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김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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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노암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전시광경 〈비너스의 탄생〉(맨왼쪽) 3D 디지털프린트 203×140cm 2011

자아를 형성하는 다양한 정체성 중 작가 김두진에게 성(性)정체성은 가장 큰 화두이자 그의 전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초창기 회화작업부터 3D 디지털기법을 활용한 해골 이미지 작업, 그리고 추후 선보일 예정인 집착 시리즈까지 김두진은 인간을 규정하는 사회·역사적 기표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그것들을 해체해왔다. 개별적 주체로서의 인간과 정신성에 집중하는 작가의 작업세계를 조명한다.

게이인가 퀴어인가?

김원방 |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1980년대 이후 현대미술과 문화 이론에서 성(性)정치학과 몸정치학의 문제는 전통 미학에 대한 전복, 제도 비평, 급진적인 정치사회적 의제들이 맹렬히 교차하고 충돌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바로 그러한 격변의 전장에서 최전선에 선 담론이었음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다. 페미니즘은 자본주의의 이성애중심주의나 가족중심주의, 상품문화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주된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자연스럽게 게이레즈비언주의, 퀴어이론(Queer Theory)과 제휴하게 됐고 상당 부분 공통된 토대 위에서 진화해 나갔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아무리 발전해도 여전히 ‘본질주의와 분리주의의 습성’, ‘女神페미니즘(Goddess Feminism)’과 같은 환상적 페미니즘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일어 왔고, 나아가 페미니즘은 그것이 비판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이성애-가족중심주의 사회체제로의 재흡수’ 에 불과하다는 혐의를 벗지 못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페미니즘사상 자체의 모호성, 혼란, 자기모순, 잡다성이 오히려 여성예술가, 철학자, 급진적 문화행동주의자들로 하여금 상상력과 에너지를 무궁무진 발휘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고, 이것에 힘입어 페미니즘사상과 페미니즘미술은 중요한 추세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언뜻 페미니즘과는 다른 듯하면서도 개념적 토대를 상당 부분 공유하는 퀴어이론은 그와 동등한 자리를 갖지 못한다. 전통적인 남성중심 사회에서 ‘대드는 여성’이나 ‘깨무는 질(膣)(Vagina Dentata)’ 같은 여성적 괴물 이미지는 비교적 익숙한 공포이고 일정 부분 질서 내부로 재흡수 가능한 대상인 데 반해, 동성애를 상징적 질서 내부로 흡수시키려는 퀴어담론은 사실상 가장 이질적이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이는 달리 말해 퀴어이론이 그만큼 고도로 첨예하고 급진적인 사상의 가능성을 가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급진성 때문에 퀴어에 대한 담론은 페미니즘을 위한 조연 역할, 심지어 페미니즘의 한 분과 정도로 취급받기도 한다.
아서 단토(Arthur Danto) 이후 이 세계 자체가 모조리 예술이라고 강변해도 더 이상 이상하지 않고, 스위스의 한 여성예술가처럼 미술관에서 나체로 음부를 활짝 열어젖힌 채 앉아 있어도 모두 어쨌든 예술로 봐 주는 이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한 제도적 압력에 부딪히는 예술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퀴어예술이다. 현대미술사가들과 특히 대표적인 공공미술관과 갤러리들은 그들이 취급하는 전시에서 ‘퀴어’라고 하는 딱지를 떼어버리려고 노력했다. 대표적 사례는 미술사가 제니퍼 도일도 지적하듯이, 앤디 워홀의 ‘非게이化’이다. 현대미술의 기린아인 앤디 워홀의 작품세계를 대중 앞에서 설명할 때 그가 게이였다는 사실을 첫 번째로 강조하고, 그것을 그의 상상력의 원천으로 해석하며, 남자들끼리의 과격한 항문성교 장면을 클로즈업 한 그의 〈Sex Parts〉(1978) 같은 작품을 대중 앞에 부각하는 미술관은 찾기 힘들다. 동성애는 그저 작가 개인의 일탈이고 사생활일 뿐, 그의 예술 자체와는 무관한 것처럼 포장된다. ‘퀴어’라는 것은 여전히 반쯤 열리다 만 판도라 상자 같은 것이다.
한국의 경우 일부 커밍아웃한 대중문화 종사자, 김두진이나 오인환 같은 작가, 그리고 최근 게이축제에 관련된 논란을 통해 동성애 문제가 조금씩 개방되는 분위기이다. 심지어 그것은 일종의 ‘급진좌파적 자기도취’로 비약하기도 한다. “이제 동성애야말로 급진주의의 그다음 의제요, 인권과 해방의 새로운 시금석이다.”라는 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각의 열광 속에서 게이 예술가의 작품에는 곧 그 게이의 성애적 특성이 녹아 있으리라 섣부르게 추정하고 그렇게 대충 끼워 맞춘다. 이처럼 게이의 성적 특성이나 사회적 정체성이 곧바로 그 예술의 미학과 동일시되는 ‘인간-작품 동형론(anthopomorphism의 한 형태)’이야말로 가장 흔하게 저질러지는 오류이다. 게이와 퀴어는 다른 것이다. 다르다기보다는 다른 분과에 속하는 개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개념은 게이가 아니라 ‘퀴어’이다. 후자는 독해의 태도, 상징질서의 해체나 전략적 재구성, 미학적 실천전략을 말한다. 작가가 게이여도 작품은 전혀 퀴어하지 않을 수 있고, 게이가 아니어도 작품이 퀴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두진의 경우, 그는 퀴어 작가인가 아니면 그냥 게이일 뿐인가?

〈집착 자화상〉 디지털 칼라 페인팅 180×180cm 2016

〈집착 자화상〉 디지털 칼라 페인팅 180×180cm 2016

제3의 성을 향한 행보의 시작
김두진은 2000년대 초부터 디즈니 만화나 오즈의 마법사 같은 대중문화 또는 포르노 같은 하위문화의 영역에서 이미지들을 차용하고 이를 기괴한 모습으로 변형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그 이후에는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William-Adolphe Bougereau)의 고전회화나 르네상스 명작들을 차용하고 이를 3D 컴퓨터그래픽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을 해골로 대체시키는 재현비평적 작업을 하고 있다. 김두진의 작업이 퀴어한 이유는 퀴어미학의 핵심 전략 중 하나, 그러니까 ‘성차(gender)’의 이성애적 재현들을 수집, 차용하고 이것에 대한 공격을 통해 해체에 이르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런 전략은 사실상 멀게는 마르셀 뒤샹, 클로드 카엥, 그리고 가까이는 로버트 메이플소프, 데이비드 워나로빅 같은 게이예술가들도 흔히 활용해 온 전략이다. 하지만 김두진은 단지 여장(女裝, drag)이나 性 역할 바꾸기처럼 진부할 대로 진부해진 그런 방법론이 아니라, 부패, 삭제, 해골 같은 ‘ 죽음의 기표’를 삽입하는 그만의 방법을 구사한다. 예를 들어 그는 과거의 회화작업에는 미키마우스나 미니마우스의 얼굴을 삭제하거나, 백설공주의 얼굴을 외눈박이 괴물로 변형시킨 작업이 있다.
순수하게 3D 컴퓨터그래픽 기술로만 이루어지는 명화패러디 작업에서는 해골이 죽음 또는 無의 기표로 등장한다. 이 작업에서 김두진은 패러디를 통해 원작에 내재된 ‘함축적 의미(connotation, 共示)’를 노출시키고 공격한다. 함축적 의미는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소위 “이미지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층위, 또는 신화적 층위”라고 부른 것이기도 하다. 김두진이 차용한 명작들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적 층위는 대략 두 가지의 상호 연관된 층위들이다. 첫 번째 층위는 ‘남성적’ 관점에서 규정되어 온 미술사, ‘아버지’와 동일한 의미로 정의되어 온 ‘대가(master)’의 개념, ‘걸작(masterpiece)’의 개념이 내포하는 상징적 위계질서 같은 것이고, 두 번째 층위는 명화 속 등장인물들이 지니는 남녀의 성적 차이에 의해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성 정치학 이데올로기’이다. 말하자면 서양의 명화들은 서구문화의 지배적 전제인 ‘남성/여성 간의 절대적 대립과 차이’, ‘생물학적 성차 개념’, ‘이성애주의(heterosexualism)’ 등의 이데올로기를 ‘함축적’으로 재현하면서 자연화(naturalization)해왔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김두진이 노출시키고 공격하려는 또 하나의 ‘신화적 층위’가 된다.
마사치오의 〈낙원에서의 추방〉(1425),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1866),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켄 무디와 로버트 셔먼〉(1984) 등 서양미술사에서 잘 알려진 걸작을 차용하여 그림 속의 등장인물을 해골로 대체한 작품을 보자. 정밀하게 합성된 그 이미지는 문화적 교육수준이 높은 관객이라면 십중팔구 그것이 잘 알려진 명작을 패러디한 것임을 손쉽게 알아챌 수 있다. 이러한 ‘알아채기’란 바꿔 말해 작품들이 던져 놓은 미끼, 즉 ‘재현적 코드’ 혹은 ‘서사적 주제’라는 미끼에 관객이 스스로 걸려들었음을 의미한다. 설령 그 원작들에 대한 기억이나 교양이 전혀 없다손 치더라도, 이 해골들이 취하는 연극적인 포즈를 통해 이들이 어떤 진지하고 의미 있는 행위, 즉 이야기를 재현하고 있음(재현하는 척 하고 있음)을 알아 챌 것이다. 여기서 해골을 통한 패러디는 두 가지의 모순된 작용을 동시에 수행하는데, 첫째는 주제(앞서 말한 함축적 의미와 이데올로기)를 선명히 되살리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 되살린 주제를 ‘삭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 분열, 긍정/부정의 이중적 글쓰기, ‘함정에 빠진 텍스트’라는 특징은 패러디를 통해 실행되는 ‘해체(deconstruction)’의 본질적인 특징이고 또 그래야 한다(바로 그런 의미에서 자크 데리다의 해체 개념은 항상 퀴어한 것이었다).
살이 모두 제거된 해골에는 성차적 특징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그들은 성차의 공백 위에서 남녀의 성적 역할을 흉내 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애를 비판한다’는 격한 저항의식에 추진된 나머지 그 어떤 해방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나 계몽적 메시지를 심어놓은 것도 아니다. 그 해골들은 단지 원작이 포함한 이데올로기적 코드체제를 교란하려는 책략일 뿐, 그 어떤 새로운 주제의식도 고취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게이레즈비어니즘이건 페미니즘이건 간에, 그 어떤 ‘새로운 의미’, ‘새로운 재현’도 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해골작업에는 어떤 주제(主題)도 없다. ‘재현’하고 ‘이데올로기적 목소리’를 내려는 욕망, 작품을 ‘또 다른 의미의 기표’로 만들려는 지적인 욕망, 바로 그 ‘상징의 권력을 향한 남근적 욕망’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그 해골들의 과제인 것이다. 성차의 삭제를 재현하기, 그것을 선포하기, 부재를 시각적 형태로 표현하기, 바로 이러한 것들이 다름 아닌 ‘재현의 해체가 다시 빠지기 쉬운 재현주의적 함정’이며,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이미 1980년대 재현비판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포스트페미니스트들이 몰입했던 과제였다.
앞서 말했지만, 김두진의 작업을 방법론에 대한 명확한 통찰 없이 그저 편리하게 커밍아웃, 게이, 이성애 비판 같은 수사적 표현들을 부여하려는 담론들은, 마치 그의 작업이 그런 수사적 내용들을 주제로서 ‘재현한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이는 재현 자체에 저항함으로써 남근이성중심주의에 저항하려는 그의 작업의 지향점을 본질적으로 호도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핵심은 “성차의 해체는 재현될 수 없다”라는 점이다. ‘脫이성애적 미술’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이 첫 번째 특징이어야 한다.
김두진의 해골들, 그들은 성차로서의 생물학적 징표가 삭제된 존재들이다. 해골에는 성기나, 젖가슴, 털이 없다. 그렇다면 ‘죽음 자체의 성’은 무엇일까? 그냥 모호하게 중성이라 말해야 하는가? 상징계 질서, 아버지(父權)에의 도전, 부친 살해(patricide) 등이 문화적으로 결정된 ‘이 性(this sex)’에 도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필연적으로 그러한 아버지의 법에 도전하는 타자의 성은 ‘여성’일 수밖에 없다. 즉 ‘김두진 = 타자 = 죽음’이라는 등치의 축이 가능해지면서 그들의 성은 모두 여성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여성’은 이성애적으로 결정된 의미의 여성이 아님은 당연하다. 바로 라캉이 말했듯이 여자에게조차 여성은 자신의 성이 아닌 타자의 성이다. 우리는 ‘나’가 아닌 ‘타자’인 한에서만, ‘아직 여성으로 결정되지 않은 여성’인 한에서만 진정한 성을 말할 수 있고, 그 진정한 성이란 바로 여성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퀴어가 ‘새로운 의미에서의 여성’과 연관되는 이유이다. ●

김 두 진 Kim Doojin
1973년 출생했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99년 아트팩토리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총 5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0년 〈제3회 홍대앞문화예술상〉 ‘국제뉴미디어 페스티벌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 SeMA신진작가 전시지원프로그램, 고양창작스튜디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6기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EXHIBITION TOPIC

아르코 (7)

위 Klega 〈 The Future Looking at the Past 〉 가변설치 2016 아래 〈뉴 셸터스: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리서치 아카이브

7월 8일부터 8월 7일까지 아르코미술관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에서 〈뉴 셸터스: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전〉〈홈리스의 도시전(The City of Homeless)〉이 각각 이어진다. 외부적인 영향으로 사회의 소수가 되어버린 ‘난민.’이 사회적인 이슈를 주제로 한 두 전시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다. 두 전시를 비교함으로써 건축과 미술에서 주제를 풀어나가는 방법을 알아본다.

모든 난민과 노숙인은 그들만의 애환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

류병학 | 미술비평

지난 7월 8일 아르코미술관에서 두 개의 의미 있는 기획전이 오픈했다. 제1전시실에서 정림건축문화재단이 기획한 〈뉴 셸터스: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이하 뉴 셸터스)과 제2전시실에서 목홍균 독립큐레이터가 기획한 〈홈리스의 도시(The City of Homeless)〉(이하 홈리스)가 그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올해 처음 시행하는 시각예술창작산실 공모사업 중 ‘전시지원’에 선정된 기획 전시이다.

우수한 전시기획을 위한 제안들
시각예술창작산실 공모사업은 ‘전시지원’ 이외에 ‘공간지원’과 ‘비평지원’이 있다. 그런데 ‘전시’와 ‘공간’의 구분(명칭)이 모호하다. 우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고문 내용을 인용해 보겠다. 시각예술 전시지원은 “시각예술분야의 우수 전시기획을 지원함으로써 시각예술 창작에서 확산까지 전 단계 활성화를 도모”한다고 언급한 반면, 시각예술 공간지원은 “대안공간 및 사립미술관 지원을 통해 작가 발굴의 기회를 제공하고 공간별 기획 전시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시각예술 ‘전시지원’은 일종의 ‘기획지원’을 뜻하는 셈이다. 그런데 ‘공간지원’도 엄밀한 의미에서 ‘기획지원’이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공간지원’ 역시 대안공간 및 사립미술관의 기획안을 가지고 심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시지원’이 (특정 전시공간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일종의 독립큐레이터의 기획을 지원하는 것이라면, ‘공간지원’은 대안공간 및 사립미술관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의 기획을 지원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이 공모사업은 지난 2월 5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홈페이지에 공고문이 올라왔고 공모기간은 공고문이 올라온 2월 5일부터 2월 25일까지였다. 따라서 20일 안에 ‘우수 전시 기획안’을 작성해야만 했다. 2016년 시각예술창작산실 전시지원 심의위원 일동은 다음과 같이 총평했다. “본 사업의 의도와 목적에 부적절한 신청이 많았던 점, 참신한 기획력을 갖춘 사업이 적었던 점, 전시기획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기획안이 많았던 점은 아쉬웠다. 또한 작가 구성이나 프로그램 운영에 비해 전반적으로 주제에 대한 깊은 문제인식이나 배경에 대한 탐구가 보이질 않거나 아이디어의 신선함에 비해 작가 구성의 다양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보다 균형감을 갖춘 탄탄한 기획이 요구된다.”
‘탄탄한 기획’을 바탕으로 하는 ‘우수 전시 기획안’을 마련하려면 무엇보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2016년 시각예술창작산실 전시지원 공모는 처음 시행되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충분한 홍보도 없이 공모기간이 (공고문을 올린 당일부터) 20일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부적절한 기획안이나 완성도가 떨어지는 기획안이 많을 수밖에.

아르코미술관, 미술과 건축을 위한 셸터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방문한 아르코미술관의 〈뉴 셸터스〉와 〈홈리스〉는 전반적으로 주제에 대한 깊은 문제인식이나 배경에 대한 탐구가 보이는 기획전이었다. 물론 두 기획전은 독립된 전시회이지만 ‘집/고향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전시라는 점에서 문맥을 이룬다. 이 두 기획전은 일종의 ‘사회적·공익적 기획전’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노숙인’과 ‘난민’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로 부상한 이슈란 점에서 시의적절한 기획전이다. 따라서 ‘공공미술관’인 아르코미술관에서 그 기획전을 개최한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뉴 셸터스〉는 이미 부제에서 감 잡을 수 있듯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이다. 따라서 건축적 관점이 중심을 이룬다. 〈뉴 셸터스〉에는 다섯 건축가(팀)가 협업한 프로젝트들이 있고, 두 명의 아티스트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다섯 건축가(팀)가 협업한 프로젝트는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이다.
대규모 탈북민이 발생했을 때 예비군 훈련장을 난민의 ‘중간적 완충지대’로 변화시키는 프로젝트(건축가 황두진 & 군사안보 전문가 양욱), 난민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농촌지역 여성 이주자들의 주거와 거주 환경에 대해 묻는 ‘다시-정착’(건축가 SOA & 문화인류학자 김현미), 난민들의 원활한 현지 정착을 위한 모바일을 이용한 ‘빅데이터 셸터링’(건축가 김찬중 & 데이터 전문가 김경옥, 난민인권 활동가 박진숙), 난민에 대한 은유로 새로운 터전에 적응하는 식물난민 프로젝트 ‘난초(難草)’(건축가 박창현 & 조경가 이수학, 정성훈), 난민에 대한 은유로 유기 동물들의 쉼터 프로젝트인 ‘마음 한쪽 마당 한쪽 내어주기’(건축가 레어 콜렉티브&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그렇다면 두 명의 아티스트는? 오재우의 〈나의 조국, 내가 없는〉은 한국에 들어온 난민들과 난민활동가들의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상작업인 반면, 차지량의 〈한국 난민〉은 우리들을 미래의 난민으로 상정한 ‘가상 스토리’로 만든 영상작업이다. 따라서 오재우의 〈나의 조국, 내가 없는〉이 〈뉴 셸터스〉의 시작을 알린다면, 차지량의 〈한국 난민〉은 〈뉴 셸터스〉의 마지막을 장식한다고 하겠다. 특히 차지량의 〈한국 난민〉은 자본이 곧 국가가 된다는 의미심장한 설정을 한다. 문득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주장된 “근대의 국가권력은 부르주아계급 전체의 공동 사무

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 언급된 ‘경제적인 토대 위에 서 있는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국가)’가 떠오른다.

모든 작품에는 그들만의 애환과 사연이 있다
영어단어 ‘홈리스’는 ‘집이 없는’을 뜻한다. 하지만 그것은 흔히 집이 없는 사람, 즉 ‘노숙인’의 의미로 사용된다. (혹자는 ‘노숙자’로 표기하는데, 2003년 복지부가 인권 존중 차원에서 ‘노숙자’라는 용어 대신 ‘노숙인’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노숙인’은 어떤 사람들일까? 우선 유엔이 정의한 노숙인 기준을 보자. 첫째, 집이 없는 사람과 옥외나 단기 보호시설 또는 여인숙 등에서 잠을 자는 사람. 둘째, 집이 있으나 유엔의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 집에서 사는 사람. 셋째, 안정된 거주권과 직업과 교육, 건강 관리가 충족되지 않는 사람.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는 ‘노숙인’을 어떻게 정의할까? 법제처(2011)의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는 노숙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첫째, 상당한 기간 일정한 주거 없이 생활하는 사람(거리 노숙인). 둘째, 노숙인 시설을 이용하거나 상당한 기간 노숙인 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시설 노숙인). 셋째, 상당한 기간 동안 주거로서의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만화방, 사우나, PC방, 쪽방 생활자 등)
두 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노숙인’ 개념은 누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그 범위와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노숙인’은 일정한 주거 없이 거리에서 잠을 자며 생활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열악한 주거공간에서 거주하는 사람, 잠재적 노숙 상태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한다.
이 점에 주목한 기획전이 목홍균 독립큐레이터의 〈홈리스〉이다. 〈홈리스〉는 난민을 포함하여 가정폭력으로 가출한 사람(조영주), 건설이 중단된 45층짜리 건물에 불법 거주하는 사람들(U-TT), 베이징 아파트 지하 벙커에 거주하는 사람들(Sim Chi Yin), 더 나은 삶을 위해 타국으로 이주한 사람들(Sherman Ong, Elvis Yip Kin Bon), 백인 엘리트 주변에 존재하는 가정부(Daniela Ortiz), 피난처를 찾아 고향을 떠난 사람(김해민) 등 다양한 ‘홈리스’들을 다룬 9개 국적의 14명의 작가를 초대한 일종의 ‘국제전’이다.
런던과 뉴욕 등 대도시 건물 입구 부분(공공공간)에 노숙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한 스파이크 위에 간이침대와 미니책장을 만든 작품(Leah Borromeo)이 있는가 하면, 뾰족한 쇠 스파이크가 설치된 의자를 만든 작품(Fabian Brusing)도 있다.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최소한의 물건들로 잠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도록 고안한 노숙자깡통(유목연), 노숙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강의 퍼포먼스 영상(유목연)도 있다.
노숙인을 은유하는 작품들도 있다. 주택분양 광고물을 이용한 작업(이원호)과 집 없는 조형물(안민욱) 그리고 이동식 레고-주택(Jaye Moon)이 그것이다. 물론 노숙인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맥을 찾기 쉽지 않은 철거된 공간과 새로 건축된 공간을 촬영한 사진(Klega)이나 고백상자(Van Bo Le-Menzel) 그리고 그리운 고향음식(이주영)에 관한 작품도 ‘홈리스’에 전시되어 있다. 필자는 ‘홈리스’와 ‘뉴 셸터스’를 보고 나오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작품은 노숙인과 난민과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애환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작품들은 절절한 사연을 1시간에 달하는 영상으로 혹은 애틋한 애환을 마치 시(詩)처럼 함축해 놓았기 때문에, 관객이 애정을 갖고 적잖은 시간을 투자하여 그 작품들을 보아야만 한다. 그렇다! 좋은 작품이 깊은 사유와 차이와 반복의 표현 속에서 탄생하듯이, 참신하면서 탄탄한 기획안 역시 깊은 사유와 차이와 반복의 글쓰기 속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EXHIBITION FOCUS 백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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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Ode to Music 1402 말러 교향곡 제1번 D장조 ‘거인’ 〉(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50×270cm 2014 아래 고려대학교박물관 기획전시실 1층 전시장 전경

영혼의 울림, 베토벤과의 대화

음색은 색(色)으로, 선율은 선(線)으로, 음률은 형상으로 표현한 전시가 막을 올렸다. 작가 백순실의 〈영혼의 울림, 베토벤과의 대화〉가 바로 그것. 이번에 전시된 신작 14점 중 베토벤을 주제로 한 작품은 10점에 달한다. 작가는 베토벤의 음악을 ‘휴머니티’란 한 단어로 정의한다. 백 작가가 만들어낸 미술과 음악의 앙상블은 8월 28일까지 고려대학교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인상의 기보(記譜)

김겸 |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 대표, 건국대 겸임교수

백순실의 작품은 기사에서 먼저 이미지를 접했다. 조그맣고 평평한 도판 속의 작품들은 작곡가와 작품명이 제목인 탓에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색면추상화의 일종이려니 하는 생각으로 전시장을 찾았다. 그러나 입구에서 ‘음악에의 헌정(Ode to music)-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61’과 마주한 순간,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도판 상에서 밝고 명랑하기만 했던 색면들은 모든 감각을 순식간에 깊은 심연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복원가라는 직업병 탓에 작품 표면을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단순한 평면 작품이 아니었다. 오돌토돌한 돌기들을 비롯하여 몇 차례 올린 색층은 어스름하게 밑층을 드러내거나 단단하게 쌓여 올라와 깊이감이 느껴졌다. 어떤 색면은 무광택의 단단한 질감을 가지고 있어 얼핏 파스텔이 두텁게 덮인 것 같았는데 오일스틱이라는 크레용 같은 유화구를 사용한 결과이다. 작가는 어느 때인가부터 유화의 첨가제, 희석제들이 풍기는 기름 냄새를 받아들이기 힘든 체질이 되었고 그 대체물로 유화스틱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작품의 커다란 주제인 클래식 음악과 차(茶)는 작가 아버지의 취미였던 동시에 20대에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충격을 벗어나게끔 도와준 오래된 벗이라고 한다.
모두 다른 곡명의 작품은 대지에 흙을 고르고 씨를 뿌리고 보살피며 몇 달을 기다려 무성해진 풍요의 땅이며 정성스럽게 가꾼 음악의 정원이다. 실제로 작가가 200호 캔버스를 바닥에 뉘어 놓고 적게는 3번에서 10번까지 색면을 올리고 문질러내고 다양한 입자의 퍼미스 젤(pumice gel)을 섞어 넓은 평붓으로 펴 발라 만들어 낸 돌기는 드넓은 대지를 연상시킨다. 임옥상이나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흙과 대지가 치열한 삶의 현장이자 어머니의 그을리고 주름진 손등이라면 백순실의 땅은 정성스럽게 일구고 가꾼 기름진 옥토와도 같다. 이 풍요의 땅 위에 작가는 담고 싶은 작곡가와 음악의 인상을 색면이나 색의 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탕층을 올리는 행위의 즐거움과 결과를 기다리는 설렘은 의도와 우연성이 뒤섞이며 형태에 경쾌함을 더해주고 있다.
각각의 작품에 붙여진 음악과 이미지와의 인과성을 유추하기란 쉽지 않았다. 왜 이 작품은 베토벤 교향곡 1번이며 또 다른 작품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일까? 전시 제목이나 미리 접한 리뷰가 주는 오해를 없애고자 머릿속에서 제목을 비우고 무념의 상태로 바라보니 작품에서 음향이 들리기 시작했다. 표면의 작은 돌기들은 마치 오르골처럼 공간을 튕기며 잔향을 만들고 있었다. 수많은 돌기는 음표가 되어 선율과 리듬을 만들었고 쌓아올린 색의 단층은 음들이 쌓여 만들어내는 화성 같았다. 색상과 펄의 반짝임은 음색, 옅은 붓놀림 자국은 꾸밈음이나 즉흥적 악상을 연상시킨다. 백순실은 한때 모든 자신의 작품을 무제로 두었으나 감상자들과 좀 더 친밀한 소통을 위해 제목을 붙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작가의 본래 작품 창작의 태도가 서사적이라기보다 창작 동기나 개념을 은유와 함축으로 깊게 숨겨놓고 재구성하는 추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한다.

〈 Ode to Music 1404 베토벤 교향곡 제7번 A장조 Op.92 〉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50×270cm 2014

〈 Ode to Music 1404 베토벤 교향곡 제7번 A장조 Op.92 〉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50×270cm 2014

미술과 음악의 협연
예술사에서 인상주의만큼 미술과 음악이 잘 어울리는 시대는 없었다. 음악과 미술이라는 서로 다른 장르에서 동질성이 느껴진다는 것은 이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목적이 같았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는 소리를 통해 모네의 그림과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표현했다. 분명히 선율은 존재하지만 하나하나의 음색에 녹아들어 투명함을 만들어내고 있다. 드뷔시의 음악은 소리로 그린 그림과도 같다. 감각을 합리적이고 분석적으로 대상화했던 인상주의 화가는 영롱하고 찰나의 시간성을 지닌 빛의 물질성을 탐구하고 표현하려 했다. 모네의 수련 시리즈를 보면 점차 수련이나 수면을 암시하는 형태들이 사라지고 화면 전체로 퍼지는 빛의 느낌만이 남게 된다. 형태가 대부분 사라진 후기의 수련시리즈는 현상 저 너머의 세계를 찬미하는 상징주의나 표현주의를 지나 추상으로까지 나아간 듯 보인다. 클로드 드뷔시의 인상주의 화풍을 닮은 음악도 아주 흡사한 궤적을 그리며 전개되었다. 그의 초기 피아노 모음곡 ‘베르가마스크’(1890)는 명확한 선율을 통해 구체적인 대상성을 드러낸 반면, 후기의 모음곡 ‘영상’(1905)에서는 선율은 모호해지고 빠른 음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찰나의 인상을 표현하고 있다.
상징주의 시인으로 모더니즘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보들레르의 ‘조응’ 혹은 ‘교감’이란 개념은 우주만물에 대한 인간의 정신적, 감각적 관계를 ‘교감하는 관계’로 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감 속에서 인간의 오감 역시 하나의 공감각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미술사 서술방법에서 인상주의를 추상미술의 선구자적 위치에 두는 것이나, 음악사에서 현대음악의 출발점을 드뷔시의 관현악곡법으로 보는 이유는 조형예술의 형상과 음악의 명확한 선율이 사라짐과 연관이 있다.
재현과 서사의 수단으로서 예술이 표현과 추상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인상주의 음악이 조형예술의 시각적 감각을 모방하는 것에서 출발했으나 이후엔 오히려 조형예술이 음악의 추상성을 닮아갔다. 괴테가 건축을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표현한 이래 19세기 영국의 평론가 월터 페이터는 ‘모든 예술은 음악적 상태를 갈망한다’고 할 만큼 점차 음악과 다른 예술장르간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칸딘스키의 ‘구성’, ‘즉흥’, ‘인상’ 시리즈에서도 음악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03년 멘델스존의 피아노 모음곡을 연상시키는 ‘무언가’라는 타이틀로 122개의 목판화 연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개최된 칸딘스키 추상화전 카탈로그에서 독일 화가 브루노 하스는 ‘칸딘스키의 색은 서로 공명하여 시각적 화성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표현했다. 선율을 없애기 위해 조성자체를 해체한 추상음악의 선구자 아놀드 쇤베르크와 칸딘스키가 친구이자 예술적 조력자가 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던 파울 클레의 선율과 음색을 색면의 흐름으로 표현한 작품은 무반주 바이올린 모음곡을 연상하게 한다. 클레는 악보 자체에서 조형미를 발견하여 오선지와 음표의 이미지를 차용했으며, 존 케이지는 적극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악보와 조형예술로서의 이미지를 융합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흥미롭게도 작곡가 야니스 크네나키스나 피에르 불레즈의 악보는 조형예술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백순실의 작품은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조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캔버스 안에 선율, 음색, 리듬, 화성과 악장 구조를 모두 넣어 굳힌 3차원의 풀 스코어와도 같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악보만 보아서는 어떤 곡인지 알기 힘든 것처럼 백순실이 캔버스 위에 기보(記譜)한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곡들 또한 쉽게 이해하긴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작가의 의식 안에서 재해석되고 조형화된 거대한 음향의 인상들이 바탕칠을 올리고 문지르며 색면을 구획하거나 빠르게 올리는 행위를 통해 복기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번 전시작품 가운데 말러의 교향곡 1번과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은 개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말러 교향곡 1번’의 경우 밝고 때때로 경쾌한 선율을 가지고 있지만 이따금씩 들려오는 불안한 화성과 곡의 부제인 ‘거인’을 연상시키는 3, 4 악장의 거대한 울림이 크게 분할된 화면 속에 보였다. 춤의 교향곡이라고도 알려진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의 경쾌함이 넓은 화면에 역동적으로 펼쳐진 가운데 2악장의 조용한 장중함이 화면 가운데에 놓여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작품은 각 제목의 작곡가나 곡의 인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고 있다. 예를 들면,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는 내게 ‘황제’로 보이지 않는다. 내 마음 속 ‘황제’ 협주곡의 ‘격정’이나 특히 좋아하는 3악장의 ‘승리, 환희’ 같은 인상이 강렬한 색상의 상승하는 이미지가 되어 느린 2악장을 배경으로 치고 올라오는 형상이었다면 금세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익숙한 곡을 익숙한 방법으로 연주한 레코드를 듣는 경험 같은 것이리라. 그러나 예상치 못한 해석과 파격적인 연주를 접했을 때의 충격과 설렘이야말로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연주가와 새 음반을 기다리는 이유이자 감상의 즐거움이 아닐까.
예술가의 삶이 모두 다른 경험을 바탕으로 하듯이 모든 예술작품은 다르고 새로울 수 있다. 이론을 공부하며 딴에는 귀명창이 되어 물든 나쁜 버릇이 예술작품을 범주화하여 설명하고 서구의 이론에 끼워 맞추어 재단하는 것이다. 다행히 오랜 시간 복원일을 하며 작가의 붓 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작품 표면을 마주하다 보니 평면 속에 감추어진 물감의 깊이와 함께 창작의 시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백순실은 음악과 차를 즐기며 그리고 창작하는 삶을 살고 있다. 지나치게 애쓰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자연스레 담아내고 있으므로 우리가 바라보는 베토벤은 화가 백순실의 베토벤인 것이다. ●

NEW FACE 2016 김승현

텍스트의 자간과 행간의 의미

우리는 문자 그 자체를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다. ‘타이포그라픽’ 영역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심리와 호기심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김승현 작가는 이러한 문자의 디자인적 요소가 첨가된 조형적 결과물에 특정 장소의 의미를 더해 작업한다. 언뜻 팝아트의 주요 작가 에드 루샤(Ed. Ruscha)의 빌보드 작업을 연상시키는 김 작가의 작업은 작품이 설치된 공간의 물리적 여건과 사회, 정치, 역사적 의미와 맞물려 전혀 다른 갈랫길로 접어든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누구나 들어봤을 유명 팝송의 가사 한 구절이 전하는 의미는 노랫말의 맥락과 단절되어 온전히 공간과 관련한 이야기로 변질된다. 2014년 <강정대구현대미술제>에 출품된 <One of the lyrics of pop song> 연작엔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Vincent>)나 “Don’t forget to rememver”(<Don’t forget to remember>) 문구가 등장한다. 4대강 개발의 폐해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이 너무나 평범하게, 그리고 교묘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remember’를 ‘rememver’로 살짝 바꾸었는데 오타 아닌 오타로 ‘river’와 ‘remember’를 합성한 작가의 능청맞은 위트도 엿보인다. 작가는 이런 위트를 한 번 더 드러낸다. “강정보의 경우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가 열린 장소입니다. 그 자료를 보던 중 故 박현기의 작품에 등장하는 포플러 나무를 보며 고흐가 그린 포플러나무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흔히 우리는 어떤 상황에 직면할 때, “세상 모든 노래 가사가 나를 말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하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 일상이나 삶이 노래 가사의 한 구절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김 작가의 재기발랄한 응용은 일상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관찰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텍스트가 전달하는 의미는 문장의 결합체인 전체 흐름의 구조와 분리되면 그 의미가 아예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상한 제품들> 연작 중 ‘mainstream’은 바로 그 의미와 구조 사이의 괴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주류’의 의미를 전면에 보여주고 있지만 그 알파벳으로 제작한 설치물 내부에 만들어진 통로를 지나가면 글자를 볼 수 없다. 우리의 주류 사회도 그렇다. 누구나 주류에 편입되고 싶어 하지만 막상 그 안에서는 무엇이 주류인지 명확히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주류라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경계를 나누어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통로를 걸으면서 느끼는) 소외감은 그런 상황에서 주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단어를 읽을 수 있거나 읽지 못해 인식과 비인식의 조건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따라서 이 작업은 그렇게 생성된 “소속감과 소외감이 발생하는 점에 대한 반복적인 경험이 주류·비주류에 관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에 대한 작업이다.
최근 김 작가는 텍스트를 공간에 설치하는 작업과 함께 평면에 회화로 표현하는 작업을 실험하고 있다. 앞서 밝혔듯 에드 루샤의 <Your Space>에 대한 작가의 화답이며, 작가가 속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정서와 역사 연구에 다름아니다.
올해 강의를 시작했다는 그는 이를 계기로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을 의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 의심의 결과는 그가 설치하거나 그려내는 텍스트 사이사이에서 ‘의미’로서 발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황석권 수석기자

김승현
1983년 태어났다.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총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강정대구현대미술제>(대구, 2014), <유목적상상>(2012, 삿포로) 외에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대구에서 작업하고 있다.

  시트커팅 가변설치 2014

< One of the lyrics of pop song > 시트커팅 가변설치 2014

 

NEW FACE 2016 우정수

믿음이 가라앉은 혼돈의 시대

“나는 인간들로서는 파헤치지 못할 한 수수께끼의 과정을 풀었고, 그리고 그것을 기록했다. 이성의 탐구 정신에 따른 하나의 행운. 그러나 어떤 정황들은 내가 그런 무시무시한 특별대우를 받았으리라는 점에 의구심을 갖도록 만든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과연 줄기차게 진실을 기록했는가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는다.”(보르헤스 〈또 다른 죽음〉 중에서)
작가 우정수의 그림에는 책이 등장하지만 책에 담긴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가 이야기로 삼은 서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물론 전시 혹은 작품 제목에 늘 문학의 레퍼런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무너지는 책더미에서 텍스트가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책뿐만이 아니라 보름달, 원숭이, 부엉이 등 그의 그림에는 수많은 상징물이 등장한다. 마치 중세 기독교 벽화나 네덜란드 정물화에 등장하는 오브제처럼 그의 작업 속 기물은 상징을 해석하기 위한 매개이자 도구이다. 그러나 그 매개의 다중적인 해석 가능성은 관객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집중하는 매개체 중 하나는 ‘책’이다. 그 텍스트를 이미지화 하면서 작가는 현실과 가상 사이를 오가는 교묘한 줄타기를 한다. 이는 현실을 직시하기 위한 작가만의 방법일 것이다. 작가는 2015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에서 열린 〈불한당들의 도시〉에서 선보인 작업에서 사회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면, 2016년 OCI미술관에서 선보인 〈책의 무덤〉에서는 고질적 사회 부조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바뀔 수 없다는 허망함을 드러냈다. 그는 그동안 사회적 저항의 감정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비록 서브컬처 이미지를 활용할지언정 그의 회화에는 독기 어린 화가 있었고 투쟁의 메시지가 강렬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지형지물이 한 공간에 수없이 많이 등장하고 소용돌이치는 〈책의 무덤〉시리즈에서 이전보다 배가된 회화의 역동감이 느껴지지만, 감정적으로는 ‘분노와 열정’보다 무너져내리는 허무함이 포착된다. “과연 이미지가 어떤 힘을 지닐 수 있을까? 억누르지 않고 표출하는 감정표현이 사회적 변화의 불씨가 될 수 있을까?” 작가는 자문했다. 그렇다면 이제 한숨 뱉어낸 듯한 그의 목소리는 어느 지점을 향하고 있을까?
우선 구도에서부터 변화를 시도했다. 거대한 종이를 사용한 〈책의 무덤〉시리즈의 경우 액자 없이 펼쳐진 종이를 사용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텍스트의 홍수를 표현했다. 그의 그림은 책을 넘기듯 하나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마치 두루마리 그림을 펼친 듯 구성의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그의 회화는 평면과 공간, 현실과 가상, 저항과 포기를 동시에 내포한다. 더 나아가 스페이스 BM에서 선보인 신작에선 액자를 그림의 도구로 사용했다. 펼치는 그림과 달리 프레임을 사용해 맺음이 있는 작업을 만들어내면서, 액자의 유리를 사용해 관객의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구도를 택한 것이다.
그가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텍스트에는 현실 같은 허구가 존재했다. 한편 회화로는 전달하지 못하는 진짜 현실이 있다. 그 표현의 딜레마에서 찾아온 허망함이 회화에 대한 절망은 분명 아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의 어느 지점을 부유하던 그는 이제 맺고 끊을 수 있는 회화를 찾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허무주의는 아니길 조심스레 바란다.
임승현 기자

우정수
1986년 태어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예술사와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과 OCI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07년부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7월 14일부터 8월 14일까지 스페이스BM에서 열리는 그룹전 〈나레이션〉에 참여한다.

〈원숭이도서관〉 종이에 잉크, 아크릴 433×514cm 2015

〈원숭이도서관〉 종이에 잉크, 아크릴 433×514cm 2015

 

NEW FACE 2016 오종원

“좋은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오종원과 3시간이 넘는 대화를 마치고 작업실을 나오면서 기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입사한 지 5개월 만에 최대 난코스를 만났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기자의 눈에 들어온 하늘은 캄캄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인터뷰 전 그가 보내준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기자는 이토록 여러 이야기를 하려는 작가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정작 그와 나눈 대화에서 이렇다 할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작성한 녹취록을 여러 차례 읽어 보니, 몇몇 단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쇼 메이커(show maker)’, ‘롤 플레잉(role playing)’, ‘옴니버스 드라마(omnibus drama)’… 그의 모든 작업은 이 세 단어로 설명되는데 그 연관관계를 면밀히 살펴보는 게 이 글의 목표다.
‘쇼 메이커’, 이것은 오종원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로 그는 ‘작가’보다 이 단어를 더 선호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쇼를 만들어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피드백을 받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행하는 쇼 메이커는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결국 ‘롤 플레잉’과 연결된다. 직역하면 역할놀이를 일컫는 이 말은 그가 작업, 즉 연기하는 행위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오종원이 만들어내는 쇼의 메인 테마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가치’다. “한 개인으로서 옳고 옳지 못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걸 판단하는 기준은 내가 선택한 ‘가치’다.”라고 그는 말한다. 보통 가치 판단의 기준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 기호가 아닌 (무)의식적으로 학습되는 이념적인 의식 형태이며 의식의 흐름이다. 즉, 가치란 청년 실업률, 가계부채, 사회 안전 및 정치권을 향한 불신 등 모든 게 과잉 상태인 현실을 향해 쇼 메이커 오종원이 내뱉는 날 선 발언인 셈이다. 이에 대해 그는 “그림자는 있는데 실체는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며 “작업할 이야기가 주변에 널려 있는 지금이야말로 작가에게는 축복”이라고 말한다. 부조리한 사회 현실, 좀 더 내부적으로 들어가면 예술계 현실은 그가 쇼를 제작하는 원동력이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감이 잡힐 듯 말 듯한 상태에서 다시 한 번 그에게 전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 중 기억나는 건 “옴니버스 드라마”다. 작업 하나하나를 옴니버스 드라마라고 생각하며 시간이 흘러 개수가 늘어나면 보다 성숙된 한 편의 드라마가 완성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그였다.
전화 인터뷰를 추가로 진행했음에도 기자는 오종원이 하려는 이야기가 그가 제작해온 여러 편의 쇼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명료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거 하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쇼 메이커 오종원은 욕심이 무진장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 작업실을 찾았을 때 그가 신작이라며 보여준 LED 작품에는 “좋은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기자는 그 문구를 이렇게 바꿔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반드시) 좋은 작업을 해야만 합니다”로.
곽세원 기자

오종원
1986년 출생했다. 인천대학교와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2011년 팔레 드 서울에서 열린 〈지상최대의 섹슈얼리티-예고편〉 제하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총 3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을 가졌다.

냉정한 신도시의 아이스박스 프로젝트 中〈떠오르기 연습〉 퍼포먼스 2014

냉정한 신도시의 아이스박스 프로젝트 中〈떠오르기 연습〉 퍼포먼스 2014

 

CRITIC 퇴폐미술

6.23~8.14 아트스페이스 풀

이채영 | 경기도미술관 책임 학예연구사

“기획전이 하나의 텍스트로 작동하면서 관객에게 적극적이고 전복적인 읽기를 강요하는 방식은 작가와 작품이 지닌 고유한 자율성을 큐레이터라는 개인의 사유의 틀에 근거해 재배열하고 재맥락화하는 위험한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우리는 전시 자체를 해석이 필요한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가-큐레이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큐레이터의 정치적인 의도 안에 포섭된 작가들의 작품으로 대중을 선동하려는 현대미술의 타락한 의도로 파악될 수 있다. 현재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진행되는 〈퇴폐미술전〉이 그러한데 기획자는 1931년 독일의 나치에 의해 개최되었던 전시를 레퍼런스로 이 시대가 마치 파시즘의 유령이 떠도는 시대인 양 그 제목을 그대로 차용하여 전시를 만들었으며, 작가들의 불온한 작품들을 기획자의 정밀한 계획 아래 배치해 놓고 작품을 냉소하고 비방하는 글로 전시장을 가득 채워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그래서 더욱 적극적으로 전시를 해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오해 마시길. 위의 글은 80여 년전 나치가 개최한 〈퇴폐미술전〉에서 모더니즘 작품을 전시하고 비방했던 어법을 차용하여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진행 중인 〈퇴폐미술전〉 작품의 퇴폐성을 조목조목 언급한 안소현 큐레이터의 역설적인 서술 방식을 모방한 것이다. 위의 글을 다시 읽자면 이 전시는 큐레이터에 의해 의도된, 그리고 작가들의 지지와 공모로 만들어진, 정치적이고 비판적인 텍스트다. 관객은 좀 더 적극성을 가지고 작가와 기획자가 장치한 역설의 수사법을 읽어내야 한다.
전시의 해석을 작동시키는 레퍼런스는 1937년 나치가 모더니즘 작가들의 작품을 게르만 순혈주의에 위배되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그리고 퇴폐적이라 규정하고 전시한 〈퇴폐미술전〉이다. 오토 딕스, 코코슈카, 마크 베크만, 심지어 칸딘스키, 파울 클레, 피카소를 아우르는 이 전시에 걸린 작가들의 작품들은 전시 후 불태워지기도 하고 어딘가에 버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아직도 간혹 발견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2016년 대한민국에서 ‘퇴폐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사실 전시를 둘러싼 어떤 설명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전시 리플렛에는 참여 작가들의 작품이 왜 퇴폐적이며 왜 위험한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물론 그것은 의도된 위악적인 설명이다) 옥인콜렉티브의 〈작전명  -  하얗고 차가운 것을 위하여〉에 대해 기획자는 이 작품이 포퓰리즘의 속성을 지닌 퍼포먼스이며 “우리가 무엇보다 경계해야 하는 것은 예술로 위장한 불온함이 미지근한 잔불로 남아있는 것이다. 예술적 의미는 당장 폭발하지 않더라도 적절한 바람을 만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갈 수 있다”고 서술한다.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는 타자에 대한 몰이해와 정치적 부패, 경제적 좌절의 기운 속에서 예술이 행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와 교란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역설적으로 설명한 글로 큐레이터는 현대예술이 일상 속에 내재한 권력에 반응하고 정치적 교란을 수행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 “모든 문제에 불순세력들이 가담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철저히 가려내야 합니다.” 최근의 박 대통령의 언급이다. ‘비정상’과 ‘불순세력’. 사회에서 그것을 가려내고 배척하면서 지켜내야 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라는 불합리한 가치관과 “신비주의”로 대중을 선동하여 타자를 배척하도록 종용하는 사회라면, 대한민국이 파시즘의 기운에 사로잡혀 있다고 걱정하고 의심할 만한 합리적 근거가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이 전시의 의도를 읽는다. 전시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비정상’과 ‘불순함’에 대한 자기 검열이 상시화된 한국 미술계의 현실에 대한 자가당착의 고백이다.
파시즘을 역사적인 특정 정당의 행위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내재된 행동양식이자 언제든 발현될 수 있는 위험한 삶의 양식으로 파악한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에 대한 분석은 파시즘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괄호치지 않고 현재의 정치문화와 대중심리를 파악하도록 한다. 그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파시즘은 정당이 아니라 인간, 사랑, 그리고 노동에 대한 특정한 태도와 특정한 생활개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파시즘은 실천적인 삶의 문제에 관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왜나하면 파시즘은 이데올로기의 범위 내에서만, 또한 국가 제복의 형상 속에서만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퇴폐미술전〉의 작품들에서 정치, 성, 기계문명, 정신세계에 작동하는 일상의 파시즘에 대한 경계를 발견할 수 있다. 권용주 작가는 ‘새누리당’, ‘음지에서 양지를 지양한다’는 안기부(현 국정원)의 구호가 적힌 조악한 기념비를 전시함으로써 국가기관과 그것이 표방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냉소와 권위주의에 대해 경계를 드러낸다. 김웅현 작가는 〈스페인스베다〉에서 9   · 11 테러 당시를 찍은 인터넷 동영상을 마치 게임 이미지처럼 변형한다. 현실과 가상세계의 경계는 겹쳐지고 흐려지면서 일상화된 테러와 죽음에 대한 불감증, 모든 것이 스펙터클로 전환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이미지 소비 형태를 드러낸다. 오용석과 장파는 인간의 육체에 부여된 사회적 규범에 대한 거부, 패티시에 대한 집착, 관음증을 거부하는 왜곡되고 뒤틀린 여체로 성의 규범화에 문제제기한다. 전시는 작품을 신성시할 의도가 전혀 없어 보인다. 캔버스는 처박혀 있거나 겹쳐서 매달려 있고 조각들은 시선의 아래에 놓이거나 사각지대에 설치되어 있다. 의도적인 패러디이지만 역설적으로 ‘비정상’적이고 ‘불순’해 보이는 공간이 우리를 잠식하는 권위의식으로부터의 일탈을 꾀하기에 적절해 보인다.

CRITIC 말 없는 미술

6.24~8.6 하이트컬렉션

박가희 |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지난해 하이트컬렉션에서는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하 ‘클링조어’)〉을 타이틀로  전시를 개최한 바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 전시는 작품을 감상하는데 무리하게 개입하는 현학적인 언어와 과도한 개념에서 자유롭게 (현대)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지 물었다. 전시와 작품을 볼 때 마음보다는 머리가 앞서는 필자로서는 전시된 작품들의 섬세한 감각을 읽어내려가는 것이 적잖이 어려웠다. 같은 공간에서 6월 24일부터 진행 중인 전시 〈말 없는 미술〉 역시 일정 부분 앞선 전시와 같은 질문을 공유하는 듯 보였다.
이 글의 목적은 아니지만, 두 전시의 차이를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다. 후자는 기획을 구성하며 조금 더 ‘감각’의 경험을 극대화한 듯 보인다. 이는 〈클링조어〉가 여전히 작품을 독해하는 기획자의 글(일종의 길잡이가 되는 최소한의 텍스트)을 제공하며 작품의 의도와 작품이 드러내는 감각을 기획의 문맥 안에서 제시했다면, 〈말 없는 미술〉은 도록에 수록된 두 편의 글 외에 작품과 전시를 지시하거나 설명하는 그 어떤 글도 철저히 배제하면서 관객을 작품과 곧장 대면시킨다. 전시에서 주어진 글을 참조하는 것은 관객의 선택 사항이지만, 전시 기획 단계부터 ‘글’의 존재와 역할을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고, 관객에게 보이지 않기로 한 것은 전시의 의도를 강조하는 극단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이 전시는 학습된 언어와 표현 방식이 아닌 “물질과 기억, 유희적(시적, 음악적)인 운동의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전시의 공기를 관객이 직접 자신의 감각과 지각 경험을 통해 감상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
작품과 관객의 사이, 이 거리에서 감지되는 감각과 그 감각을 지각하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이다. 신형철은 이런 관계   – 자신과 문학   –   를 ‘너와 나’라는 두 존재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느낌의 공유, 사랑으로 이뤄진 ‘느낌의 공동체’로 비유한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미술을 머리로 읽는 것이 익숙한 필자 역시 개념과 논리를 풀어내는 언어로 점철된 미술 감상이 주는 피로감을 모르지 않기에 기획자 의도에 따라 작품을 마주할 때 떠오르는 심상을 좇아 보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작품과의 거리에서 감지한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가 만들어낸 ‘느낌의 공동체’를 이 글로 표현해 보았다. 그렇다면 불분명하게 떠오르는 감각과 현상학적 지각을 글로 서술할 때 서정적 서술이나 작품을 묘사하는 것 이상으로 어떤 표현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 표현을 통해 개인의 지각을 다른 이와 공유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는 표현에서도 자유로워지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도록에 수록된 두 편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글들은 작품을 위한 설명이 아니다. 기획의도에 따라 필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넓게는 느낌 자체를, 좁게는 이 전시와 그 안의 작품이 품고 있는 현상학적 지각을 다시 글로 표현한 것이다. 미술 사학자 강태희는 미술 글쓰기의 방식에 따라 각 작품이 품은 지각을 섬세하게 읽었다. 장우철 《GQ 코리아》 피처 디렉터는 우리가 뚜렷한 논리 없이 감지하는, 마치 알 것 같은 ‘느낌’과 ‘좋음’을 개인적인 서사를 따라 조각 글로 표현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전시에 반응하는 이 두 편의 글을 볼 때, 필자는 이 각기 다른 감각을 지닌 작품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전시장의 대기를 어떻게 지각했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자문하게 된다. 이 전시가 주장하는 바를 따라 감각을 이용해 작품과 필자가 감각의 거리에서 마주했던 순간을 추적하고, 순간을 함께한 이들의 공동체를 상상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공동체에 수장이 있다면 그것은 최병소의 〈Untitled〉(2016) 연작이라 하겠다. 신문 위 글자들을 볼펜으로 온 힘을 다해 지워나간 이 작업은 ‘말 없는 미술’이라는 문맥에 놓여 흡사 말 이전의 상태로 모든 것을 비워내려는 듯하다. 하지만 지우려는 강한 힘이 찢어버린 종이에서는 오히려 활자 그 이상의 감각적 에너지가 표출된다. 말이 없어진 침묵의 상태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공성훈과 최수인의 회화가 있다. 하나는 묘사적이고 서사적이며, 다른 하나는 매우 파편적이다. 서로 다른 이 둘은 마주 보며 조응하고 침묵을 깨듯 대화하면서 대기에 이미지와 서사를 더한다. 최병소의 작품을 중심으로 다른 쪽에는 강한 몸의 감각을 담아 거친 표면을 한 오치균의 〈창문〉(1995)이 오렌지색 벽과 대비를 이루며 자리한다. 이는 다시 공성훈과 최수인의 붓 터치가 전하는 촉각과 상응하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오렌지색 벽을 끼고 돌면 이전보다는 조금 더 어둡고 짙은 공기가 감도는 공간이 펼쳐지며 긴장감이 고조된다. 반듯한 프레임 안에 펼쳐진 김도균의 회색 하늘 이미지는 맞은편의 흩날리는 눈의 매우 서정적인 동세가 돋보이는 구정아의 〈U Become Snow〉(1998  /  2015)와 대구를 이루면서 풍경을 만들어낸다. 두 이미지 사이에서 숨을 고르는 차에 최대진의 〈들숨, 날숨〉(2015)이 마치 소복이 쌓인 눈처럼 툭하고 등장한다. 정적인 이미지의 고요한 회색 하늘과 흩날리는 눈발이 만들어내는 리듬감 있는 동적 이미지 사이에 절묘하게 놓인 최대진의 〈들숨, 날숨〉은 잠시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한다. 최병소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가 만들어내는 이 공동체는 이미지의 표면에 드러나는 손끝의 촉각과, 빛과 공기의 움직임이 감각적인 대기를 형성하며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이처럼 이 전시는 최병소의 침묵 속에 풍경을 관망하는 가운데 툭 하고 튀어나오는 최대진의 호흡처럼 모호하지만 ‘알 것 같은’ 촉각이 주는 감각에 기대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이 전시가 쉽지 않다. 아마 순전히 머리로만 작품을 읽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하며, “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라고 한 신형철 평론가의 말에 위안을 얻으려 하지만, 작품과의 모호한 교류에 기대어 써내려간 이 표현 역시 석연치 않다. 그렇다고 해도, 이 전시는 작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환기하는 데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를 전시로 풀어내기 위해 텍스트를 배제하고 모든 것을 관객의 감각으로 돌리는 방식의 유효성에는 의문이든다.

위 최수인〈건〉(오른쪽) 캔버스 위에 유채 112×162cm 2010

CRITIC 권오상 NewStructure and Relief

7.7~8.21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신승오 | 페리지갤러리 디렉터

권오상의 개인전 〈New Structure and Relief〉는 지하 1층 전시장을 〈New Structure〉 시리즈로 꽉 채우고 2층에서는 새로운 부조작업 시리즈인 〈Relief〉를 선보이고 있다. 〈New Structure〉는 평면의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구성하여 다시 사진으로 표현하는 〈The Flat〉 시리즈에서 파생되었다. 〈The Flat〉시리즈는 디자인 잡지의 평면 이미지를 입체로 만든 후 다시 촬영하여 평면 이미지로 보여주는 작업인데, 〈New Structure〉는 이 이미지들을 평면의 판으로 확대하여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평면을 입체로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Relief〉도 같은 〈The Flat〉에서 파생되어 소재는 같지만 이미지가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보이기보다는 하나의 이미지 조합으로 겹쳐져 나타난다. 물론 이 이미지들은 서로 특별한 연관성이 없다.
이 두 시리즈는 무작위의 이미지, 이미 디자인 되어 잡지에 실려 있는 오브제의 사진 이미지가 기본 재료가 된다. 그가 다루는 이미지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나 맥락과 상관없이 색, 형태 그리고 크기만으로 판단하며, 이를 확대하여 실제의 공간에서 재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이미지 자체의 조형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이는 이전의 〈Deodorant Type〉, 〈Masspatterns〉 시리즈에서도 지속적으로 제기한, 세상의 모든 물건과 이미지는 그것이 입체적이든 평면적이든 혹은 실제의 것이든 가상의 것이든 모두 어떠한 형태로도 조형적 조합이 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작업 〈New Structure〉와 〈Relief〉 시리즈에서 이전 작업과 다르게 눈에 띄는 것은 평면적 이미지가 물성을 획득하면서 가지고 있던 윤곽선이 드러나는 점이다.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시각적으로 먼저 인식하는 것은 물론 이미지의 크기와 색들의 시각적 요소들이지만, 최근 그의 작업에서는 이미지들을 계속해서 중첩되게 배치함으로써 오히려 개별 이미지들의 윤곽선이 중요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윤곽선은 어떤 맥락으로 작용하는가? 그는 중첩시키는 방식으로 개별 이미지의 물질성을 강조하면서도 전체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윤곽선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낸다. 이는 다양한 협업을 통해 공동체가 커다란 이념으로 뭉치기보다는 소수의 의견들이 모여 소규모 집단으로 결합과 분리를 반복하며 다시 새로운 집단이 생성되어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꾸어가는 동시대 현대 사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그의 작업 전반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이미지가 동시대에 존재하는 최신 유행의 상품 이미지, 자신의 주변에서 찍어낸 인물, 동물, 생활용품, 자신의 공구들 혹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이미지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관심은 동시대에 이미지로 생성되는 현상에 고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권오상은 물질화된 이미지를 윤곽선으로 구획지으면서, 이미지의 과잉 속에서 끝없이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우리들의 정체성과 사회구조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또한 그의 작업은 시각적으로 다양한 이미지들 때문에 복잡하게 보이지만, 조합 방식은 단순하여 장난감 블록을 쌓듯이 한계 없이 지속적으로 증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제작 프로세스 또한 이미지는 그 무엇이라도 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재생산할 수 있다는 작가의 생각에 그 뿌리를 둔다. 결국 이런 방식들은 권오상이 지속적으로 이미지가 물성을 획득하게 해서 입체로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재구성되는 이미지들의 윤곽선들을 통하여 작업의 기본 모듈을 확립해 나가고 있으며, 이는 복잡한 이미지 표피를 넘어 본질적인 조형언어를 꾸준히 모색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겠다.

위 권오상 〈뉴스트럭쳐〉 시리즈 알루미늄에 프린트 2014~2016

CRITIC 김보민 먼 목소리

6.8~29 포스코미술관

정필주 | 예술사회학, 미술평론

라인테이프를 사용해 표현한 현대적 풍경을 주로 수묵 담채 산수를 통해 강조하거나 대비하는 방식은 2006년 개인전 데뷔 이래 작가 김보민이 구축해온 작품세계의 특징이다. 다만, 테이핑을 통한 현대적 공간이든 전통적 세필과 농담 효과에 의한 공간의 기억과 그것을 매개로 하는 전승 설화이든 관계없이, 그 공간은 매번 달라지지만 우리가 느끼는 익숙함을 배반할 정도로 기이하거나 추상적이진 않다. 거의 10여 년간 계속된 작가의 풍경 탐구는 이제 누구나 한 번쯤은 스쳐 보냈을 찰나적 삶의 단편 속에 매우 사적인 친밀함을 쉽게 뿌리내리게 하거나, 목동, 선유도 등 집단적 기억이 굳건한 대도시 속 현실적 공간에 전승 설화나 작가 스스로의 상상적 세계를 무리없이 연결해낼 만큼 능숙해졌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러한 능숙함이 약속하는 현실적 삶과 그 공간이 담아온 기억의 단편 간의 멋들어진 연결 사례 중 마음에 드는 한 쌍을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 김보민은 단지 자신이 구축한 전지전능한 시점의 날렵하면서도 굳건한 화법을 통해 일련의 작품 리스트를 쉼 없이 갱신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가?
포스코미술관 제2기 신진작가 공모전의 일환으로 6월 8일부터 29일까지 개최된 김보민의 개인전 〈먼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김보민이 단순히 설화적 공간의 갖가지 재림 사례를 ‘발견’했음에 만족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과거에 비해 더욱 비중이 높아진 전통 산수는 현대적 풍경과의 경계에 머무르지 않으며 때론, 무채색의 현대적 풍경에 색과 생동감을 불어넣기도 한다. 이는 분명히 초기작에 비해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 공간을 자신의 주관적 인식을 통해 정의하고 발견하려 하는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서울 강서구의 풍경에 설화적 공간을 풀어낸 작품 ‘개화’나 ‘제차파의’ 등은 그러한 시도의 훌륭한 사례로서 손색이 없다. 다만, 유채색의 미려한 설화적 산수가 갖는 매력이 곧 모노톤의 테이핑된 콘크리트 도시 속 일상성을 대신하여 김보민 작품세계의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니다. 전통 산수에 대한 김보민의 접근은 현실적 공간의 존재 이유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엄격하진 않으며, 오히려 그 표현은 의도적으로 다운 그레이드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딛고 있는 대지에 켜켜이 쌓여 있는 선조들의 삶과 그 설화적 전승은 성스러움 대신 친숙함을 갖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친숙함은 현실 공간의 일상적 단조로움과 그 맥을 함께하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심정적 지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김포공항에서 남산, 한강에서 재개발 지역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풍경 속에 내려앉은 설화적 공간과 이야기들은, 무채색의 현실적 공간의 일상성 속에 숨은 삶의 기억을 대체하는 대신 그들을 되짚어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실마리 역할을 자처한다.
일상적 단조로움을 그려내는 무채색의 테이핑을 회색의 이상향에 대한 도시민으로서 김보민의 믿음이 실체화한 것으로 본다면, 작가의 작품 하나하나는 전통 산수와 유채색의 설화적 공간에 대한 일관된 수구초심이라기보다 서울이라는 회색 현실 공간 속 우리들, 그리고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어린 질문에 가깝다. 설화적 전승이 갖는 매력과 전통 산수에 대한 작가 본인의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김보민은 설화나 먼 과거 속 인물의 ‘먼 목소리’만을 빌려, 회색의 이상향에 거주하는 우리들에게 대화를 권하고 있다. 모든 답을 내놓는 대신, 대화의 상대를 비워둘 줄 아는 작가를 만나기 힘든 현대미술계에서 김보민과 같은 작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역시 기쁜 일이다.

위 김보민 〈곰달래〉(왼쪽) 모시에 수묵담채, 테이프, 금분 145.5×97cm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