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 LONDON Magnificent Obsessions : Artist as Collector
작가가 무엇인가를 수집하는 행위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서는 일이다. 작가는 때로 수집을 통해 작업의 동인(動因)을 얻기도 하고 소재로서 이용하기도 한다. 런던 바비칸 아트갤러리에서 열리는 <Magnificent Obsessions: The Artist as Collector전>(2.12~5.25)은 작가의 취미를 엿보는 흥미로운 전시다. 작업실 내부에 꼭꼭 숨겨왔던 작가의 소장품을 통해 그들의 은밀한 면모를 살펴보기 바란다.
예술가의 호기심 캐비닛을 열다
지가은 골드스미스대학 비주얼컬처 박사과정
“모든 수집가의 진열장은 우리에게 다른 세상, 수집가의 상상 속에만 있는 세상, 그러면서도 기억이건 상상이건 아름다움이건 천재성이건 또 다른 영역을 만들어내는 세상에 체류를 허락해준다. 그곳은 수집가가 도피하는 폐쇄된 공간이며 수집가 자신이 조물주요 심판자인 곳, 승인과 추방, 순서와 배열, 미와 가치를 결정하는 곳이다.” (필립 블롬 지음, 이민아 역, 《수집: 기묘하고 아름다운 강박의 세계》, 동녘, 2006, p.201)
예부터 예술계에는 남다른 수집벽을 자랑하는 대가가 많았다. 렘브란트는 동서양 회화부터 악기, 화석, 무기, 골동품 등 방대하고 열렬한 수집벽으로 가계가 파산에 이를 지경이었고, 루벤스는 보석, 조각품과 이집트 미라와 같은 고대 예술품에 감식안을 가진 수집가로 유명했다. 드가나 모네는 일본 판화에 심취해 이를 수집하는 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색채와 구도를 작품에 차용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피카소의 아프리카 조각과 가면 컬렉션은 큐비즘을 탄생시키는 데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런던 바비칸(Barbican)의 <아름다운 강박: 수집가로서의 예술가 (Magnificent Obsessions: Artist as Collector)전>은 이러한 수집가의 명맥을 잇는 전후시대 및 동시대 예술가 14명의 수집품 8000여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아르망(Arman), 솔 르윗(SolLewitt), 앤디 워홀(Andy Warhol), 피터 블레이크 (Peter Blake),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 등 낯익은 예술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수집 진열장이 공개됐다.
애초에 공개될 목적으로 모아진 수집품들이 아니다. 특별한 연결고리가 없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컬렉션이 모인 만큼 수집품의 범위나 종류도 광범위했다. 예술가 개인의 은밀한 취향이나 취미 생활이 배어 있는 갖가지 컬렉션들은 독립된 섹션으로 나누어진 공간에 각각 개별 전시처럼 포진했는데, 실제 작업실이나 집 안 한 켠을 슬며시 엿보는 듯한 관람 동선이 수집품 탐색의 묘미를 더했다. 컬렉션과 작품의 연관성이 명백한 경우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반짝이는 금속 액자 속에 나비와 곤충들이 정렬된 자태는 멀리서도 한눈에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주변으로 동물 박제, 해골, 의학 모형, 곤충 표본들이 군집해 있었다. 돌연변이 동물 박제나 사체의 단면을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아 기괴하고도 냉정한 시선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허스트 작업의 근저에는 어린시절부터 심취한 자연사 유물에 대한 관심과 죽음에 대한 유별난 집착이 자리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학생 시절부터 동료 작가들과 작품을 교환하는 것을 시작으로 스스로 고가의 미술작품을 수집하는 컬렉터가 되었다. 컬렉터의 생리를 이해하기 위해 미술품 수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고백한 바 있는 허스트에게 수집 행위와 예술 창작은 동일한 맥락에 존재한다.
예술가의 수집 컬렉션과 작품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경우도 있지만 그 연관성이 아주 은밀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히로시 스기모토(Hiroshi Sugimoto)의 정적이고 미니멀한 흑백 사진들을 먼저 떠올렸다면 전시장에 진열된 신석기시대 도구들과 화석, 해부학 모형과 각종 의학 도구들로 이루어진 그의 수집품들이 꽤나 낯설지도 모르겠다. 스기모토가 사진작가가 되기 전에 일본 민속미술을 취급하던 전문 딜러였다는 행적도 그의 자연사 컬렉션의 수준을 높이는데에 한몫했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들어가 생각해보면, 스기모토 컬렉션은 인류의 기원이나 생명, 지식의 진화, 흐르는 시간과 역사의 층위들을 사진이라는 한 프레임에 응축하고자 하는 그의 오랜 예술적 사유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스기모토에게 화석과 사진은 모두 특정한 순간의 시간성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그 본질이 같은 영역인 것이다. 미술품 전문가(connoisseur)의 심미안으로 특정한 분야와 장르에 특화된 수준 높은 컬렉션을 완성한 또 다른 예술가로는 하워드 호지킨(Howard Hodgkin)이 있다. 학창시절부터 인도회화에 깊이 매료되어 수집을 시작한 호지킨은 특히 17세기 무갈(Mughal) 회화에 조예가 깊다. 양식과 맥락은 다르지만,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와 빛의 표현을 즐기는 호지킨의 추상회화와 인도회화의 연관성도 짐작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수집, 병리학적 강박증? 창작의 동인?
수집한다는 행위 자체와 자신의 작업세계에 유사한 수행적 규칙을 적용하는 예술가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1960년대 유럽의 누보 레알리즘(Nouveau Realisme)을 주도한 아르망(Arman)이 있다. 한 가지 종류의 산업 생산물과 일상 오브제들을 유리 진열장 안에 빼곡히 채워넣은 작업과 같은 방식으로, 아르망은 자신의 아프리카 가면과 조각상, 시계, 일본 갑옷 컬렉션에도 예외없이이 ‘반복과 축적’의 코드를 적용했다. 미니멀리즘의 대표주자 솔 르윗은 자신의 작업실이나 생활 공간에서 마주하는 일상용품들의 사진을 종류별로 모아 9개씩 목록화해두었다. 작품의 균일한 모듈 구조와 조형성이 일상적 삶의 반복된 수행성에도 고스란히 묻어난 경우이다. 이와 함께, 영국 도예가 에드문드 드 왈 (Edmund de Waal)의 단순한 형태와 간결한 색채의 도자기 작품들이 군집하여 만들어내는 리듬감은 어린 시절부터 원석과 화석을 모아 순서대로 배열하기를 즐기던 그의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일본에 머물 때 모은 264개의 ‘네추케(Netsuke)’ 컬렉션도 왈의 명상적인 수집 활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이와 정반대로 한네 다보벤(Hanne Darboven)은 엄격한 수학적 계산과 배열, 개념주의에 중심을 둔 자신의 작품 체계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수집 패턴으로 반전을 선보였다. 사자가죽에서부터 실물크기 말 조각상, 각종 공예장식품 등 무질서해보이는 수집품 더미는 그녀의 함부르크 고향집과 작업실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빈틈없이 차지하고 있던 수집품 일부를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한편, 컬렉션을 구성하는 각 아이템의 모티프나 이에 담긴 기억, 이야기가 예술가들에게는 그 자체로 영감의 보고가 되기도 한다. 멕시코의 타투이스트(Tattooist) 닥터 라크라 (Dr Lakra)는 정식 미술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전통시장이나 벼룩시장에서 모은 일상적 오브제나 이미지들이 교과서였다. 벽면을 메운 50장의 음반 커버에 담긴 이국적이면서도 통속적인 핀업걸(Pin-up girls) 이미지와 으스스하고 기이한 캐릭터들이 타투 디자인의 중요한 소스가 되었다. 미국 작가 짐 쇼 (Jim Shaw) 컬렉션의 주된 출처도 중고 잡화점이나 동네 차고 세일이었는데, 그가 집착적으로 수집한 것은 내다 버려진 작가 미상의 그림들이다. 작가는 이 흉물스러운 그림들이 아무도 원치 않기 때문에 더 의미가 깊다고 말했는데, 이는 미국 대중문화의 찌꺼기를 대하는 그의 끈질긴 애정과도 일맥상통한다. 짐 쇼는 파편화되고 소모되는 대중문화의 시각 이미지에서 따온 상징, 기호, 모티프를 그만의 방식으로 중첩시켜 만든, 출처와 전개가 불분명한 이야기를 통해 사회와 개인에 대한 질문을 던져왔다. 더불어, 영국 사진작가 마틴 파(Martin Parr)의 기념 엽서 컬렉션은 그가 스냅사진에 담아낸 현대인의 단조로운 여가 생활상, 그에 스며든 소비사회의 강박적 욕망과 허영의 단상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흑백의 빈티지 엽서부터 컬러로 이어지는 20세기 엽서 시리즈에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진부한 기념 사진, 관광 사진의 시선이 포착되어 있다. 또 이와는 별개로, 마틴 파가 소비에트 연방 시절 우주로 보내져 희생양이 된 개, 라이카를 추억하는 이미지들을 담은 담배 케이스나 배지, 시계들을 집요하게 수집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집벽이 병리학적인 저장강박증으로 남느냐 혹은 지치지 않는 창작 동인의 열쇠가 되느냐는 한 끗 차이이다. 패 화이트(Pae White)는 베라 뉴만 (Vera Neumann)의 텍스타일 디자인이라면 침대보, 티타월, 냅킨, 스카프 등 무엇이든 중독적으로 사 모은다. 화이트에게 이 수천 장의 텍스타일 컬렉션은 “디자인 라이브러리 혹은 그래픽 아카이브”이자, 패턴 디자인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하는 영감의 원천이다. 작가는 자신의 이 끈질긴 수집 에너지가 창작을 지속시키는 결정적인 동력이라고 말했다. 피터 블레이크(Peter Blake)도 타고난 수집가 기질을 자랑하는데, 그의 수집벽은 뿌리깊은 집안 내력으로 알려졌다. 영국 민속미술품, 오래된 장난감, 빅토리안 콜라주, 곤충 표본, 가면 등 그 수집 범위도 광범위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수십 종류의 코끼리 모형을 비롯해 인형과 간판, 가면 컬렉션의 일부만이 공개되었다. 작업실 벽면을 가득 채운 간판 컬렉션을 그대로 전시장에 가져와 재현하고 싶었던 큐레이터의 바람은 블레이크의 거절로 성사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자신만의 수집 체계와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을 우려하는 진정한 수집가적 고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블레이크에게 작업실은 이제 수집품의 정교한 축적과 배열로 완성된 아주 사적인 영역의 예술작품이 된 것이다. 컬렉션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된 사례는 미국의 화가 마틴 왕(Martin Wong)의 컬렉션에서도 찾을 수 있다. 왕이 40여 년간 수집한 중국 다기들과 기념품 4000여점은 작가가 타계한 이후 이를 승계한 또 다른 예술가 단 보(Danh Vo)가 설치작품으로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마지막으로, 일상생활과 삶 자체가 수집과 저장의 연속이었던 강박적 수집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컬렉션은 그 유명세에 비해 다소 초라한 규모와 수준으로 공개되었다. 워홀의 판화 작품과 함께 전시된 쿠키통들은 그가 평생 끊임없이 사고 모으고 쌓아 두고 보관해 온 수만 점의 물건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쇼핑중독자였던 워홀이 남긴 것은 벼룩시장에서 사모은 물건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창작 활동과 비즈니스 과정, 사적인 일상생활에서 파생된 온갖 종류의 기록물을 담은 박스 610개가 발견되었는데, 워홀 스스로 이를 ‘타임캡슐’이라 명명했다.
주로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경험 등 개인의 심리적 요인에서 비롯된 수집 강박은 예술가들에게는 그저 수집을 위한 수집에 그치지 않고, 창작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열렬한 탐구 에너지이자 애정과 욕망의 분출구가 된다.
그 컬렉션의 세계는 예술가 자신만의 질서와 체계, 철학과 미감이 작동하는 하나의 소우주이고 상상과 창조력의 발로이다. 때로는 수집품에 담긴 이야기가 특정 지역색이나 정치, 문화, 사회사의 다양한 층위를 반영하는 흥미로운 텍스트가 되기도 한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리디아 이(Lydia Yee)는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면서 늘 그들의 생활공간에 함께 자리한 수집품들의 정체가 궁금했고, 이들의 집착적 수집 동기, 작품과 컬렉션의 내밀한 연관 관계를 들여다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전시는 예술과 수집의 동인과 배후를 심도있게 파고들었다기보다는 예술가 컬렉션의 폭넓은 스펙트럼과 다양성을 수용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관객은 논리나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예술가들의 이상한 호기심에 동참하는 열린 마음만 있으면 충분히 전시를 즐길 수 있다. ●
맨위이미지 닥터 라크라(Dr. Lakra)의 레코드앨범 커버 수집품_ <Magnificent Obsessions: The Artist as Collector전>, Barbican Art Gallery_Peter MacDiarmid, Getty 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