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7월 8일부터 8월 7일까지 아르코미술관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에서 〈뉴 셸터스: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전〉과 〈홈리스의 도시전(The City of Homeless)〉이 각각 이어진다. 외부적인 영향으로 사회의 소수가 되어버린 ‘난민.’이 사회적인 이슈를 주제로 한 두 전시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다. 두 전시를 비교함으로써 건축과 미술에서 주제를 풀어나가는 방법을 알아본다.
모든 난민과 노숙인은 그들만의 애환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
류병학 | 미술비평
지난 7월 8일 아르코미술관에서 두 개의 의미 있는 기획전이 오픈했다. 제1전시실에서 정림건축문화재단이 기획한 〈뉴 셸터스: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이하 뉴 셸터스)과 제2전시실에서 목홍균 독립큐레이터가 기획한 〈홈리스의 도시(The City of Homeless)〉(이하 홈리스)가 그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올해 처음 시행하는 시각예술창작산실 공모사업 중 ‘전시지원’에 선정된 기획 전시이다.
우수한 전시기획을 위한 제안들
시각예술창작산실 공모사업은 ‘전시지원’ 이외에 ‘공간지원’과 ‘비평지원’이 있다. 그런데 ‘전시’와 ‘공간’의 구분(명칭)이 모호하다. 우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고문 내용을 인용해 보겠다. 시각예술 전시지원은 “시각예술분야의 우수 전시기획을 지원함으로써 시각예술 창작에서 확산까지 전 단계 활성화를 도모”한다고 언급한 반면, 시각예술 공간지원은 “대안공간 및 사립미술관 지원을 통해 작가 발굴의 기회를 제공하고 공간별 기획 전시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시각예술 ‘전시지원’은 일종의 ‘기획지원’을 뜻하는 셈이다. 그런데 ‘공간지원’도 엄밀한 의미에서 ‘기획지원’이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공간지원’ 역시 대안공간 및 사립미술관의 기획안을 가지고 심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시지원’이 (특정 전시공간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일종의 독립큐레이터의 기획을 지원하는 것이라면, ‘공간지원’은 대안공간 및 사립미술관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의 기획을 지원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이 공모사업은 지난 2월 5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홈페이지에 공고문이 올라왔고 공모기간은 공고문이 올라온 2월 5일부터 2월 25일까지였다. 따라서 20일 안에 ‘우수 전시 기획안’을 작성해야만 했다. 2016년 시각예술창작산실 전시지원 심의위원 일동은 다음과 같이 총평했다. “본 사업의 의도와 목적에 부적절한 신청이 많았던 점, 참신한 기획력을 갖춘 사업이 적었던 점, 전시기획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기획안이 많았던 점은 아쉬웠다. 또한 작가 구성이나 프로그램 운영에 비해 전반적으로 주제에 대한 깊은 문제인식이나 배경에 대한 탐구가 보이질 않거나 아이디어의 신선함에 비해 작가 구성의 다양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보다 균형감을 갖춘 탄탄한 기획이 요구된다.”
‘탄탄한 기획’을 바탕으로 하는 ‘우수 전시 기획안’을 마련하려면 무엇보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2016년 시각예술창작산실 전시지원 공모는 처음 시행되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충분한 홍보도 없이 공모기간이 (공고문을 올린 당일부터) 20일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부적절한 기획안이나 완성도가 떨어지는 기획안이 많을 수밖에.
아르코미술관, 미술과 건축을 위한 셸터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방문한 아르코미술관의 〈뉴 셸터스〉와 〈홈리스〉는 전반적으로 주제에 대한 깊은 문제인식이나 배경에 대한 탐구가 보이는 기획전이었다. 물론 두 기획전은 독립된 전시회이지만 ‘집/고향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전시라는 점에서 문맥을 이룬다. 이 두 기획전은 일종의 ‘사회적·공익적 기획전’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노숙인’과 ‘난민’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로 부상한 이슈란 점에서 시의적절한 기획전이다. 따라서 ‘공공미술관’인 아르코미술관에서 그 기획전을 개최한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뉴 셸터스〉는 이미 부제에서 감 잡을 수 있듯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이다. 따라서 건축적 관점이 중심을 이룬다. 〈뉴 셸터스〉에는 다섯 건축가(팀)가 협업한 프로젝트들이 있고, 두 명의 아티스트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다섯 건축가(팀)가 협업한 프로젝트는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이다.
대규모 탈북민이 발생했을 때 예비군 훈련장을 난민의 ‘중간적 완충지대’로 변화시키는 프로젝트(건축가 황두진 & 군사안보 전문가 양욱), 난민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농촌지역 여성 이주자들의 주거와 거주 환경에 대해 묻는 ‘다시-정착’(건축가 SOA & 문화인류학자 김현미), 난민들의 원활한 현지 정착을 위한 모바일을 이용한 ‘빅데이터 셸터링’(건축가 김찬중 & 데이터 전문가 김경옥, 난민인권 활동가 박진숙), 난민에 대한 은유로 새로운 터전에 적응하는 식물난민 프로젝트 ‘난초(難草)’(건축가 박창현 & 조경가 이수학, 정성훈), 난민에 대한 은유로 유기 동물들의 쉼터 프로젝트인 ‘마음 한쪽 마당 한쪽 내어주기’(건축가 레어 콜렉티브&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그렇다면 두 명의 아티스트는? 오재우의 〈나의 조국, 내가 없는〉은 한국에 들어온 난민들과 난민활동가들의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상작업인 반면, 차지량의 〈한국 난민〉은 우리들을 미래의 난민으로 상정한 ‘가상 스토리’로 만든 영상작업이다. 따라서 오재우의 〈나의 조국, 내가 없는〉이 〈뉴 셸터스〉의 시작을 알린다면, 차지량의 〈한국 난민〉은 〈뉴 셸터스〉의 마지막을 장식한다고 하겠다. 특히 차지량의 〈한국 난민〉은 자본이 곧 국가가 된다는 의미심장한 설정을 한다. 문득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주장된 “근대의 국가권력은 부르주아계급 전체의 공동 사무
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 언급된 ‘경제적인 토대 위에 서 있는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국가)’가 떠오른다.
모든 작품에는 그들만의 애환과 사연이 있다
영어단어 ‘홈리스’는 ‘집이 없는’을 뜻한다. 하지만 그것은 흔히 집이 없는 사람, 즉 ‘노숙인’의 의미로 사용된다. (혹자는 ‘노숙자’로 표기하는데, 2003년 복지부가 인권 존중 차원에서 ‘노숙자’라는 용어 대신 ‘노숙인’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노숙인’은 어떤 사람들일까? 우선 유엔이 정의한 노숙인 기준을 보자. 첫째, 집이 없는 사람과 옥외나 단기 보호시설 또는 여인숙 등에서 잠을 자는 사람. 둘째, 집이 있으나 유엔의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 집에서 사는 사람. 셋째, 안정된 거주권과 직업과 교육, 건강 관리가 충족되지 않는 사람.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는 ‘노숙인’을 어떻게 정의할까? 법제처(2011)의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는 노숙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첫째, 상당한 기간 일정한 주거 없이 생활하는 사람(거리 노숙인). 둘째, 노숙인 시설을 이용하거나 상당한 기간 노숙인 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시설 노숙인). 셋째, 상당한 기간 동안 주거로서의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만화방, 사우나, PC방, 쪽방 생활자 등)
두 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노숙인’ 개념은 누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그 범위와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노숙인’은 일정한 주거 없이 거리에서 잠을 자며 생활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열악한 주거공간에서 거주하는 사람, 잠재적 노숙 상태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한다.
이 점에 주목한 기획전이 목홍균 독립큐레이터의 〈홈리스〉이다. 〈홈리스〉는 난민을 포함하여 가정폭력으로 가출한 사람(조영주), 건설이 중단된 45층짜리 건물에 불법 거주하는 사람들(U-TT), 베이징 아파트 지하 벙커에 거주하는 사람들(Sim Chi Yin), 더 나은 삶을 위해 타국으로 이주한 사람들(Sherman Ong, Elvis Yip Kin Bon), 백인 엘리트 주변에 존재하는 가정부(Daniela Ortiz), 피난처를 찾아 고향을 떠난 사람(김해민) 등 다양한 ‘홈리스’들을 다룬 9개 국적의 14명의 작가를 초대한 일종의 ‘국제전’이다.
런던과 뉴욕 등 대도시 건물 입구 부분(공공공간)에 노숙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한 스파이크 위에 간이침대와 미니책장을 만든 작품(Leah Borromeo)이 있는가 하면, 뾰족한 쇠 스파이크가 설치된 의자를 만든 작품(Fabian Brusing)도 있다.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최소한의 물건들로 잠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도록 고안한 노숙자깡통(유목연), 노숙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강의 퍼포먼스 영상(유목연)도 있다.
노숙인을 은유하는 작품들도 있다. 주택분양 광고물을 이용한 작업(이원호)과 집 없는 조형물(안민욱) 그리고 이동식 레고-주택(Jaye Moon)이 그것이다. 물론 노숙인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맥을 찾기 쉽지 않은 철거된 공간과 새로 건축된 공간을 촬영한 사진(Klega)이나 고백상자(Van Bo Le-Menzel) 그리고 그리운 고향음식(이주영)에 관한 작품도 ‘홈리스’에 전시되어 있다. 필자는 ‘홈리스’와 ‘뉴 셸터스’를 보고 나오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작품은 노숙인과 난민과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애환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작품들은 절절한 사연을 1시간에 달하는 영상으로 혹은 애틋한 애환을 마치 시(詩)처럼 함축해 놓았기 때문에, 관객이 애정을 갖고 적잖은 시간을 투자하여 그 작품들을 보아야만 한다. 그렇다! 좋은 작품이 깊은 사유와 차이와 반복의 표현 속에서 탄생하듯이, 참신하면서 탄탄한 기획안 역시 깊은 사유와 차이와 반복의 글쓰기 속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