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환영과 환상

환영과 환상은 예술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과 연결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기획 전시로 <환영과 환상>(2.10~5.6)을 열어 사실적 재현에 기반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한 국내 작가 7명의 작품 30여 점을 선보였다. 필자는 환영과 환상은 시각적 요소에 제한되지 않으며 감각의 차원을 너머 비일상적인 경험과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네가 보는 것이 네가 보는 것이 아니다

진휘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환영은 미술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는 화두 중 하나이다. 입체, 덩어리와 공간의 현실을 평면에 옮겨 그릴 때부터 진짜가 가짜로 변화하는 환영의 전제는 미술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회화의 평면성을 인식하고, 눈속임을 벗어나려는 형식주의 모더니즘 논쟁을 통해 회화는 구상적 소재나 내용을 배격하면서 평면이라는 매체의 한계에 집중했다. 그러나 단순히 매체가 미술의 본질이 아니기에 그림이 눈속임이라는 주장은 시기적 한계와 시각적 도그마를 가질 뿐이었다. 재현이 모방이나 허구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미술의 실체를 오도하지 않듯이, 환영과 환상은 미술의 본질적인 성격 중 하나이다.
오히려 환영과 환상을 통해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작가와 관객들은 부정적인 강조를 제거하고 감각과 인식의 왜곡을 통한 경험의 확장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맥락에서 환영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상황을 통해 제시될 수 있다. 시각화된 이미지뿐 아니라 감각과 인식의 변형, 왜곡을 가져올 수 있는 환경, 공간, 소재와 기술 등 환영의 기법이 확장될 때, 환상도 동전의 양면처럼 작동한다.
20세기 전반,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무의식의 존재와 그것의 작동에 대해 연구했고, 환상을 창출할 수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제작했다. 작가 여러 명이 몰려다니면서 놀이처럼 무의식의 존재를 실험했다. 특별한 의도 없이 무언가를 선택했을 때, 그 뒤에는 반드시 이성이 아닌 어떤 영역, 적어도 이성에 의해 조정 받지 않는 동인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선택하고 표현하게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작품의 결과물이 무의식을 반영하고, 그것을 통해 나의 무의식이 더 발달하고 드러날 것을 기대했다. 당시 작가들은 이성과 다른 방식의 작동기제로서 무의식만 염두에 둔 듯하다. 다시 말하면 무의식을 이성과는 완전히 배타적 관계인 것으로 보았다. 과연 그럴까?
그들이 발견한 무의식을 자극하는 이미지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다양한 환상을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이미지는 익숙한 것들과 이질적인 상황, 또는 보편적인 대상들이 빚어내는 이상한 조합들로 수렴되었다. 프로이트는 ‘언캐니’의 개념을 이론화하면서 보편적이고 일상적이어서 충격을 주지 않는 이미지가 비일상적인 요소나 맥락을 만나서 우리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한다고 했다.
‘이상한데 익숙하고, 맥락에 맞지 않는데 친밀한’ 무엇이 우리 인식의 불일치를 가져오고 매력과 거부의 상반된 모순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심리분석 이론을 떠나 이미지와 인식 간에는 떨어지지 않는 복잡성이 존재하고, 이성과 다른 방식의 전제를 갖는 것이 있다. 기이함은 시각예술에서 오랫동안 시도된 요소라 할 수 있다.
특히 이성적 인식과 왜곡된 감각을 자극하는 환영은 실체와 수용 간에 혼돈을 주어 그 간극을 탐구함으로써 즐거움, 또는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환영이 감각적 트릭이라면, 환상은 주체의 주도적 실체 밖의 무엇에 대한 꿈, 생각, 조작,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와 다른 환상을 통해 우리는 이성, 감각, 인식, 감정, 무의식의 많은 것을 이용하고 포괄한다.
환상幻想의 상상력을 상象으로 치환하고, 이것의 이미지들을 기획한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환영과 환상>이다. 이 전시는 7명의 중견작가와 그들의 대표적 스타일의 작품들로 구성됐다. 작가의 선택과 작품의 내용이 전시 의도를 매우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광호 (왼쪽) 캔버스에 유채 259.1×181.8cm 2008

이광호 <선인장(No.30)>(왼쪽) 캔버스에 유채 259.1×181.8cm 2008

유현미 , 잉크젯 프린트 195×130cm(5점), 195×650cm(1점) 2013

유현미 <작업실 안의 우주>, 잉크젯 프린트 195×130cm(5점), 195×650cm(1점) 2013

환영과 환상, 시각의 영역을 넘어
이광호는 큰 캔버스 위에 선인장들을 그렸다. 지나치게 섬세하고 사실적인 식물의 모습은 부분적으로 기괴하게 느껴지는데, 예를 들어 선인장의 일부가 고름이나 사람의 피부, 또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생물이나 특수한 지형같이 보인다.
천성명은 <그림자를 삼키다>에서 아들을 안고 있는 아버지처럼 보이는 두 인물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는 부자관계가 아닌 자라지 못한 나, 미니-미mini-me와 자신의 모습을 담은 조각이다. 다른 공간엔 피를 흘리며 물고기를 든 사람의 조각과 나무 패널 위에 얼음산과 바위를 그린 큰 그림이 배치되었다. 각각은 서로 이질적이고 상호 논리성을 갖지 않으며 조각과 가운데 놓인 그림의 역할도 모호하다. 상황은 입체적인 환경과 엮임 안에서 더욱 의아하고 기괴해 보일 뿐이다.
최수앙은 이질적인 부분들이 섞여서 인체에 버금가는 형상을 갖는 조각상을 제작했는데, 캐스팅하고 버린 껍질 부분들을 진열하거나 가판대 위에 인체의 일부분을 배열, 마치 고기 덩어리를 판매하는 광경처럼 보인다. 진짜와 가짜, 전체와 부분, 안과 밖 등 단순한 인식의 전제를 전복한다.
강형구는 반 고흐, 마일스 데이비스, 자화상 등 익숙한 인물들을 큰 화면에 그렸는데, 자세한 디테일 표현이 강렬하다. 강렬한 색채와 회화적 세부 묘사가 팝아트와 극사실주의 어디에도 정확히 속하지 않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고명근은 이국적 건물을 디지털필름으로 구성해서 콜라주 작품을 만들었다. 실제 공간과 건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지만, 작은 모형처럼 변한 공간은 다시 유사 공간화하고, 현실의 장소성은 미술품 안에 박제된 것으로 전환된다.
유현미 작품은 자신의 스튜디오, 인물을 포함한 공간의 여러 모습을 사진 찍은 것이다. 그 사진은 실제 공간과 모델에 물감과 붓으로 채색하여 회화의 터치, 색채가 더해진 상태이다. 실제 대상과 회화적 과정, 재료, 기법의 개입을 드러내고, 그것을 다시 사진 찍음으로써 작가는 재현과 표현의 오랜 관계를 구체적으로 가시화한다. 회화 같은 사진, 가짜 같은 진짜, 그 사이에서 관객은 모호한 감각의 층위를 경험하게 된다. 특히 그 과정을 실제 사람들이 등장하는 뉴미디어 동영상으로 보여준 작품은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
강영민은 현대사회의 물질 숭배와 강박증을 컴퓨터 픽셀을 키우고 깨뜨려 조작했다. ‘가위눌림-자본주의적 건설과 파괴의 딜레마’란 매우 친절한 제목처럼 신경증적 상황과 조건이 설치물의 거대함과 복잡함, 사실적 표현과 낯선 모습으로 결합되었다.
이번 전시는 안정된 스타일과 개성 있는 표현을 구사하는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는 즐거움을 준다. 이들 작품은 환영과 환상을 불러올 수 있는 일종의 ‘언캐니’함을 갖고 있다. 익숙함 안에 이상하게 낯선 요소가 있고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왜곡되거나 비틀려있다. 그런데 작품들은 주로 재현의 방식에 집중했고, 작품은 ‘보기’에 한정되었다. 환영을 재현의 방식에만 귀결시킨 것은 환상을 불러오는 다양하고 다층적 작동보다는 시각적인 매체로서의 미술만 상정한 까닭이다. 전시된 작가들의 작품 전시 방식이나 서로의 관계도 단선적으로 느껴져서 통합보다는 분리된 모습이었다.
오감을 자극하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현대 작품의 복잡한 상황, 매체의 확대와 맥락의 다변화 등이 더해진 작품들의 환영 창출 방식을 떠올릴 때, 이번 전시는 매우 전통적이었다. 재현이 단순히 시각적 요소로 제한된다면 환영이나 환상은 그저 표현의 문제에 귀착될 것이다. 그러나 환영과 환상은 단순한 감각의 영역만도, 인식이나 이성의 문제만도 아닌 설명하기 어려운 교환과 교체 간에 이루어지는 비일상적 경험의 추구에 더 가까워보인다. 이때 이것을 제시하는 방식의 동시대성, 경험되지 못한 새로운 제시가 요구되지 않을까 한다. ●

강형구  캔버스에 유채 193×386cm 2006 영은미술관 소장

강형구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3×386cm 2006 영은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