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숭고의 마조히즘

과거 미술관에서 관객들이 제한된 동선 안에서 작품을 만지는 것도 금지되었다면 오늘날에는 관객참여형 작품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하지만 관객과 작품 사이에는 항상 긴장관계가 팽배하다.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린 <숭고의 마조히즘전>(2.4~4.19)은 관객과 작가, 작품과 관객이 맺는 새로운 관계를 ‘숭고’와 ‘마조히즘’이라는 개념을 통해 재조명한다.

예술의 권력관계를 의식하라

이필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숭고의 마조히즘전>은 관객과 남다른 소통을 꾀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작가와 관객의 권력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숭고가 쾌와 불쾌의 감정을 동시에 주는 미학적 개념이라는 점에 착안해 관객의 참여를 끌어내고자 하는 작가의 작품과 관객의 긴장관계를 ‘불편한’ 관객의 입장에서 조명한다. 전시 기획자가 관객이 작품을 대할 때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전시공간에서 작품과 관객 중 누구에게 더 큰 힘이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하고 묻는다. 전시 기획자는 뉴미디어 시대의 작품이 관객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지만 그것이 곧 관객이 권력을 이양받았다는 사실이 아님을 환기시킨다. 이는 마조히즘적 성행위에서 여성이 남성을 가학하는 권력을 부여받았으나 그 권력은 가학을 즐기는 남성에 의해 주어졌기에 진정 여성의 것이 아니라는 점과 비유된다. ‘숭고의 마조히즘’이라는 제목은 숭고의 경험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쾌의 감정의 공존을 마조히즘의 처벌과 쾌락이라는 이중적 관계에 대입한 것이다.
이 전시는 숭고를 느끼는 주체를 관객이 아니라 작가로 상정했다. 전시서문에서 밝혔듯이 기획자들은 숭고라는 개념을 작가 안에서 일어나는 쾌와 불쾌의 감정의 이중성으로 보았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관객이 개입하는 것에 불쾌의 감정을 느끼지만 동시에 관객이 계획대로 움직일 때 불쾌의 감정은 쾌로 돌아선다는 것이다. 이는 숭고를 작가와 관람자의 권력관계로 이해한 개념적 혼란에서 빚어진 오류로 보인다. 기획자들은 작가와 관객, 남성과 여성,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비정상적인 마조히즘적 성관계에 비유하고 권력을 가진 자가 느끼는 지배의 쾌락을 숭고의 감정에 비유한 것이다. 숭고는 관찰자가 대상을 보고 느끼는 체험적 감정이다. 그렇다면 전시에서 숭고는 대상을 마주하는 주체, 즉 관람자가 작품을 보고 느끼는 두려움, 좌절, 감동, 불쾌와 쾌가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이어야 마땅하다.
숭고는 본래 롱기누스의 미학과 문학비평에 대한 글인 <숭고에 대하여>에서 뛰어난 수사학을 구사해 위대한 사고와 강렬한 감정 등을 표현한 작품을 칭송하는 개념이었지만 그 정의는 변해왔다. 18세기 유럽에서 숭고는 장대한 자연에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좌절의 감정으로 묘사됐다. 버크는 숭고의 심리적 효과로 공포와 끌림이라는 감정의 이중성을 지적하며 이러한 혼란스러운 감정의 격앙 끝에 고통의 감정이 제거될 때 인간은 쾌를 느낀다고 했다. 칸트에게 숭고는 절대적으로 위대한 것으로, 대상의 형태와 결부된 감정인 미와는 달리 웅장, 장려, 두려움을 주는 무한대적 무정형의 형태에서 이성이 개입해 느끼는 공포의 감정으로 초감각적인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숭고는 관찰자를 위협하는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쾌로, 격동하는 자연이 그 예이다. 리오타르는 인간의 마음이 이성적으로 정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대상의 존재가 있다는 점, 그 대상을 마주했을 때 인간이 경험하는 위기감, 감정과 이성, 마음과 개념의 ‘갈등the differend’을 모던기의 근간이 되는 변화라고 보고 이를 숭고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숭고는 18세기의 장엄한 자연을 대상으로 한 인간의 경험을 묘사하는 데서 시작해 모던시기의 웅대한, 산업적이고 도시적 대상으로, 동시대에는 상상을 초월한 새로운 기술을 대상으로 논의되고 있다. 마리오 코스타는 뉴미디어아트의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네트워크는 그 소통방식에서 주체를 약화시키고 예술과 그 각 경계가 무너지는 가늠하기 어려운 ‘유동flux’의 상태를 심화시키는데, 이를 ‘테크놀로지의 숭고the technological sublime’라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구동희  혼합재료 2015

구동희 <무제> 혼합재료 2015

박준범  8채널 HD비디오, 2싱글 채널 HD 비디오 5분 2015

박준범 <7개의 언어> 8채널 HD비디오, 2싱글 채널 HD 비디오 5분 2015

작품과 관객, 작가와 관객의 역학관계
<숭고의 마조히즘전>을 찾는 관객은 작품을 통해 경험하게 될 숭고의 감정을 기대하며 설렌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관객은 전통적 의미의 숭고의 경험도, 예견치 못한 숭고에 대한 동시대적인 새로운 개념적 접근도 쉽지 않다. 관객은 전시된 작품을 통해 숭고와 관계된 장대함, 거대함, 무한함, 공포, 위협감 혹은 유사 숭고 등을 만나지 못하고 전시 개념의 난해함 속에 남겨진다. 이는 ‘숭고’를 느끼는 기본 구도인, 대상 (이 전시에서는 작품)과 관찰자의 조우에서 관찰자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의 발생이라는 틀을 기획자들이 작가와 관객의 권력관계로 치환한 의도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은데서 기인한다. 예술작품의 의미 생성에 작품과 관객, 작가와 관객의 역학관계를 다루는 전시라면 숭고라는 개념이 반드시 필요한지 의문이다.
전시 기획자가 던진 명백한 주제는 관객 참여적인 작업에서 작품과 관객의 권력관계이다. 예술에 있어 작품과 관객의 권력관계의 전회는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에로>에서, 미셸 푸코가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피력했고, 후기 구조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논의해왔다. 그들의 논의에서 작품의 의미를 통치하는 존재인 저자의 권력이 약화되고 작품이 미처 의도하지 않은 의미마저 자유롭게 생성하는 전제조건은 독자 혹은 관람자의 권력 획득이다. 미술사적 맥락에서 관객 참여적인 미술은 다다, 초현실주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등 20세기 미술운동의 주된 관심사였다. 작품을 대하는 관객의 신체와 심리, 긴장 등 관객 참여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미국의 미니멀리즘에서다. 이 전시가 관객과 작가/작품 간의 긴장, 혹은 그러한 권력관계의 이양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라면 이러한 미술사적 미술이론적 맥락을 놓친 점이 아쉽다.
작가와 관객의 권력관계에서 드러나는 마조히즘을 다루고자 한 기획자의 입장에서 작품 선정을 이해하자면 고창선, 구동희, 박준범의 작품은 사전에 설정된 작가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된 관객에 임상빈과 오용석은 조작된 일루전을 제시하는 숨은 권력을 행사하는 작가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손몽주와 정재연의 작업에서 관객은 억압적인 권력관계나 가학, 긴장을 느끼기 어렵다. 고무 밴드로 구축한 손몽주의 역동적인 공간을 체험하는 관객과 정재연이 제공한 하얀 벽에 즐거이 흔적을 남기는 관객들의 쾌마저 마조히즘적 관계에 대입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전시는 저자(작가)의 죽음을 부인하고 독자(관람자)의 탄생을 논하는 관객 참여적인 미술에서 관객에게 권력이 이양됐다는 사실이 허구임을 드러내고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는 작가의 힘을 드러내려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동시대미술의 대세적인 관점을 부정하고 여전히 바뀌지 않은 관객과 작품의 권력관계를 재조명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숭고와 마조히즘이라는 개념 및 상호 연관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는 미흡해 보인다. ●

정재연  스틸 파이프, 밧줄, 공 2014

정재연 <라는 제목의(Entitled)> 스틸 파이프, 밧줄, 공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