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BODY MATTERS
2016년의 ‘몸’은 어떤 형태로 독해할 수 있을까? 6월 10일부터 8월 28일까지 소마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그다음 몸: 담론, 실천, 재현으로서의 예술〉은 신체의 형상이 드러나거나 신체에 직접 개입하는 작업을 주로 등장시키면서 ‘매개로서의 몸’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몸, 현재의 갈등 속에 포개진 몸, 결박되어 있거나 벗어나려는 몸 등 그간 미술에서 다뤄진 ‘몸’의 이야기를 재소환해 현재의 유의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각 작업 간 앙상블로 풀어낸 몸의 합주가 들려주는 “담론, 실천, 재현으로서의 예술”에 귀 기울여 보자.
몸의 위치에 던지는 질문
현시원 | 독립큐레이터
오늘날 우리는 쉴 새 없이 인터넷 패스워드와 아이디로 다른 세계에 진입한다. 업로드한 사각형 이미지 파일을 통해 하루에도 수십 번의 순간을 저장하고 오판한다. 그때마다 각자는 다른 몸이 되거나 몸 없이 움직이기를 표방한다. 음식 포르노 사진의 윤기, 한 여배우와 영화감독에 관한 기사를 카카오톡 대화창 형태로 배치한 노란 대화창 등은 모두 몸통 없이 떠도는 가상의 몸들이다. 몸 없는 말들이자 안개같이 뿌옇게 증식하는 소문들이다. 소마미술관에서 열리는 〈그다음 몸〉(정현 기획)은 몸이 위치하는 여러 개의 자리를 한꺼번에 보여준다. 〈그다음 몸〉의 전시장에서 보이는 것은 눈·코·입과 팔·다리의 형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과거의 몸과 미래의 몸, 부식될 위험이 있는 수많은 갈등 관계 속에서도 살아 숨 쉬는 현재의 몸이 포개져 있다. 결박되는 몸을 인식하거나 벗어나고자 하는 ‘정체성’의 문제는 이제 다 극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시점에 다시 불려나온 2016년의 몸은, 그러나 이 전시의 선언 같은 영문 제목(BODY MATTERS)처럼 언제나 문제가 된다.
전시장 입구에 있는 유목연의 〈당신의 어깨 위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냥 웃어요〉가 몸 없이는 전시장에 들어올 수 없는 관람객에게 살짝, 깨어있기를 제안하는 퍼포먼스라면 김월식의 박스로 만들어진, 무속인들이 모시는 신의 형상을 재현한 〈지동신〉은 몸들이 부대낀 이후의 장면을 시각화한다. 서로 얽힌 몇 개의 몸은 동물의 것이지만 인간의 눈과 인습을 통해 생성된 몸/조각으로, 마치 몸의 현재적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듯하다. 김혜순의 시 〈돼지〉의 한 문장 “우리는 발끝으로 걸어야 하죠/ 벽 너머 8년째 무언 수행 중인 스님/ 스님 밥 드나드는 문 열릴 때 섬광처럼 끼쳐오는 요란한 냄새”가 묘사하는 찰나와 같이 〈그다음 몸〉에서 관람객을 초청하는 순간은 움직이는 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림 안에서 멈춘 채로 움직이고 있거나 아니면 땀 냄새를 풍기며 활발하게 움직이던 몸, 살아 있는 이 순간을 작동시키는 인간의 도구이자 존재 증명으로서 호흡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인 몸 말이다. 멈춰 있지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은 무엇보다 이우성의 그림들이다. 개인전을 비롯한 다른 전시장에서 젊은 세대의 태도 또는 그림 방법론에 대한 작업으로 독해되곤 했던 작가의 그림은 〈그다음 몸〉에 있는 다른 몸들과 결부되며 신체의 꼬불꼬불한 내장, 얼굴 피부를 표현하는 방식과 살갗 그러니까 바깥에 있는 사물처럼 보이는 몸의 내부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새롭게 독해된다.(〈끝〉, 2013) 이우성의 그림과 한 공간에 놓인 박진아의 그림 또한 다르게 보는 관람객의 시각을 누린다. 박진아의 그림에는 절단된 신체가 아니라 몸의 전체가 드러나는 사람들의 동작들이 드러나는데, 〈2011년 후쿠시마〉에서 푸른색 천과 하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몸은 올록볼록한 입체감을 보여주지만 그 어떤 서사도 표현도 직접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이 그림들 사이에서 이병호가 만든 인체 형상은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의 몸들을 관측한다. 피에타적이지만 더 위태롭고, 황금비율의 몸으로 이상화하기에는 기계부품의 연결체처럼 보이는 오늘의 몸을 재현하는 작업이다.
결정적 사건의 이전과 이후, 또는 중심이 되는 사건의 주변부를 구성한 듯한 화면에서 사람의 몸은 다른 몸들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누군가 묻는다면, 〈그다음 몸〉에 있는 각각의 작업들이 서로의 보다 세밀한 질문이 되어주거나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답변이 되어준다. 기획전에서 큐레이터가 각 방에 배치한 몇 개의 몸은 해당 작가의 세계관에서 아예 떨어져 나올 수는 없지만 큐레이터의 기획과 한 공간을 점거한 다른 작업들로 인해 작가론, 작품론의 형태에 종속되지 않은 다른 문맥들에 위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니키리의 잘 알려진 사진 연작이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수행의 과정을 통해, 여러 집단의 문화적 양태들을 인물화한다면 김옥선의 커플 사진은 화면이 가진 다큐멘터리 속성으로 인해 주석이나 레퍼런스가 아닌 자신의 몸으로 직접 쓰는 적확한 1인칭 시점을 보여준다. 안은미의 3부작 〈조상에게 바치는 땐스〉(2011),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스〉(2013), 〈사심없는 땐스〉(2012)의 영상 부분인 세 개의 화면에서 각자의 춤 동작을 경연하고 있는 것은 조용하지만 무척이나 빽빽하고 결연한 몸들의 합주다.
몸의 노동
〈그다음 몸〉에서 문제되는 몸은 2016년의 여러 문제적 지표들과 경쟁하는 몸이다. 하지만 이 경쟁은 그 무엇을 이기기 위한 속도전이 아니라 신체의 동작을 느리게 보는 것에 가깝다. 폭력과 혐오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경쟁의 룰을 다시 보게 하는 몸들을 등장시킨다. 오석근의 사진작업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스테레오타입 이미지를 거리 바깥으로 또 바깥으로 보낸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고전적 캐릭터였던 철수와 영희 가면을 쓴 몸들이 위치하는 곳은 어디인가? 또 그가 불려온 근대 엽서 속 인물을 코스프레한 남자의 관상은 어떠한가? 박보나의 작업 〈쉽게 끝나지 않는 순간〉에서 작가가 탐구하는 것은 누하목재 김만호 님의 손, 이미지원 액자 장성민 님의 손 동작과 이미지이다. 한편 이들의 전문기술과 손에 의한 노동은 작가의 작업에 일부 동원돼 이 전시장 안에서 세속적인 삶에 위치하는 몸의 노동을 재건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저서 〈해방된 관객〉에서 ‘치안’을 공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분배 속에서 신체를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놓는 논리라고 하며, 집단적 언표행위의 방안을 발명함으로써 이 치안 질서와 단절하는 실천을 ‘정치’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1848년 프랑스혁명 때 한 노동자 신문에서 어느 소목장이 노동자의 일과를 묘사한 텍스트를 소개한다. “자신이 마루판을 깔고 있는 방의 작업을 끝마치기 전까지 그는 여기가 자기 집이라고 하면서 그 방의 매치를 마음에 들어한다.(중략) 일순간 팔을 멈추고 널찍한 전망을 향해 상상의 나래를 펴고 그 전망을 만끽한다.” 랑시에르는 이 텍스트에 덧붙여 “다른 것에 열중하는 신체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소목장에게 중요했으며 그것은 “신체를 재량껏 사용하는 가운데 이 정념, 동요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선의 형태”라고 적었다. 팔의 노동에 순종하는 자들과 시선의 자유를 소유한 자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신체의 노동 사이사이의 비움을 채우는 시선과 거리감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다음 몸〉 전시장에는 몇 개의 짧은 텍스트가 전시공간을 인도한다. 예를 들어 “실천으로서의 몸, 쓰기를 통한 읽기” 와 같은 문장이 흰 벽면에 자리한다. 길지 않은 문장들에서 전시에 관한 설명이 아닌 안내, 오늘날 몸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편견과 여성혐오라는 이슈들을 어떻게 다른 차원으로 타개해나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을 본다. 소마미술관 전시장은 〈그다음 몸〉의 흥미로운 관람을 도출한다. 전시를 보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동작을 수행해야 하고 바로 앞에 위치한 녹색 잔디 위에서 개인, 가족, 친구, 관람자와 행인이 동시에 몸을 각각 움직이는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