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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 아무나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2 (2004)

위 장용근 <도시채집-간판> 잉크젯프린트 100×150cm 2004 아래 최정화 <아무나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2004

도시의 풍경에서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간판을 비롯한 홍보물들. 이들은 모두 익숙해진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했다. 《월간미술》은 이를 매개로 한 작업을 통해 우리 삶의 풍경을 인문학적 시각으로 풀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예일대 동아시아학센터에서 도시건축미술에 대해 연구하는 필자는 일상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에 또 하나의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다. 눈에 띄는 차이를 발견하기 힘든 일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간판, 한국의 일상으로 들어오다

백승한 예일대 동아시아학센터 연구원

한국 도시의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흔히 접하게 되는 수많은 간판, 네온사인, LED 스크린, 전단지, 현수막, 포스터 및 각종 거리광고물들을 한곳에 모으면 어떤 시지각적 효과를 가져올까? 그리고 그렇게 조합된 광고물 이미지들을 가지고, 이제는 진부한 듯한 한국 도시의 ‘일상’이라는 화두를 다시 한 번 꺼낼 수 있을까? 사진작가 장용근과 작가 최정화는, 이처럼 간판으로 비롯되는 21세기 한국의 특수하면서 보편적인 도시와 일상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장용근의 <간판>(2004)은 수많은 간판 및 가로경관 이미지들로 구성된 포토 콜라주 작품이며, 최정화의 <아무나 아무거나 아무렇게나>(2004)는 작가가 직접 모은 ‘불법’ 현수막들을 대학로에 위치한 아르코미술관 외벽에 한시적으로 전시한 설치작품이다. 비록 표현 매체와 작업 방식은 상이하지만, 두 작가의 작품은 한국 도시경관의 특징적인 요소들 중 하나인 거리광고물을 주요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한다. 21세기 도시풍경, 일상생활,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의 접점에 대해 탐구하는 연재의 첫 에세이로서, 필자는 두 작가의 작품을 함께 읽음으로써 간판으로 뒤덮인 한국 도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차이와 반복, 역동성과 다양성, 그리고 일회성과 특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대구에 오랫동안 거주해온 작가가 직접 도시 곳곳을 답사하면서 찍은 가로경관 사진들로 구성된 장용근의 <간판>은 가로 1.5m와 세로 1m의 직사각형 프레임 속에 100장이 훨씬 넘는 도시풍경 사진이 들어있다. 간판으로 뒤덮인 한국 도시경관의 혼란스럽고 무정부주의적인 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장용근의 작품은 ‘대명보청기’, ‘한일사진관’, ‘롯데관광’, ‘주주뱅크’ 와 같이 거리를 걷다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동네 구석구석에 설치된 간판들에 새겨진 일상적 언어들로 구성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도시공간에 친밀함을 느끼게 한다. 한편, 빈 공간 없이 현란한 간판 이미지들과 메시지들로 빼곡히 채워진 직사각형 화면은 한국의 도시공간이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는 과도한 소비의 공간임을 암시한다.
도시에 대한 깊은 애착과 동시에 상업화된 도시공간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소외감이라는 양가적 감정이 묻어나는 작가의 <도시채집> 시리즈 간판은, 종종 비평가들에 의해 “욕망의 이미지”, “비일상”과 “값싼 키치”의 공간, “일탈의 이미지” 혹은 “무감각한 도시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작품으로 논의되어 왔다. 이러한 견해들의 이면에는 간판을 아름다운 도시미관을 해치는 “시각공해”, 순수한 건축입면을 침해하는 저속한 표피적 장식, 도시경험의 역동성과 진동이 증발한 공허한 기표, “사회적 권력의 표상”, 특수성과 지역성이 희미해진 “포괄적인 도시”, “부드러운 공해”, “환각의 미학” 등의 개념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후기 자본주의 체제 내 스펙터클 사회에서의 소비문화와 도시소외 현상에 대한 뿌리깊은 비판적 담론들이 존재한다.1 하지만 장용근의 작품이 만약 소비문화로 점철되어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비일상’의 공간을 표상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다 의미있는 ‘일상’의 공간이 과연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거꾸로 생각해서 온갖 종류의 간판언어들과 이미지들로 혼란스럽게 도배된 한국의 도시공간이, 비록 이상적이지는 않을지언정, 한국의 도시상황 속에서 불가피한 일상 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작품을 자세히 보면, 언뜻 무감각하게 반복되는 듯한 도시경관이 사실은 주어진 상업적 환경 내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들로 표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간판이 종종 소규모 간판업체에 의해 비교적 획일적인 방법으로 제작되는 한편, 장용근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간판 이미지들은 각기 다른 활자체, 평면 구성, 색채, 리듬 등에 의한 상업경관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활자체와 색채를 이용한 간판언어의 부분적 강조, 한글이나 영어나 한자와 같은 언어의 취사선택, 그리고 문자와 이미지를 조합하는 다양한 방식 등은 손님의 눈길을 끌기 위한 진부하고 기계적인 광고전략 이상이 아닐 수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업종과 사업규모에 따른 상인 각각의 미적 취향과 도시공동체에서 개인의 윤리성이 파편적인 형태로 여실히 반영되는 핵심적 경관 요소들이다. ‘롯데관광’과 같은 여행사 간판은 여타 장식없이 직사각형 간판 위에 업체 상호와 규격화된 상징을 비교적 평이하게 새겨놓은 한편, ‘시집못간 암퇘지’와 같은 동네 고깃집 간판은 미묘한 성적 뉘앙스를 재치있게 간판 언어로 표현하여 지나가는 행인의 눈길을 단번에 끌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처럼 간판이 각기 다른 디자인과 언어표현을 통해 구성된다는 측면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바로 그 지점을 통해서만이 한국의 일상 도시공간을 특징짓는 개별성과 특이성, 그리고 정서성과 도시의 역동성을 파악할 수 있다.
간판이 광고 전달의 수단인 한편 각 상인의 미적 취향과 정서성이 투영되는 접점이라는 사실은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일상생활의 다양성 논의와 맞닿아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저서 《철학적 탐구》 (1953)에서 “하지만 얼마나 많은 종류의 문장이 존재하는가?”라는 스스로 던지는 질문에 대해 “수많은 종류가 있다”고 답할 때, 그는 단순히 문장의 개수에 대해 논의하기보다는, 개인의 즉각적인 생각과 감정을 문장의 형식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다수성과 예측 불가능성, 즉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상의 다채로운 “삶의 형태(forms of life)”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2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독립된 단어가 단순히 명사인지, 동사인지, 혹은 평문인지, 명령문, 혹은 감탄문인지 구분하기 힘든 모호성은 그 단어의 사전적이고 규범적 의미보다는 일상 생활의 맥락에서만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장용근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겉보기에 균질화된 간판언어들은 한국 도시공간의 일상성을 탐구케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정보 전달 이상의 함의가 있다. 가령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피카소 미용실’ 간판이 “(바로 그) 피카소(!) 미용실(이구나!)” 유의 감탄문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기는) 피카소 미용실(입니다)”라는 평이한 문장의 축약형인지는 근본적으로 규정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간판을 마주하는 불특정 다수의 해독 방식은 간판을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사람들의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같을 수 없기에, 겉으로 보기에 진부한 간판의 디자인이나 언어표현은 항상 여러 주체에 의해 생성되는 임의성과 애매성, 그리고 즉각성과 창의성을 포괄한다.
장용근의 작품은 시각적 스펙터클을 넘어서 끊임없이 사라져가는 일상 도시 경험의 순간성과 특이성을 반영하며, 그가 현지답사를 통해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다양한 도시 경험의 시공간적 층위들을 2차원 평면에 압축적으로 투영시킨다. 장용근은 대체로 건물 외벽에 빛이 균일하게 투영된 정적이고 기하학적으로 안정된 순간들에 집중하는 한편, 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이라든지 인접 간판에 의해 생성되는 그림자와 같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순간들 역시 놓치지 않는다. 이는 작가가 그림자나 바람과 같은 환경적 조건들을 건물의 자율적 입면구성을 방해하는 요소이기보다는, 일상 도시공간의 감각적이고 교감적인 차원을 경험하게 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하였음을 나타낸다. 이처럼 장용근의 관심이 상업 도시경관이 체험되는 다양한 도시적 상황들에 있다는 점은 도시 경험과 근대성에 대한 논의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며, 이는 독일의 문예학자 발터 벤야민이 도시를 읽은 방식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영화감독 앨리스 아놀드가 자신의 다큐멘터리 영화 (2012)에서 언급하듯, 벤야민이 읽고자 한 도시 경험의 순간성과 특이성은 간판이 전달하는 ‘메시지’ 자체에 있기보다는, 가령 비가 오는 날에 간판이 아스팔트 바닥 물웅덩이에 반사되어 다가오는 ‘형식’, 혹은 미술사가 아론 비니거가 벤야민의 언어를 빌려서 말하는 “세속적 불빛(profane illumination)”에 있다.3
이러한 점에서, 장용근의 작품은 간판으로 점철된 한국의 도시풍경을 온전히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기보다는 일상생활의 역동성, 특이성, 차이와 반복, 유머, 정서성, 그리고 규율성을 그만의 미묘한 방식으로 담아내서, 보는 이로 하여금 한국 도시일상의 다층적 차원을 생각하도록 촉발하는 듯하다. ‘간판’이라는 제목의 본 작품은 따라서 분리 가능한 개별 사물로서의 간판을 지칭하기보다는, 간판과 같은 일상적 거리경관의 요소로서 특징지워지는 한국 도시공간에서 일상의 의미에 대해 편견없이 다시 한번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준다. 장용근의 작품은 한국 간판경관이 아름답거나 아니거나, 혹은 상인들끼리의 과도한 경쟁이 도시의 미관과 공공성을 해치거나 아니거나의 미적이고 윤리적인 판단 문제에 대한 해답을 즉각적으로 제공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작품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간판으로 도배된 한국 도시 일상의 가치에 대한 미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 대한 성급한 가치판단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류하게 하며, 그를 통해 사소하지만 경이롭고, 최정화 작가가 말하는 소비문화로 점철된 한국 도시 일상의 “눈이 부시게 하찮은” 순간들을 환기시켜 준다.

도시 일상 생활의 미묘한 차이와 반복
스스로를 “사물에 중독된 페티시스트”라고 소개하는 작가 최정화는, <아무나 아무거나 아무렇게나>를 완성하기 위해 버려졌거나 철거된 불법 현수막들을 시청이나 구청 등을 방문하여 직접 수집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수집한 불법 현수막들을 한국 근대건축의 거장 김수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르코미술관(1979) 외벽에 설치하였다. 붉은 벽돌의 외장재와 여러 개의 기하학적 매스의 유기적이고 리듬감 있는 접합이 특징이며, 또한 건축역사가 정인하의 표현에 의하면 “에워싸여져 있지만 끊임없이 연결되는 [내부] 공간” 디자인이 두드러지는 김수근의 시적인 건축작품은, 소위 한국의 팝아티스트 혹은 키치아티스트로 대변되는 작가 최정화에 의해, 비록 한시적이지만, 향락적이고 과도한 축제의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4 다소 도발적이고 긴 작품 제목이 암시하듯, 최정화는 누구나 (아무나)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물을 가지고 (아무거나), 일상생활 속에서 보고 느끼는 순간들을 작품이라는 형식을 빌려 갤러리 밖을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아무렇게나) 표현할 수 있음을 몸소 실천하여, 자칫 저급하고 저속한 상업광고로 여겨질 수 있는 현수막이 또한 예술적 표현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최정화는 뮤지컬 공연, 아이돌 콘서트, 지역축제, 옷가게 창고 정리, 세계문화유산 선정, 대리운전, 신간 잡지, 불법주차단속 등의 다양한 홍보와 광고 현수막들을 한 공간에 모음으로써, 그가 한 인터뷰에서 말하였듯이, 한국식의 “바글바글”한 도시문화와 “알록달록”한 색채감을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표현한다. 마치 부처님 오신 날 사찰 내 공중에 매달려 있는 알록달록한 연등들과 그 밑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무수히 많은 기도 쪽지를 연상시키는 그의 설치작품은, 김수근 건축의 표면을 거의, 그러나 (가령 크리스토와 장 클라우드가 (1975, 베를린에 설치)를 통해 보여준 것과는 달리) 건물의 표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뒤덮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의 설치작품은 거장의 건축작품인 아르코미술관과, 공연장과 상점들로 둘러싸인 일상적 공간인 마로니에 공원의 역동적인 도시 분위기를 여러 개의 흩뜨러진 현수막들을 통해 느슨하게 연결시키는 듯하다.
최정화의 설치작품에 같은 종류의 현수막들이 반복적으로, 그러나 서로 다른 배열과 접합방식 등을 통해 나타나는 점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경험적 다양성 측면, 다시 말하면 대량 생산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는 도시공간의 일상적 경험을 통해 펼쳐지는 차이와 반복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던져준다. 가령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에스티 로더 마스카라’ 광고 현수막은 적어도(필자가 관찰할 수 있는 한) 네 번 이상 반복된다. 그중 세 개는 같은 배열방향, 즉 광고문구가 시작하는 현수막의 왼쪽 부분이 아래로 내려오도록 설치되어있는 반면, 네 번째 현수막은 그 왼쪽 시작 부분이 위로 향해 있어서 보는 이의 시점에서 현수막이 180도 틀어지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런가 하면 뮤지컬 ‘여름밤의 꿈’을 홍보하는 현수막은 두 개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붙어있지만 미묘하게 다른 높이로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각 현수막은 다른 면들에 인접한 현수막들의 각기 다른 색깔, 위치 및 문자 등으로 인해, 그리고 현수막 바로 밑에 위치한 전봇대 전깃줄과 가로수 등의 환경적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반복보다는 차이의 효과가 더 크게 다가온다.
이처럼 최정화의 작품에 나타나는, 언뜻 사소해 보이는, 차이와 반복의 시각적 효과는 신유물론자 제인 베넷이 “동일성은 왜곡을 통해 반복된다”라는 주장을 통해 제기하는 문화산업 체제 내에서의 경험의 불확정성을 반영한다.5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기념비적 에세이 <문화산업>(1944)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베넷은, 그들이 1)대량생산 체제가 빈틈없이 완벽하다고 과장하는 경향이 있으며, 2)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생산된 제품 혹은 도시의 하부구조는 개개인의 고유한 방식으로 경험된다고 주장한다. 반복되는 공장라인의 제품 생산구조나 거리의 대형 스크린이나 TV화면에서 반복되는 광고 이미지는 각 에이전트의 제작이나 홍보 시스템에 따라 기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작동할 지언정 (그마저 베넷은 우연성과 불확정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제품을 소비하거나 이미지를 경험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은 광고의 메시지나 제품의 완전성과는 별도로, 각자의 삶의 궤적 안에서 선택과 소비를 자기 생활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인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최정화의 화려한 현수막 작품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우려했던 것처럼 시각적 스펙터클에 위압감을 느끼고 수동적 관찰자/소비자가 되었는지, 아니면 그러한 스펙터클을 자기화하였거나 단순히 무시하고 스쳐지나갔는지 등은 신중하게 생각해 볼 부분이다. 가령, 본 작품에 대한 몇 장의 기록 사진은 화려하고 다채로운 입면의 구성과는 상반되는 당시 마로니에 공원의 차분한 일상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무심한 듯 그의 작품을 쳐다보는 남녀 한 쌍의 연인, 작품을 등지고 (작품의 시야를 너무도 대담하고 극적으로 가리는) 새빨간 파라솔 밑에서 호떡과 쥐포 등의 간이음식 장사를 하는 아저씨, 그 옆에서 일회용 컵에 담긴 다방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 그리고 작품 앞 도로 아스팔트 바닥에 큼직하게 새겨진 “일방통행 차 없는 거리” 안내글자 등….
흥미롭게도, 이러한 기록 사진들은 작품의 화려함보다는 그 주변의 평온하고 심지어 무료해 보이는 일상생활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 길거리에 예술작품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감탄하며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이유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로버트 무질이 말한 것처럼 도시 곳곳에 설치된 기념비들은 그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바쁜 일상 생활 내에서 종종 무심히 지나치는 경우가 많을 뿐만 아니라, 도시학자 제인 제이콥스의 주장처럼 도시는 마치 갤러리에서 관객들이 팔짱을 끼고 주의깊게 바라보는 예술작품이 될 수 없다.6 무심함이 최정화의 설치작품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가 될 수 있다면, 현수막에서 뿜어져나오는 시각적 현란함이 온전히 보는 이를 현혹게 하여 궁극적으로 자율성을 잃게 한다는 아도르노식의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은, 조금 더 열린 시각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다음 호에서는 지금까지 논의한 한국의 도시와 일상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키는 한편, 간판으로 점철된 한국 도시경관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작동하는 주체는 누구인지, 그리고 그러한 주체(들)의 개입에 의해 펼쳐지는 힘의 관계성은 무엇인지를 비디오 작가 박준범의 작품 (2004)를 통해 이야기고자 한다.●

1 Theodor Adorno and Max Horkheimer, , 《Dialectic of Enlightenment》, translated by John Cumming(New York: Herder and Herder, 1972): p.162-163; Michel Serres, 《Malfeasance: Appropriation through Pollution?》 Translated by Anne-Marie Feenberg-Dibon(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1): p.41; Jean Baudrillard, 《Simulacra and Simulation》, translated by Sheila Faria Glaser(Ann Arbor: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4): p.90; Neil Leach, 《The Anesthetics of Architecture》(Cambridge: The MIT Press, 2000): p.46-47; Rem Koolhaas, in 《S, M, L, XL》, edited by Rem Koolhaas and Bruce Mau(New York: The Monacelli Press, 1995): p.1250-51
2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lated by G. E. M. Anscombe(Malden: Blackwell Publishing, 2001): p.23.
3 Alice Arnold, (58 min, Icarus films, 2012); Walter Benjamin, , 《Reflection: Essays, Aphorisms, Autobiographical Writings》, edited by Peter Demetz and translated by Edmund Jephcott(New York: Schocken Books, 1978): p.87; Aron Vinegar, 《I am a Monument: On Learning from Las Vegas》(Cambridge: The MIT Press, 2008): p.31.
4 Jung In-ha, 《Architecture and Urbanism in Modern Korea》(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3): p.92
5 Jane Bennett, 《The Enchantment of Modern Life: Attachments, Crossings, and Ethics》(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p.126
6 Robert Musil, , 《Posthumous Papers of a Living Author》, translated by Peter Wortsman(New York: Penguin Books, 1995): p.62; Jane Jacobs, 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New York: Vintage Books, 1992): p.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