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말 없는 미술

6.24~8.6 하이트컬렉션

박가희 |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지난해 하이트컬렉션에서는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하 ‘클링조어’)〉을 타이틀로  전시를 개최한 바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 전시는 작품을 감상하는데 무리하게 개입하는 현학적인 언어와 과도한 개념에서 자유롭게 (현대)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지 물었다. 전시와 작품을 볼 때 마음보다는 머리가 앞서는 필자로서는 전시된 작품들의 섬세한 감각을 읽어내려가는 것이 적잖이 어려웠다. 같은 공간에서 6월 24일부터 진행 중인 전시 〈말 없는 미술〉 역시 일정 부분 앞선 전시와 같은 질문을 공유하는 듯 보였다.
이 글의 목적은 아니지만, 두 전시의 차이를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다. 후자는 기획을 구성하며 조금 더 ‘감각’의 경험을 극대화한 듯 보인다. 이는 〈클링조어〉가 여전히 작품을 독해하는 기획자의 글(일종의 길잡이가 되는 최소한의 텍스트)을 제공하며 작품의 의도와 작품이 드러내는 감각을 기획의 문맥 안에서 제시했다면, 〈말 없는 미술〉은 도록에 수록된 두 편의 글 외에 작품과 전시를 지시하거나 설명하는 그 어떤 글도 철저히 배제하면서 관객을 작품과 곧장 대면시킨다. 전시에서 주어진 글을 참조하는 것은 관객의 선택 사항이지만, 전시 기획 단계부터 ‘글’의 존재와 역할을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고, 관객에게 보이지 않기로 한 것은 전시의 의도를 강조하는 극단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이 전시는 학습된 언어와 표현 방식이 아닌 “물질과 기억, 유희적(시적, 음악적)인 운동의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전시의 공기를 관객이 직접 자신의 감각과 지각 경험을 통해 감상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
작품과 관객의 사이, 이 거리에서 감지되는 감각과 그 감각을 지각하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이다. 신형철은 이런 관계   – 자신과 문학   –   를 ‘너와 나’라는 두 존재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느낌의 공유, 사랑으로 이뤄진 ‘느낌의 공동체’로 비유한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미술을 머리로 읽는 것이 익숙한 필자 역시 개념과 논리를 풀어내는 언어로 점철된 미술 감상이 주는 피로감을 모르지 않기에 기획자 의도에 따라 작품을 마주할 때 떠오르는 심상을 좇아 보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작품과의 거리에서 감지한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가 만들어낸 ‘느낌의 공동체’를 이 글로 표현해 보았다. 그렇다면 불분명하게 떠오르는 감각과 현상학적 지각을 글로 서술할 때 서정적 서술이나 작품을 묘사하는 것 이상으로 어떤 표현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 표현을 통해 개인의 지각을 다른 이와 공유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는 표현에서도 자유로워지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도록에 수록된 두 편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글들은 작품을 위한 설명이 아니다. 기획의도에 따라 필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넓게는 느낌 자체를, 좁게는 이 전시와 그 안의 작품이 품고 있는 현상학적 지각을 다시 글로 표현한 것이다. 미술 사학자 강태희는 미술 글쓰기의 방식에 따라 각 작품이 품은 지각을 섬세하게 읽었다. 장우철 《GQ 코리아》 피처 디렉터는 우리가 뚜렷한 논리 없이 감지하는, 마치 알 것 같은 ‘느낌’과 ‘좋음’을 개인적인 서사를 따라 조각 글로 표현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전시에 반응하는 이 두 편의 글을 볼 때, 필자는 이 각기 다른 감각을 지닌 작품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전시장의 대기를 어떻게 지각했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자문하게 된다. 이 전시가 주장하는 바를 따라 감각을 이용해 작품과 필자가 감각의 거리에서 마주했던 순간을 추적하고, 순간을 함께한 이들의 공동체를 상상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공동체에 수장이 있다면 그것은 최병소의 〈Untitled〉(2016) 연작이라 하겠다. 신문 위 글자들을 볼펜으로 온 힘을 다해 지워나간 이 작업은 ‘말 없는 미술’이라는 문맥에 놓여 흡사 말 이전의 상태로 모든 것을 비워내려는 듯하다. 하지만 지우려는 강한 힘이 찢어버린 종이에서는 오히려 활자 그 이상의 감각적 에너지가 표출된다. 말이 없어진 침묵의 상태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공성훈과 최수인의 회화가 있다. 하나는 묘사적이고 서사적이며, 다른 하나는 매우 파편적이다. 서로 다른 이 둘은 마주 보며 조응하고 침묵을 깨듯 대화하면서 대기에 이미지와 서사를 더한다. 최병소의 작품을 중심으로 다른 쪽에는 강한 몸의 감각을 담아 거친 표면을 한 오치균의 〈창문〉(1995)이 오렌지색 벽과 대비를 이루며 자리한다. 이는 다시 공성훈과 최수인의 붓 터치가 전하는 촉각과 상응하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오렌지색 벽을 끼고 돌면 이전보다는 조금 더 어둡고 짙은 공기가 감도는 공간이 펼쳐지며 긴장감이 고조된다. 반듯한 프레임 안에 펼쳐진 김도균의 회색 하늘 이미지는 맞은편의 흩날리는 눈의 매우 서정적인 동세가 돋보이는 구정아의 〈U Become Snow〉(1998  /  2015)와 대구를 이루면서 풍경을 만들어낸다. 두 이미지 사이에서 숨을 고르는 차에 최대진의 〈들숨, 날숨〉(2015)이 마치 소복이 쌓인 눈처럼 툭하고 등장한다. 정적인 이미지의 고요한 회색 하늘과 흩날리는 눈발이 만들어내는 리듬감 있는 동적 이미지 사이에 절묘하게 놓인 최대진의 〈들숨, 날숨〉은 잠시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한다. 최병소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가 만들어내는 이 공동체는 이미지의 표면에 드러나는 손끝의 촉각과, 빛과 공기의 움직임이 감각적인 대기를 형성하며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이처럼 이 전시는 최병소의 침묵 속에 풍경을 관망하는 가운데 툭 하고 튀어나오는 최대진의 호흡처럼 모호하지만 ‘알 것 같은’ 촉각이 주는 감각에 기대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이 전시가 쉽지 않다. 아마 순전히 머리로만 작품을 읽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하며, “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라고 한 신형철 평론가의 말에 위안을 얻으려 하지만, 작품과의 모호한 교류에 기대어 써내려간 이 표현 역시 석연치 않다. 그렇다고 해도, 이 전시는 작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환기하는 데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를 전시로 풀어내기 위해 텍스트를 배제하고 모든 것을 관객의 감각으로 돌리는 방식의 유효성에는 의문이든다.

위 최수인〈건〉(오른쪽) 캔버스 위에 유채 112×162cm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