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박진화 – 강화發-분단의 몸
박진화 __ 강화發-분단의 몸
성곡미술관 8.29~11.30
박진화의 회화적 힘은 산불처럼 뜨거웠다. 구조적이면서 때때로 위압적이기도 한 화이트 큐브를 뒤흔들 수 있는 회화는 많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일지 모르겠으나, 20세기 회화는 화이트 큐브에 ‘모던하게’ 적응하면서 존재감을 키웠다. 미니멀과 팝과 극사실 작품들이 화이트 큐브에서 극찬 받은 것은 그것이 화이트 큐브와의 전시적 효과를 극대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박진화의 회화적 불은 그러나 태생적일 만큼 강렬하고 거칠다. 그것은 마치 가시나무나 떨기나무에 붙은 야훼의 불처럼 살아있다.
전시를 둘러본 뒤, 다시 도입부로 가 <그 너머2>를 보았을 때 나는 그 불의 시작이 1980년대와 맞닿아 있음을 직감했다. 그것이 실제로는 불의 형상이 아닐지라도 1988년 작 <그 너머2>는 사람과 신과 대지가 한 몸으로 불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불은 광야를 헤매는 자들의 고난과 억압과 순교(희생)와 분노와 절망, 그리고 희망의 예지를 상실하지 않으려는 신념의 강밀도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 그림에서 흥미로운 것은 성(聖)과 육(肉)이 이분화 되지 않고 서로 보듬어 안으면서 하나의 불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푸른 하늘이 아니라 ‘하늘’로서 존재하는 자와 땅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자들의 혼불!
10년, 20년이 흐르면서 그의 회화는 불의 불길로, 불씨들의 회화적 표현으로, 혼불의 작은 씨알들로 번졌다. 대부분 최근 10년 사이에 그려진 작품들은 불씨들의 붓질과 마티에르는 물론이요, 불씨들의 생명 에너지로 충만하다. 그리고 그 생명의 에너지는 이 세계를 이루는 빛의 색들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생명의 존재들이 각기 하나하나의 불(씨)을 터뜨려야만 가능한 일일 터. 그렇다면 박진화의 불(씨)과 상징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올해 제작된 <사인여천-무량화(事人如天-無量花)>가 하나의 단서가 될 것이다. 주지하듯 ‘사인여천’은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崔時亨) 선생이 동학의 시천주사상(侍天主思想)에 의거해서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된다. 또한 동학의 21자 삼칠주(三七呪)는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로 이뤄졌고 여기서 시천주사상이 발원하는데, 그 뜻을 풀면 다음과 같다. “지극하고 신령한 기운이여/ 내 안에 내려 지피소서,/ 그 맑고 밝은 신령이여/ 청하고 비오니/ 내 안에서 크게 지피소서./ 한 얼을 깨달아 모시니/ 무궁한 천지에 얼나 하나 마음,/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않으리니/ 모든 앎이 하나 마음” (필자 역).
박진화의 화면을 가득 메운 색, 그것이 사람이든 신이든 자연이든 우주이든 하나의 불씨로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의 실체는 ‘지극하고 신령한 기운’이다. 그 기운이 존재의 내부에서 맑고 밝게 지펴진 상태를 우리는 보고 있다. 올해는 동학 창시 120주년이 되는 해다. 최제우(崔濟愚) 선생은 동학 이후 두 갑자 뒤에 새 세상이 열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박진화의 회화는 예지의 현실태일 수 있다. 이 땅의 사람들이 한 얼로서 신령한 기운을 터뜨려 새 세상을 열고 있는 상태로서.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아직 그 불씨조차 살리지 못하는 정치적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김종길·경기문화재단 정책개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