. 원추리 외에도 두어 가지 풀이 함께 자라고 있고 꽃을 향해 나비 한 마리, 벌 한 마리가 날아들고 있으며 바닥에는 방아깨비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이 역시 채색은 아니지만 수묵으로 그린 한 폭 초충도인 것이다. 이 그림이 난데없이 ‘묵란도’로 알려진 것은 그림에 쓰여진 송시열의 발문이 그의 문집 《송자대전》에 ‘사임당화란발(師任堂畵蘭跋)’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발문에서 이 그림이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오히려 능히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어서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물며 그가 낳은 아들은 어떻겠는가,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시대와 해석에 묻힌 사임당
서울미술관의 이 짧은 전시는 신사임당과 그의 〈초충도〉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거나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을 규정한 많은 찬사를 그림과 나란히 보여주면서도 그 찬사들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모습으로 ‘화가 사임당’을 빚어냈는지를 고찰하지는 않았다. 이 전시를 보고 나서 뇌리에 남는 위대한 예술가 신사임당은 어떤 화가인가. 오죽헌의 정원을 가꾸며 이를 화폭에 옮긴 여성화가? 조선시대에는 이례적으로 당대 저명한 문인들에게 그 예술성을 인정받은 여성? 이것이 아쉬운 이유는 한국회화사에서 ‘신사임당 초충도’가 가지는 기존의 명성이 여러모로 문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신사임당 하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수박과 생쥐〉, 〈가지와 개구리〉 등의 작품들을 우리는 교과서에서 보아왔고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초상이 있는 오천원권과 오만원권 지폐에도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들어있다. 그러나 신사임당 회화에 대한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신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의 문헌 기록에는 그의 산수화나 묵포도도를 언급하였을 뿐 그가 초충도를 잘 그렸다는 기록은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초충도가 신사임당의 대표작으로 주목되고 여러 작품이 출현하는 것은 18세기의 현상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현상의 단서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이 전시에 출품된 〈묵란도〉에 적힌 송시열의 발문이다. 이 그림은 율곡의 종증손 이동명이 한양의 어떤 이에게 구하여 1659년 송시열에게 발문을 요청한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해 송시열은 신사임당이 “율곡 선생을 낳았음이 마땅한” 근거로 삼아 이이의 학통을 이은 서인계 인사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그림으로 만들었다. 이동명은 1676년에는 16세기 문인 소세양의 제화시가 있는 사임당의 산수화에도 송시열의 발문을 요청하였는데, 그 산수화에 대한 송시열의 태도는 ‘묵란도’와는 사뭇 달랐다. 송시열은 이 그림이 율곡의 모친이 그린 그림으로서는 적절치 않다 보았는데, 그림의 수준과 규모가 전문적인 화가의 것이고 소세양의 제화시에 스님이 등장하며, 외간 남성이 여성의 그림 위에 제화한 상황 등이 모두 가당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송시열은 신사임당의 그림을 그들 서인계 문인들이 존숭하는 율곡의 어머니에게 어울리는 화목과 성격으로 재규정했다. 이후 18세기부터 신사임당의 산수화는 역사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그의 그림은 초충도로 대표되었다.
이후 서인 노론계의 핵심인물 정필동이 1707년경 양양부사로 재임하며 입수한 사임당의 초충도 7폭에 송시열계 문인이자 숙종비 인경왕후의 오빠 김진규를 비롯한 신정하, 송상기 등 노론계 인사들의 발문을 받았다. 이 화첩은 결국 숙종의 장인 김주신의 소장품이 되었고 1715년 궁궐에 내입되어 숙종이 열람하게 된다. 숙종은 제시를 지어 무골법(無骨法)의 채색으로 그린 교묘한 그림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이를 모사하고 한 폭을 더하여 8폭 병풍을 만들어 대전에 들였다. 이 전시에 인용된 찬사 대부분이 사임당의 초충도에 대한 숙종과 노론계 문인들의 글이다.
신사임당을 둘러싼 여러 의미와 평가에는 두 가지 사실이 재료가 되었다. 그가 뛰어난 화가였다는 사실과 조선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의 어머니라는 사실. 신사임당의 그림 재주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대학자의 어머니라도 주목받을 일이 없었을 것이고, 그 아들이 율곡이 아니었다면 그의 그림이 아무리 뛰어났어도 조선시대 일반 사가의 여성이 이렇게 풍부한 기록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사임당이 뛰어난 화가이자 대학자를 길러낸 어머니였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가 어떤 화가였고 어떤 어머니였는지는 후대에 그를 평가한 남성들의 필요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어왔다. 특히 ‘화가’ 신사임당은 후대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은 서인-노론계 문인들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그들이 존숭하는 율곡의 어머니로서 어울리는 성격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후 19세기, 20세기에도 신사임당의 그림은 계속해서 율곡과 그를 키워낸 모범적 모성(母性)의 표상이 요구될 때마다 조금씩 다른 문화적 기능을 위해 호출되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이 〈초충도〉들은 무엇을 반영하는가? 18세기의 상황에서 신사임당이 자수를 위한 밑그림으로 그린 초충도가 실제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여러 신사임당 전칭의 초충도 양식을 비교하여 어떤 것이 신사임당의 실제 화풍에 가까운지를 규명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이 초충도들의 매력이 반감하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들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하던 동식물들을 아름답게 도안화하여 자수로 제작했던 전통의 산물이며, 또한 그림을 감상하고 평하며 그에 대한 시문을 적는 미술사적인 활동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던 문인-정치가들의 관습이 낳은 그 시대의 흥미로운 문화현상이기도 하다. 아들을 대학자로 길러낸 어머니의 자질을 드러내는 자수풍 초충도의 화가로만 신사임당을 수용할 것인가. 이 전시가 단순해 보이는 그림을 둘러싼 복잡한 여러 층위를 들추어 보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