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Topic] Gilbert & George
그 존재 자체로 동시대 서구 현대미술을 상징하는 길버트와 조지(Gibert & George). 그들의 전시 <희생양(Scapegoat)>이 영국 런던(화이트 큐브 갤러리, 7.18~9.28)과 프랑스 팡탱(테데우스 로팍 갤러리, 9.7~11.15)에서 열리고 있다. 70을 넘긴 나이임에도 삶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은 그들의 미적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것은 둘인 듯 하나인 작가 그룹의 대명사인 그들의 작가로서의 행보와 꼭 닮아 있다.
창조하면서 창조되는 예술
심은록 미술비평
루브르 박물관이나 퐁피두센터 앞에 못 보던 조각상이 하나 놓여 있다. 얼굴과 손뿐만 아니라 옷과 장식품까지 모두 골드 브론즈 물감으로 뒤덮여 있다. 관광객들은 진짜 조각상인지 궁금해 하며 가던 발길을 멈춘다. 용감한 아이들은 조각상을 살짝 건드려 보기도 한다. 부모에게 동전을 얻은 아이가 조각상 앞에 놓인 작은 소쿠리에 동전을 넣는다. 그러자 기계의 작동버튼이 눌린 듯, 갑자기 조각이 움직인다. 유럽의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이러한 퍼포먼스가 약 반세기 전에 처음 시작됐을 때는 혁명적이었다. 비록 서두에 언급한 길거리 퍼포먼스가 ‘태도’(작품 동기, 과정, 의미)는 제거하고 ‘형식’만 취했다고 할지라도, 그 원조는 길버트와 조지의 <노래하는 조각(The Singing Sculpture)>이라 하겠다. 주변을 돌아보면, 현대미술이 이처럼 새롭게 각색되어 우리의 일상과 섞여 있다.
1969년, 전설적인 전시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의 <태도가 형식이 될 때>의 오프닝에 길버트와 조지가 참여했다.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비즈니스 정장을 입은 이들의 얼굴과 손에는 온통 골드 브론즈 물감이 칠해져 있었다. 탁자를 조각받침대 삼아 두 점의 조각상이 되어, 플래너건과 앨런의 “아치 아래서”(Underneath the Arches)를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이들은 서서히 움직이는 커다란 태엽 인형 같았다. 이때부터 길버트와 조지는 ‘퍼포먼스’ 대신에 “살아있는 조각”, 혹은 “살아있는 작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왜냐하면 ‘퍼포먼스’나 ‘해프닝’은 작가가 잠시 동안만 예술행위를 하는 것이지만, 이들에게는 삶 자체가 예술의 연장이며, 예술의 연장이 삶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체는 이처럼 살아있는 조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토몽타주로 확장되어 지금까지 계속된다. 길버트와 조지의 포토몽타주는 세르게이 트레차코프(Sergei Tretyakov)의 말처럼, 사진과 사진만의 몽타주가 아니라, 사진과 텍스트, 사진과 색채를 몽타주한다. 특히 예술과 삶을 몽타주한다.
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유럽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적 작가인 길버트와 조지, 이들은 “두 사람이지만 한 작가”라고 불린다. 이탈리아 출신 길버트 프뢰슈(Gilbert Prousch, 1943~)와 영국출신 조지 패스모어(George Passmore, 1942~)는 1967년 세인트 마틴 예술대학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함께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해 벌써 반세기 가까이 되었다. 그들이 대학을 다닐 때, 지나치게 많은 색깔, 지나친 감정, 섹스는 예술의 터부였다. 길버트와 조지에게도 이러한 경향이 잠시 보였으나 곧 그 반대로 방향을 완전히 돌렸다. 그들의 작품에는 “너무나 많은 색깔, 너무나 많은 섹스, 너무나 많은 알코올” 등이 나타났다. 이와같이 그들은 미니멀아트나 신체가 제거된 개념미술에서 “휴먼아트(human art)”, 즉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로 전향했다. 초기 퍼포먼스부터, 길버트와 조지의 용어로 말하면, ‘살아있는 조각’부터 현재까지 그들의 가장 중요한 마티에르는 ‘신체’이며, 이를 사용한 예술은 ‘살아있는 작품’이다. 삶 자체가 예술이 되면서, 승화되거나 고상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동안 예술화 할 수 없었던 새로운(묻혀 있었던) 소재가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적 터부가 거침없이 재현되고, 삶과 예술의 경계선에서 구분되었던 기존 질서와 고정된 체제가 무너진다. 사회 관습적인 용인의 한계를 의도적으로 일탈한다. 길버트와 조지는 자신들의 현실적인 삶 (살고 있는 장소, 현재의 사회정치적 문제 등)과 연관된 주제를 화면 위에 신체언어로 구사한다. 애브젝트 이미지(Abject Image, 땀, 대소변, 토사물, 정액처럼 신체에서 나오는 불결한 것들에 대한 이미지), 생식기관의 적나라한 노출, 기독교적 자아분열 이미지 등이 여과 없이 사용된다. 이 같은 충격적인 이미지들로 대중의 관심을 얻는 만큼 강도 높은 비판도 끊임없이 받았다.
‘살아있는 조각’은 창조자와 피조물이 구분되지 않으며, 작가와 작품이 이분화 되지 않는다. 작가자 조각품이고, 만드는 동시에 만들어지는 행위가 동일체에서 이뤄진다. 창조자와 피조물이라는, 신화시대부터 현대까지 고수된 이원론적 구분이 무너진다. 또한 전시장 안과 밖이, 무대 위와 아래가 구분되지 않으며, 예술과 일상 삶이 나눠지지 않는다. 이들에 의해 살아있는 작품은 미셀 푸코가 말한 “삶의 예술(미학)화”로 표현되고 실천된다.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자기 배려와 단련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조하며, 일상의 삶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존재’의 미학이 아니라 ‘삶’의 미학이다.
현재, 길버트와 조지는 이 삶의 미학을 <희생양(Scapegoat)>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전시는 런던 화이트 큐브 갤러리(White Cube, 2014.7.18~9.28)와 프랑스 팡탱(Pantin)의 테데우스 로팍 갤러리(Galerie Thaddaeus Ropac, 2014.9.7~11.15)에서 진행 중이다.
“여기가 어디인가?”
물론 파리 근교에 있는 테데우스 로팍의 전시장이지만, 작품 속 배경은 아랍의 어느 중소도시 같다. 런던을 배경으로 많은 작품을 해온 길버트와 조지이기에 당혹감마저 든다. 작은 폭탄 같은 오브제가 넘쳐나는 화폭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이슬람적이다. 인도나 아랍 상점들이 배경에 나타나기도, 눈만 내놓고 온통 검은 천으로 가린 니캅(Niqab) 차림의 무슬림 여인들과 토브(thobe)를 입은 무슬림 남성, 무슬림 청년들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몇몇 작품은 마치 비행기에서 폭탄이 연이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공중투하(AIRDROP)>)
이처럼 새로운 주제와 낯선 분위기 속에 길버트와 조지의 전형적인 원칙(표현방식)들도 눈에 띈다. 화면이 그리드 (사각형 격자무늬)로 구획되고 확장되며 긴장되게 하는 것, 이 그리드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 복제가 이뤄지는 것, 좌우 혹은 상하로 거울효과를 내면서 반복되는 것. 이 반복에 의해 발생된 균형을 작가들 자화상으로 깨는 것 등등, 이들 특유의 기본적인 원칙은 지켜지고 있다.
<희생양>, “이슬람은 진리가 아니다”
전시의 첫인상을 잠시 접고, 이제 차근차근 작품을 흩어본다. 작은 폭탄 같은 오브제 사이로 “어떻게 이슬람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느냐”는 영어 신문 제목이 보인다. 오브제 너머 가게들의 간판이 아랍어가 아니라 모두 영어로 쓰여 있다. 무슬림들 사이로 영국 전통 건물양식이 보이기도, ‘ER II(Elizabeth Regina 엘리자베스 여왕 2세)’라는 영국왕가의 표지가 등장하기도, 또한 런던의 랜드마크인 대형 시계탑 빅벤(Big Ben)도 보인다. 결국 <희생양> 연작의 배경은 아랍의 어느 한 도시가 아니라 런던이었다. 작은 폭탄처럼 보이는 오브제는 ‘휘펫(whippets, 혹은 히피 크랙, 웃음가스)’이었다. ‘휘펫’은 <이산화질소(Nitrous Oxide)> 성분의 기체로 영국에서는 합법적인 향정신성물질이다. 호흡질환, 발작, 뇌졸중을 야기할 수도 있다. 길버트와 조지는 길거리에 버려진 휘펫을 보고 마치 작은 폭탄을 연상했으며, 그 순간 우연히 니캅 차림의 무슬림 여인들을 보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123점의 <희생양> 연작(2013)이 탄생한다. 그 크기도 세로 2미터, 가로 3미터가 훨씬 넘는 대작들이다.
관람객은 이슬람적인 분위기에 ‘휘펫’을 작은 폭탄으로 여기게 됐다. 문제는 순수한 무슬림 들을 보면서도 폭탄을 지닌 테러리스트를 연상하는 비무슬림들의 선입관이다. 만약 이 작품의 배경이 프랑스이고 백인들이 등장했다면, 휘펫은 포도주 병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영국의 런던이 배경이더라도 백인들이 등장했더라면, ‘휘펫’과 폭탄을 연결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영국에서는 젊은 청년들이 파티에서 기분을 고조시키고자 휘펫을 사용하기도 한다. <희생양>연작 중 <휘펫(WHIPPETS)>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에는 젊은 청년들이 휘펫에 취해 미소 짖고 있다. 런던의 랜드마크인 대형 시계탑 빅벤이 파티가 무르익기 시작하는 시각인 <8시 45분>을 가리킨다. <가스(GASEOUS)>를 흡입한 뒤의 기분 좋은 상태를 나타내는 듯 꽃이 만발해 있다.
이번 전시의 유일한 삼부작(<Scapegoated. A triptych>)의 중심에 적혀있는 “이슬람은 진리가 아니다(ISLAM IS NOT TRUTH)”라는 문구가 시선을 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서구에선 이슬람 관련에 관한 발언 자체가 터부가 됐다. 그런데도 길버트와 조지는 그들의 예술을 통해 노골적으로 이슬람을 말하고 있다. 이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서구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그들은 꼭 이슬람뿐만 아니라 “다수의 기성 종교도 우리가 수백 년간 싸우며 쟁취한 자유를 가져가버린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래서 “이슬람은 진리가 아니다”라는 문장 옆에는 “교회를 단념하라”는 문장도 나란히 쓰여있다. 길버트와 조지는 이처럼 거짓으로 포장된 평온을 뒤흔드는 것도 예술의 역할이라고 본다. 이들은 항상 현실적 삶에서 발생하는 중요 주제와 자신들을 연결해 작품에 등장 시킨다. 즉, 그들의 몸은 바깥세계와 연결되는 일종의 연결고리다. 신체는 더 큰 신체인 외부의 일부일 뿐이다 (메를로퐁티). 현대는 도용예술의 등장과 가상현실적 환경으로 사진의 고유한 특성이었던 ‘리얼리티’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 또한 리얼리티를 가상적으로 만들기 위해 회화적 몽타주가 사용되기도 한다. 반면에 길버트와 조지가 회화적인 요소를 사용하는 것은 리얼리티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리얼리티와 관련된 사진의 기록성은 다른 예술에서는 볼 수 없는 강한 현실적 힘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위 <Scapegoated. A tryptych>(부분) 혼합재료 381×1963cm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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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희생양전>을 개최한 길버트와 조지
“좋은것과 나쁜것은 계속 바뀐다”
모든 작품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작은 병들은 무엇인가?
조지 __ 히피 크랙 (‘hippy crack’, 휘펫의 또 다른 명칭)인데, 3년 전 런던 거리를 산책하다가 버려진 히피 크랙의 빈 용기를 보았다. 순간적으로 작은 폭탄 같다고 느꼈는데, 그때 니캅을 입은 무슬림 여성이 지나갔다. 당시 경험이 이번 <희생양> 연작의 동기가 되었다.
거대하고 많은 양의 작품을 하는데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이러한 끊임없는 영감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조지 __ 우리가 살며 일하는 이스트 런던이 우리에게 영감을 제공한다.
길버트 __ 런던인들은 각각 특정한 방식으로 다른 문화를 표현하기에 언뜻 정신분열적인 것처럼 보인다. 다른 인종, 다른 종교, 다른 뿌리를 지닌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기 때문이다. 이곳에 산다는 것은 좀 더 관용적이고 포용적이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가 섞인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조지 __ 서로 다른 문화의 복합체인 이곳은, 그래서 지역적(국부적)이면서 동시에 글로벌하다.
길버트 __ 우리는 전통을 좋아하며 보수적이나, 경직된 도덕은 좋아하지 않는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계속 바뀐다. 보들레르는 “예술에서는 나쁜 발상조차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어느 것도 완전하게 굳혀질 수 없다.
당신들의 관심은 주로 ‘지금 이곳(hic et nunc)’에 집중되어 있는가?
조지 __ 비록 우리는 현실을 재현하지만, 모든 문화는 미래를 창출하기에, 우리 작품도 미래를 건설하고 미래를 조금 달라지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들의 작품은 지역적이면서도 글로벌하고, 스스로 보수적이라고 말하지만 당신들의 예술은 혁명적이다.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가벼움과 유머가 엿보인다. 당신들의 예술이 지나치게 양의적(兩意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길버트 __ 인생보다는 덜 양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당신들은 더 이상 퍼포먼스를 하지 않는가?
길버트 __ 퍼포먼스가 아니라 ‘살아있는 조각’ 혹은 ‘살아있는 작품’이다.
퍼포먼스와 ‘살아있는 작품’의 차이는 무엇인가?
조지 __ 우리의 삶이 ‘살아있는 작품’이다. 퍼포먼스는 잠시만 하는 것이지만, ‘살아있는 작품’은 삶 전체를 의미한다.
팡탱=심은록
길버트(사진 왼쪽)는 1943년 이탈리아 산 마르틴 데 토르에서 태어났다. 조지 패스모어는 1942년 영국 플리마우스에서 태어났다. 세인트 마틴 예술대학에서 만난 그들은 이후 ‘길버트&조지’란 그룹명으로 협업작업을 시작했다. 터너프라이즈(1986), Special International Award(1989), South Bank Award(2007)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