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강애란 – 책의 근심, 빛의 위안
강애란 – 책의 근심, 빛의 위안
갤러리 시몬 8.28~10.26
알루미늄이나 종이죽으로 캐스팅해 만든 ‘책 보따리 오브제’들까지 넣는다면, 강애란은 거의 15년이 넘는 동안 책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와 인식론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씨름해왔다. 그녀의 책들은 도서관과 서점의 선반 위에 놓여 오랜 역사의 축적된 지식을 암시하기도 했고, 계몽의 빛으로서 이성과 지식을 외치듯 안으로부터 밝은 빛을 발하기도 했으며, 보자기와 끈에 묶여 감추어짐으로써 은밀한 주술적 행위로서 지식의 속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게 강애란이 제시해 온 실제의 책, 가상의 책, 멀티미디어로 이루어진 책들의 세계는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가 공존하는 ‘이질성’으로서의 세계이자 지식의 무게로 가득 차 있는 장소들 또는 ‘숭고함의 공간(The Space of Sublime)’이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 탈물질화하는 시대에 책의 미래에 대한 우려의 표현으로 이해되기도 했던 그녀의 책 설치작품들이, 관람자의 ‘인터랙티브 읽기 방식’ 혹은 ‘공감각적 읽기 방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디지털 기술과 인터페이스, 그리고 비디오이미지들을 동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시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강애란 전시는 여전히 책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리얼리티와 버추얼 리얼리티가 중첩된 공간 안에 LED와 비디오이미지들, 촉각적인 사물들과 추상적인 숭고의 의미들이 공존하던 이전의 방식과는 달리, 이번 전시에서는 표현 방식 및 내용에서 구체적이고 새로운 요소들이 추가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우선 1층에 전시된 작품들에서는 이전에 3차원의 공간에 놓이던 ‘책-사물들’이 2차원의 회화 공간 안에 ‘책-그림들’로 존재하게 되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책-그림들’은 마치 기하추상과 극사실주의 사이 혹은 평면과 사물 사이의 중간 어딘가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데, 작가가 혼용해 온 디지털과 아날로그 방식의 타협점을 보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12명의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기록한 2층의 비디오설치 작품들이다. 그동안 책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작가는 이제 책 안에 기록되는 내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빛을 발함으로써 비어있던 라이트박스로서의 디지털 책이 존재의 외적인 부분을 표현한 것이었다면, 지나간 아픈 역사 속에서 체험된 슬픈 삶으로 꼭꼭 채워진 책 속의 이야기들(비디오 영상들)은 작가의 시선이 내부로 향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작가가 만드는 책이 더 이상 비어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한 서문에도 쓰고 있듯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작품은 작가의 작업 궤적에서 새로운 분기점을 형성하고 있다. 역사적 아픔이자 사회적 이슈이기도 한 위안부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그동안 여성과 테크놀로지와 미디어에 대한 고정관념을 와해시켰던 작가 강애란의 미술가로서의 위상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야기가 되어 책의 내부에 자리 잡게 된 배춘희 할머니의 노래와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역사 속에서 과거와 현대 여성들의 삶과 예술, 문학으로 관심을 옮겨가고 있는 작가의 내적 시선의 확장을 기대해본다.
전혜숙・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