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회화를 긋다
회화를 긋다
갤러리 세줄 4.18-5.31
갤러리 세줄에서 ‘회화를 긋다’라는 주제로 중진작가 최병소, 박기원, 장승택, 도윤희의 그룹전이 개최되었다. 뉴미디어 장르의 복잡하고 화려한 이미지, 시대를 풍자한 팝아트, 협업의 공존개념 작품들이 넘쳐나는 한국의 여느 전시장과는 달리 꾸준히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면서 예술의 이상적인 목적에 접근하는 작가들의 전시는 오랜만에 미학적 안도감을 가져다준다. 1980년대 한국의 미술계는 민중미술의 경향과 한국적 추상과 미니멀리즘, 개념작업의 계보를 잇는 작가들로 양분되어 있었다. 1990년대는 해외유학파들이 들어오면서 포스트모던의 일상적 소재를 다루는 작가들이 등장하고 2000년부터 상업적 명성을 떨치며 미술계를 장악한 젊은 블루칩 작가들이 본격적으로 대중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이번 전시는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 섬세한 변화를 추구해 자신만의 세련된 감각을 연마해온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시각예술의 본질에 해당하는 회화 장르 안에서 최소한의 선과 색채만 사용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천장이 높고 넓은 면적의 화이트큐브 전시장과 잘 어울리며 내재된 에너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1층에는 장승택과 박기원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장승택은 물감과 붓이 아닌 화학적 질료를 통해 시대적 회화를 실험하며 세련된 현대성 안에 잠재되어 있는 연약하고 불안한 것들을 표현한다. 이번 작품은 색채를 사용하여 약간의 변주를 준 화면 안에 최소한의 움직이는 선을 통해 감각의 미세한 부분을 흔든다. 하나의 엷은 표면에 원을 그리고 층층이 쌓아 만든 화면은 정지된 형태가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며 보는 이를 뿌옇고 모호한 심연으로 깊이 빠져들게 한다.
박기원은 장지로 된 화면을 비스듬한 선으로 분할하고 그 면 안에 촘촘하게 선을 그어 다양하게 작동하는 공간의 질서와 변화를 그려낸다. 사각 평면이라는 주어진 공간 안에서 비정형적으로 분할된 면들과 그 안에 각각 다른 감각으로 표현된 선들은 시간에 따라 축적된 세계의 조합이다. 사계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인간이나 사물은 선으로 대입되어 선이 만든 면, 그리고 그 면들이 만든 공간 안에 감정이 흘러들어가는 명상적 작품이다.
2층 전시장에서 도윤희의 대작들과 최병소의 신문지 드로잉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윤희의 회화는 형태의 흔적과 선들의 분절이 무채색 화면에 섬세한 감각으로 혼합되어 화면 전체로 퍼져나간다. 배경의 무의식적이며 원초적인 성층의 표현은 시간의 다양한 흔적들을 암시하고 그 위에 씨앗, 줄기의 시작과 같은 형태를 연결시킨다. 이렇게 생성된 비정형의 유기적 형상은 식물의 뿌리처럼 보이거나 산과 같은 자연풍경의 일부가 된다. 확실한 형태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의 이중구조로 그려진 회화는 감각적인 것과 비감각적인 것을 느끼게 하며 존재의 비밀에 섬세하게 다가가게 한다. 최병소의 작품은 신문지의 한 면은 그대로 보여주고 다른 한 면은 연필로 내용을 지워 검은 화면을 만든 것이다. 그는 매일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싣는 신문의 활자를 볼펜으로 지우고 연필을 사용해 검은 색이 전면을 뒤덮을 때까지 그려 한 폭의 추상화로 표현했다. 작가는 편향, 왜곡, 변질이라는 매체 안의 숨은 속성에 대한 시니컬한 거부의 표현으로 모든 것을 지우고 예술의 순수함 속에 그것들을 가둬놓는다. 그려지면서 내용은 비워지고 채워지면서 화면은 비워지는 조형과 삶의 근본구조가 함께 수반된 작품이다. 검은색 표면은 흑연으로 축적된 두께와 작가의 반복적 드로잉에 의한 힘의 밀림으로 요철이 생성되면서 추상표현의 예술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현실 참여에 대한 관심과 개념적 태도에서 출발한, 관조적이지만은 않은 열린 개념의 새로운 추상이다.
이번 전시가 갖는 의미는 시대가 원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영리한 작가들의 작품이 각광받는 미술계에 묵묵히 충실하게 자신의 세계를 깊이 파 들어가며 초월적 감각을 보여주는 작가들의 작업을 상업화랑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상황은 모더니즘을 경험하기도 전에 포스트모더니즘에 돌입하였기에 이상을 추구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진정한 감상을 해보지 못했다. 현란한 이미지의 제공과 투자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재의 우리 미술계는 예술의 원래 목적인 본질을 깊이 사고하게 하는 중진, 원로들의 작품을 조명할 기회를 많이 마련해 삶과 예술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가치를 찾고 또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김미진・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