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의 民畵이야기] 백호. 그 고귀한 상징-中
‘강우방의 民畵이야기’ 첫 회에 이어 호랑이 그림을 통해 풍부한 상징의 숲, 민화를 조명해본다. 원초적인 미감을 다룬 민화는 일반적인 조형원리를 과감히 탈피함으로써 흔히 잘 그리지 못한 그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필자는 민화가 현실이 아닌 이상세계, 즉 영화된 세계를 그린 것이라고 강조한다. 호랑이 그림은 영기문의 집합체로서 ‘생명이 생성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 호랑이는 고대부터 산을 숭배했던 한국문화에서 전 국민적 경배의 대상이었으며, 산신(山神)의 위상을 차지했다.
호랑이는 산신(山神), 나라의 수호신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호랑이는 우주의 기운이 응집된 영화된 존재들인 사신(四神) 가운데 백호(白虎)임을 조형분석을 통해서 밝혀보았으나, 이 문제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고 인식의 문제이므로 좀 더 다루어보려 합니다. 이에 앞서 한국문화에서 호랑이가 차지하는 위상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바보 호랑이’로까지 폄하된 산신(山神)의 위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지난 회에 호랑이가 아기 호랑이들을 거느리는 도상을 다루었지만, 그 상징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미 호랑이와 아기 호랑이들이 장난치며 노는 정도로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식물모양 영기문(靈氣文)이 끊임없이 생명생성의 과정을 보여주듯이, 고대 조형에서 청룡이나 백호나 봉황 등이 항상 아기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생명생성 과정의 상징을 형이상학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대 작품들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으나 그 형이상학적 의미를 설명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용과 마찬가지로 백호도 위대한 생명력을 무한히 낳습니다.
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많다고 하여 <진주 호랑이>라고 부르는 도상과 흡사한 민화가 또 있지만 양식은 전혀 다릅니다. 일본 시즈오카 세리자와케이스케(靜岡市立美術館) 미술관 소장 <호랑이 가족>(상단 이미지) 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지만 그 상징적 표현은 매우 뛰어납니다. 즉 우선 눈을 보면 둥근 눈 안의 동공(瞳孔)이 다른 그림과 달리 3중(重)의 동심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무량보주를 웅변하는 것입니다. 눈으로부터 무량한 보주가 발산합니다. 여러 글에서 무량보주를 나타낸 용의 눈을 다루어온 것처럼 용의 속성을 지닌 백호의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의 줄무늬 영기문, 턱 밑의 보주와 파동, 견갑골 부근에 밀집한 보주들과 줄무늬 영기문, 무릎의 제1영기싹 영기문, 꼬리 끝의 무량보주 등 마치 지난 회 수록 작품들을 보고 흉내 낸 것 같지만, 어미 백호와 아기 백호들이 영기문의 집합체임을 더욱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입니다. 이 그림에는 소나무에 까치가 없습니다. 다른 호랑이 그림들에는 까치가 한 마리, 혹은 두 마리, 심지어 다섯 마리가 있거나 한 마리도 없는 경우도 있으므로 까치는 기쁜 소식 전해준다는 원래의 뜻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 필요불가결의 요소는 아닙니다. 오히려 호랑이와 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소나무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글씨로 보아 부적(符籍)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민화를 흔히 그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잘못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원근법의 무시, 대소(大小)의 극적인 대비, 불합리한 구도 등 조형의 원리를 무시한 그림입니다. 거기에서 생기는 익살, 대담한 구도, 동심 어린 표현 등 긍정적 평가도 따릅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따라야 합니다. 지난 회 수록 작품은 잘못된 그림이 아니라 원근법을 무시하고 대소 대비도 무시한 대담한 양식의 비현실적 그림으로 새로운 장르를 열어 보이는 ‘민화양식’이라 부르려 합니다. 그 개념은 연재하는 동안 정립될 것입니다. 민화는 현실을 잘못 그린 것도 아니고 현실을 익살스럽게 그린 것도 아닙니다. 민화는 첫 회에 분석한 것처럼 현실을 표현한 것도 아니고 현실을 도피한 것도 아닙니다.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처럼 일체의 표현원리를 무시하고 그린, 현실이 아닌 영화된 세계를 그린 것입니다. ‘영화된 세계’란 이상적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이상세계 표현에는 불교회화에서처럼 일반적 표현원리를 과감히 탈피함으로써 현실세계가 아니란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구려 무덤벽화나 불교회화나 민화를 통틀어서 다루고 있는 만큼 ‘민화양식’이라 일단 부르려 합니다. 그러므로 민화양식이란 사대부나 화원의 그림과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민화양식은 매우 풍성한 상징의 숲입니다. 그러나 사대부나 화원의 그림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상징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무덤벽화나 불교회화와 민화는 숭고한 상징의 숲이어서 앞으로 우리는 그 신선하고 아름다운, 그러면서 충격적인 상징의 숲을 거닐며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조형미술의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호랑이 가족을 보고 흔히 ‘자손번창’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영화된 조형이므로 ‘생명생성의 과정’을 표현한 숭고한 조형의 세계입니다.
이 어린이 그림 같은 호랑이 가족은 누가 그렸을까요? 어수룩해서 호랑이가 전혀 무섭지 않고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자세히 보면 못 그린 그림입니다. 그러나 세부를 살펴보면 앞에서 분석하며 설명한 그림보다 훨씬 더 영화시킨 그림임을 알게 되고 오히려 경이를 느낄 것입니다. 우리나라 호랑이 그림 가운데 유일하게 눈을 무량보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그림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영화(靈化)의 방법을 철저히 파악하고 그렸을까요?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어느 전문화가가 그린 것을 보고 흉내 내었을까요? 놀라운 것은 언뜻 비슷해 보여도 독창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동심(童心)의 세계에서 유전적으로 인간에게 잠재하는, 근원적인 진리의 표현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고구려 벽화에서 느끼는 경이를 민화들에서도 똑같이 느낍니다. 그러므로 민화를 연구하려면 고구려 벽화 연구가 선행돼야 합니다. 그러나 종래의 연구 성과로는 풀리지 않고 내가 해독한 고구려 벽화의 조형언어를 익혀야 합니다. 학교의 ‘교육과정’이란, 상상력을 상실하는 과정이고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의 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어버리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이루어진 조형미술의 올바른 연구는 인간의 무의식계를 넓히는 과정이고 영성(靈性)을 되찾는 과정의 작업들입니다. 그 근원적 조형정신이 화려하게 부활한 민화의 연구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호랑이는 산신(山神)입니다. 악마를 물리치는 위대한 신입니다. 석가모니나 예수가 악마를 퇴치하듯 호랑이는 악마를 물리칩니다. 그러나 세속적이 되어 잡귀를 쫓는 현세이익적 벽사의 기능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호랑이, 영기의 집합체
일본 구라시키민예관(倉敷民藝館) 소장 <눈이 네 개인 호랑이>(그림 5) 작품은 호랑이의 신격화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매우 훌륭한 그림으로 한국회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 합니다. 순수한 민화양식입니다. 놀랍게도 눈이 네 개이고 눈동자는 둥근 보주로 나타냈습니다. 눈이 네 개인 것은 중국 한대(漢代)에 방
상씨(方相氏)란 사람이 장례 때 악귀를 쫓았으므로 후에 가면(假面)으로 만들되 눈을 각각 두 개씩 네 개를 뚫었는데 그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입은 가능한 한 크게 벌렸는데 긴 혀를 강조하기 위하여 용의 입과 모양 같게 했습니다. 가슴에는 영기문이 있는데 채색분석 결과 붉은색으로 칠했습니다. 장례식 때 방상씨가 궁궐에서 왕릉까지 가는 길에 제일 앞에 서서 악귀나 잡귀를 쫓기도 하고, 왕릉에 도착해서는 관을 땅에 묻기 전에 먼저 흙을 파놓은 광에 들어가서 방상씨가 가진 창으로 네 귀퉁이를 쳐서 광 속 시신이 들어갈 자리의 악귀를 제거하기도 합니다. 그런 벽사의 강력한 조형을 호랑이의 조형에 응용한 것은 기발한 착상입니다. 그림은 기품이 있고 구도가 훌륭합니다. 반차도에 의하면 방상씨는 붉게 칠한 가면을 쓰는데 황금으로 4개의 눈을 만들고 검은색 옷과 붉은색 치마를 입고 곰 가죽을 걸친 채 창을 잡고 방패를 치켜들고 다닙니다.
그러면 호랑이의 실체를 살펴볼까요? 산악숭배 신앙에서는 우주의 중심이 곧 산입니다. 한국은 산이 많은 자연환경으로 인해 일찍부터 산과 산신을 숭배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산에 있으면서 산을 지키고 담당하는 신령(神靈)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물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정령이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 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종의 ‘산의 정령’입니다. ‘숲의 정령’이기도 합니다. 신체(神體)는 호랑이 또는 신선(神仙)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한국에서 산신신앙은 수렵문화 단계에 이미 출현했으며 이때 산신은 산의 일체를 관장하는 ‘자연의 주인’으로 인식했으므로, 신체인 호랑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산신 할아버지와 호랑이는 둘이 아닙니다. 일본 도쿄민예관(東京民藝館) 소장 <산신도>(그림 6)를 보면, 호랑이 몸에서 의인화(擬人化)한 산신이 생겨나고 백호에서 산신이 생겨나는, 산신과 호랑이가 하나인 멋진 그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랑이는 불화에서 신선 같은 존재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데 사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 같은 산신이 바로 곧 호랑이, 즉 영화된 백호입니다. 고대로부터 우리나라 국가제사의 대상 대부분이 산신이었습니다.《 후한서》〈 동이전〉에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하고 호랑이에게 제사 드리며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원래 고대의 산악숭배 신앙은 집단, 즉 국가·부족·마을 단위 형태의 신앙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로는 개인과 마을 단위의 신앙으로 변모해 호랑이가 전 국민적 경배의 대상이 되어 마침내 사찰에서 산신각이 멀리 떨어져 있다가 점점 감히 대웅전 옆에까지 다가갑니다. 마을마다 산신당, 산왕당, 서낭당, 성황당 등을 만들어 산신을 숭배하게 되어 우주 최고의 신이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최남선은 중국의 용, 인도의 코끼리, 이집트의 사자, 로마의 이리처럼 조선에서 신성한 동물의 으뜸은 호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호랑이는 조선 최대의 동물이며 조선인의 생활에 끼친 영향이 크니 그중 신화, 전설, 동화를 통하여 나타난 호랑이 이야기들은 설화세계 최고이며 호랑이 및 호랑이 설화에 대한 민족적 숭앙 또는 기호는 어느 틈에 다른 모든 이야기를 밀어내버렸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하여 한갓 벽사의 염원으로 축소되어 호랑이가 삼재부적에 나타나서 품격이 현세 이익적이 되어버려 맹수로서의 용맹성이 부각되었을 뿐 고차원으로 승화된 백호의 이미지를 상실해버린 것입니다만 민화에서 이처럼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백호와 청룡의 관계를 다룰 것입니다.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까치 호랑이> 채색분석(밑그림 및 채색분석–강우방)
채색분석할 때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눈=보주는 적색으로 영기싹은 생명의
싹이므로 연두색으로 칠하려고 노력한다.
① 처음으로 눈을 보주(寶珠)로 표현한다.
② 동공양쪽으로 면으로된 제2영기싹이 절대의
진리를 눈으로 표현한다.
보주에서 양쪽으로 발산하는 영기.
백호가 만물의 근원
두 눈 사이의 보주가 여래의 이마처럼 크다.
③ 수염. 보통 호랑이의 수염이 아니다.
④ 긴 혀 → 영기문
⑤ 얼굴과 가슴에 보주를 부여. 표범의 둥근 점이 아니다. 표범의 둥근 점이 보주가 되다.
⑥ 만물 생성의 근원
⑦ 꼬리 끝에서 시작하여 몸으로 얼굴로 차례로 화생(化生)
⑧ 동양에는 서양에서처럼 사조가 없다? 오로지 법고창신(法古創新)!
⑨ 온몸에 영기문을 부여한다.
⑩ 발가락과 발톱은 연꽃잎처럼 아름다운 영기문. 붉은 색조의 반구형은?
⑪ 갖가지 영기문의 집합체(集合體) ‹ 집적(集積) 보주·제2영기싹·제1영기싹(면·선)
연꽃잎 모양 영기문 …
3 <까치 호랑이> 종이에 채색 53×87cm 조선시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까치 호랑이> 채색분석(밑그림 및 채색분석–강우방)
① 이마의 큰 보주. 그 보주에서 발산하는 영기문이 뚜렷하다.
② 이마의 대보주에서 무량한 작은 보주가 생긴다.
③ 두 눈=두 보주에서도 영기문이 발산, 파동을 이루며 발산하기도 한다.
④ 이마의 곡선 일종의 파상문
⑤ 코, 콧구멍도 보주
⑥ 입은 앞에서 본 모양과 옆에서 본 모양과 함께 표현한다.
⑦ 입가에서도 용에서처럼 줄무늬 영기문을 발산한다.
⑧ 양 입가의 곡선에 맞게 같은 형태의 영기문이 파동을 이룬다.
⑨ 몸에도 줄무늬 유려한 영기문을 부여한다.
⑩ 빨간 보주들을 부여한다.
⑪ 호랑이와 표범의 무늬는 영기화(靈氣化), 다른 차원으로 승화된다.
⑫ 호랑이의 분노상: 영기가 극에 달하면 분노상을 띈다.
⑬ 채색분석에 의해 해석도 올바르게 하고 호랑이를
영기화생(靈氣化生)시킨다.
4 <까치 호랑이> 종이에 채색 19세기 (개인 소장)
5 <눈이 네 개인 호랑이> 종이에 채색 116×80cm (구라시키민예관 소장)
구라시키민예관 소장 <눈이 네 개인 호랑이> 채색분석(밑그림 및 채색분석–강우방)
① 혀를 길게 내밀 수 없으므로 입을 가능한 한
길고 크게 과장하여 변형시켜서 혀가 길게
보이게 했다.
② 왜 눈이 넷인가?
③ 혀를 길게 강조했다.
④ 용의 입과 백호의 입
⑤ 몸의 영기문
6 <산신도> 종이에 채색 103×71cm 19세기 후반 (일본 민예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