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 VIENNA Sleepless – The Bed in History and Contemporary Art
줄리아 피시텔리(Giulia Piscitelli) <임시 상태(Temporary State)> 용수철 매트리스 라텍스 무명천 220×180cm 2011 Courtesy Galleria Fonti © Photo: Amedeo Benestante
침대가 갖는 문화사적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휴식의 장소라는 기본적인 기능 외에 문명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며 새로운 의미가 덧입혀진 인류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한 흐름을 살펴보는 전시 <잠 못 이루는-역사와 현대미술로 본 침대(Sleepless-The Bed in History and Contemporary Art)전>(1.30~6.7, 오스트리아 빈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21세기 하우스)이 열린다. 공간으로서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의미를 가지는 침대를 새롭게 고찰해본다.
불면증에 걸린 현대미술
박진아 미술사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인생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들은 침대 위나 그 주변서 벌어지지 않는가? 예술적 대상으로서 혹은 주제로서 침대는 세계 문명의 태초부터 늘 인류와 함께 해왔다. 침대가 있는 장소 혹은 침실이란 영원한 모태의 공간, 즉 생명이 잉태되는 신비의 변증적 공간이다.” 마리오 코도냐토(Mario Codognato) 큐레이터는 침대를 주제로 한 현대미술 전시회를 기획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침대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가구에 얽혀 있는 인류 역사와 의미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전시 <잠 못 이루는 현대인: 역사와 현대미술로 본 침대(Sleepless – The Bed in History and Contemporary Art)전>은 1월 30일 개막해 6월 7일까지 오스트리아 빈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21세기 하우스(21er Haus)에서 계속된다.
누구라도 어려운 시험문제에 답하지 못하고 난감해 하거나 아무리 뛰려고 애를 써도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허우적대는 꿈을 꾸다 화들짝 놀라 깬 경험이 한 두 번은 있을 것이다. 크고작은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으면 마음속에 억눌러둔 불안과 강박감이 꿈으로 표현되곤 한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 앞으로 해야 할 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실존적 불안감이 커진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언제부턴가 하루 24시간 중 방해 받지 않고 쉬고 잠자고 꿈꿀 수 있는 한 토막 7~8시간은 잘 깎은 한 덩어리 다이아몬드보다 찾기 어려운 귀한 럭셔리가 되었다.
과거 하루 8시간 편한 잠을 약속했던 침대 생산업체들은 21세기로 접어든 후 잠자리에서조차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무공간으로써의 침대를 마케팅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2001년 뉴욕근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열린 화제의 디자인 전시회 <미래의 사무실(Workspheres)전>에서 네덜란드의 디자이너 헬라 용게리우스(Hella Jongerius)는 아우핑(Auping) 사와의 협력으로 멀티 컴퓨터 스크린을 장착한 업무용 침대 콘셉트를 디자인하고 ‘침대 속에서 비즈니스’를 선언했다.
특히 최근 미국에서 만성적 불면증에 시달리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취침과 숙면을 돕는 스마트폰 앱까지 등장해 속속 일상화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어, 올해 1월 30일자 미국의 시사지 《뉴스위크》는 <미국인 대 취침결핍의 시대(The Great American Sleep Deficit)> 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담은 특집호를 내보내 불면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이 그토록 증가하는 원인을 분석하고 약물 치료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1970년대 후반기에 태어난 이른바 밀레니엄 세대는 불안정한 라이프스타일과 스마트폰 같은 전자용품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전 세대보다 더 잠을 못이룬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그 같은 침대 생산업체들과 소비전자제품 업계의 라이프스타일 예언은 적중했디. 오늘날 현대인은 깊은 밤에 일하거나 잠 못 이뤄 들썩이는 이른바 24시간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사무실에서 일을 다 마치지 못한 일중독자들은 잠자리로까지 컴퓨터를 가져오고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소셜네트워크로 인맥관리하느라 바쁘다. 특히 밀레니엄 세대는 ‘셀카(selfie)’는 물론 인생의 가장 사적인 순간까지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기기를 통해 공개・공유하는 데 익숙한 독특한 세대인데, 그 현상은 2015년 1월 자 《엘르》 프랑스 판 포르노 특집에 실린 베네통 광고 사진가 올리비에로 토스카니(Oliviero Toscani)의 사진 연작 <사이버 에덴의 아담과 이브(Adam and Eve in Cyber-Eden)> 에 잘 응축돼 있다.
침대, 인생의 가장 극적인 무대
서양미술에서 침대가 개인사와 문화 일반을 반영하는 배경 도구로 즐겨 등장했듯 오늘날 거의 대다수의 인간은 침대에서 태어난다. 라비니아 폰타나(Lavinia Fontana)가 그린 16세기 그림 속에 직사각형 요람에 누워있는 갓난아기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서구에서 생명 탄생의 신비는 침대에서 비롯된다고 믿어졌다. 일찍이 고대 로마시대 폼페이의 여느 가정집 금슬 좋은 내외의 침실에서는 벽장식으로 사랑을 나누는 연인 남녀의 모습이 그려졌고 매춘굴에서는 침대가 광고판 심볼로 활용되었다 한다.
인생살이의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순회바퀴 속에서 결정적인 단계마다 침대는 인간과 함께 한다. 인류 역사의 초창기부터 우리가 몸을 뉘어 휴식하고 잠드는 자리는 참으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해왔다. 우리네 인간은 침대(寢臺) 또는 요(寢牀)에서 태어나고 사랑을 나누고 나이가 들면 병을 앓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침대를 가장 극적이고 최종적인 ‘인생의 무대(theater)’라고 하는 이유다.
아르테포베라 운동의 기수 야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는 내버려진 단순한 철제 침대받침이나 매트리스를 전시하는 것으로써 시간과 기후 변화에 따라 붉게 녹스는 금속과 닳고 허물어져 먼지로 화하는 직물 매트리스란 한 인간이 무작위적으로 거치는 탄생, 성장, 사랑, 죽음이라는 생사의 순환과정과 다를 바 없음을 은유하며 관객에게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사색의 여유를 가져볼 것을 권유한다.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의 설치작 <무제(검은 침대)>는 침대란 인간의 신체가 가하는 무게, 반복해 가한 충격, 체액을 감내하고 흡수하는 세월의 증인이자 산물이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현대미술에서 침대가 한 편의 정치적 콘셉트이자 매개체로 재탄생한 결정적인 순간은 지금부터 약 50년 전인 1969년에 벌어진 한 편의 개념미술 퍼포먼스를 통해서였다. 오노 요코와 존 레논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힐튼 호텔에서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며 침대 시위(Bed-In)를 펼치는 것으로써 휴식, 잠, 에로티즘을 두루 상징하던 침대에 대한 관점과 관객의 고정관념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렇게 하여 침대는 전 세계 만인이 볼 수 있는 공공 무대가 되었고, 신혼여행이라는 로맨틱한 행사는 ‘싸우지 말고 사랑합시다(Make Love, Not War!)’라는 구호를 내건 정치적 제스처로 재탄생했다.
20세기 후반기 현대미술이 연인과 부부만의 침실 공간 속으로 밀치고 들어온 이후로 이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에서 벌어지던 갖가지 인간사도 예술이라는 이름을 달고 공공 공간 바깥으로 떠밀려 나왔다. 미국의 팝아티스트 에드 루샤(Ed Ruscha)는 ‘대학 시절 즐거움이여 안녕(Goodbye to College Joys)’이라는 캡션과 함께 작가와 두 여성이 한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사진을 1967년 미술전문지 《아트포럼(Artforum)》에 발표하는 것으로써 결혼 선언을 하고 자유롭던 총각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서 그는 1971년 24분 길이의 16mm 비디오 <프리미엄(Premium)>을 제작했다. 한 남성이 한 여인을 호텔로 초대해 드레싱과 크루통으로 사랑의 샐러드를 만든다는 줄거리의 아트 코미디로 심각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영상예술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또 자유연애가 구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주류 청년문화로 자리 잡아가던 1970년대, 래리 클라크(Lary Clark)는 미성년자 연애, 불법 마약 복용, 폭력 등 청년 서브컬처 뒤안길에 서린 어두운 일면을 사진으로 담아냈는데, 특히 <무제(Untitled, T40)>(1971)라는 흑백사진에서 침대는 연인 사이에 사랑은 물론 금지된 마약을 몰래 주고받는 공간으로 묘사됐다.
그런가 하면 일찍이 바로크 시대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에서 그렸듯 침대는 죽음의 무대이기도 하다. 신체미술이 미술 창조의 큰 모티프로 차용된 오스트리아에서 특히 침대는 질병과 죽음과 연관 깊은 사물로 여겨졌다. 긴 병고 끝에 2012년 타계한 프란츠 베스트(Franz West)의 작품이 이번 전시에서 유독 다수 눈에 띄는데,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자도 결국 패배자에 불과하다는 인간생명의 유한성에 사로잡혀 있던 이 빈 출신 조각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또 지난해 세상을 뜬 오스트리아 출신의 원로화가 마리아 라스닉(Maria Lassnig)의 유화작품 <병원(Hospital)>은 병원 침대에 누워 육신적 고통, 공포, 고독 속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한낱 고깃덩이로서의 육신을 여과없이 표현했다.
침대가 모티프가 된 21세기 미술작품들 역시 관객의 심기를 불편하게 건드리면서 침대는 휴식과 휴면을 위한 가구가 아니라며 자명종을 요란하게 울려댄다. 트레이시 에민(Tracy Emin)은 1999년 헝클어진 침구와 자질구레한 소지품들이 널브러져 있는 <나의 침대(My Bed)>라는 레디메이드 설치작을 갖고 자신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 공간과 과거사를 노출하는 ‘치부 고백하기’ 전략으로 현대미술의 경계를 한 단계 더 밀어붙여 현대미술사의 ‘아이콘’이 되었다. 사라 루카스(Sarah Lucas)의 <오 나튀렐(Au Naturel)>은 남녀를 상징하는 과일과 플라스틱 양동이가 놓인 매트리스를 통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침대란 남녀 간 섹스의 교환이 벌어지는 영역임을 논평한다. 서구와 중동 사이의 정치문화적 차이를 미술로 해석하는 모나 하툼(Mona Hatoum)에게 현대 글로벌 시대에서 침대란 치즈갈이를 연상시키듯 뾰족하게 날이 선 바늘방석이라고 은유하면서 현대인에게 한시도 방심 말고 깨어있으라 경고한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는 종일 일하고 소비하는 21세기형 인간을 요구한다. 일로, 시험 준비로, 마음속 불안감 때문에 깊은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24시간 사회 속에서 늘 불안해 하고 정처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은 어느새 초현대판 노마드가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회를 떠돈다. 만성적인 잠 부족과 피로에 지치고 화가 난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편안한 침대와 방해받지 않는 숙면이지만, 현대미술은 현대인의 만성적 불면증은 쉽게 치유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는 듯하다. 그러나 기억하자. 플라톤이 말했듯, “잠자고 꿈을 꾸지 않는 인간은 죽음이라는 꿈 없는 영원(永遠)으로 간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