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 안 경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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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경 수 | An Gyungsu
안경수는 1975년 출생했다. 최근 도시 변두리의 건조한 야경을 그린 〈요란한 밤(a loud night)〉(피비갤러리, 2019)를 선보였으며 이와 같은 도시 또는 도시 외곽의 사이에 방치된 익명의 공간을 그려왔다. 작가는 2009년 서대문구 창천동의 한 재건축 현장에서 도시의 불완전한 풍경의 겹을 목격한 이후, 줄곧 재개발 현장의 가림막이나 방어벽에 그려진 그림, 혹은 공원이나 아파트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이의 풍경에 주목해 왔다. 작가는 이러한 지속적인 회화 작업을 통해 도시 일상의 보편적 풍경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을 관객에게 낯설게 환기시킨다. 주요 전시로는 〈막(Membrane)〉(NCCA-National Centre for Contemporary Arts, 니즈니 노브 고로드, 러시아, 2018 / 트라이엄프 갤러리, 모스크바, 러시아 2017), 〈Seoul Focus 25.7〉(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17), 〈별의별(Stars of stars)〉(경남도립미술관, 2017), 〈퇴폐미술전〉(아트 스페이스 풀, 2016) 등이 있으며 2015년 종근당 예술지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이다.
안경수는 재료의 질감과 성향을 탐구하며 그 흔적을 캔버스에 쌓아 올린다. 얇은 지층들이 아크릴의 물성과 만나 쌓이고, 그 표면은 작가가 조용히 조우해온 시간을 머금고 있다. 작가가 지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섬세하게 쌓아 올린 화면은 작가가 만나는 도시의 불완전한 풍경의 겹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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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시를 써도-안경수의 매체성과 타블로
최재원| 독립큐레이터
동양화의 스며듦으로 체화한-차츰 스며들지만 지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섬세하게 쌓아 올린 프로세스를 서양화의 매체성으로 구현하고, 사진의 얇은 표면성처럼 위장된 찰나적인 착시와 같이 표현하는 혼용성의 타블로야말로 안경수 작가의 고유한 그 무엇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양화의 지반 위에 서양화를 수용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작업들은 회산(繪山) 김종태(金鐘泰, 1906~1935), 월북화가 이쾌대(李快大, 1913~1965), 모후산인(母后山人) 오지호(吳之湖, 1906~1982)와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1913~2001) 등에 걸쳐 나타난다. 특히, 김종태의 1929년잦ㄱ <노란저고리>의 경우 서양화지만 유화를 수묵화처럼 다루는 점에서 흥미로운데, 그것은 유화라는 서구적 매체를 마치 종이에 먹을 다루듯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서양화는 1920년대 일본이라는 창을 통해 받아들여지는데, 예를 들어 누드와 스틸라이프 같은 개념은 수묵화 시대에는 없었던 그 무엇이었다. 새로 들어온 사조로서 정물화의 경우, 태소(泰素) 주경(朱慶, 1905~1979)은 정물로 데생을 했고, 토수(土水) 황술조(黃述祚, 1904~1939)는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들어가 처음 아그립바(agrippa)를 그렸다. 미술은 분명 서구적인 어떤 것이었고 서구적 대상을 처음으로 파악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소재를 취득하고 양식을 받아들여 훈련하는 것을 넘어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의 이념에 입각한 조선 향토색론에 따라 향토적인 소재들을 다루는 소허(小虛) 서동진(徐東辰, 1900~1970) 등의 작업이 있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작가들은 서구의 추상적인 미술 사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단순히 향토색론이라는 관점에서 타자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서구인이 아니지만 서구인이 되고자 하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동양화의 매체적 특징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 먹을 머금고 옅어지는 힘의 밀도와 소밀(疏密)이 달라지며 오는 장력의 차이들, 먹과 붓의 장력이 서로 작용하며 힘이 불규칙하게 가해질 때 매번 달라지는 지점들은 동양화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디지털 매체적 환경에서 아날로그적 지점들로 새롭게 발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손의 힘과 신체성이 그때그때 어떻게 들어가느냐도 그 순간에 장력이 어떻게 들어가느냐, 붓이 뭉치고 뭉그러졌느냐 이런 상태에 따라 그 비백이 달라지는 우연성이라든지 매번 확정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성이라든지 하는 동양화의 요소들은 서양화의 매체에 인습화된 우리들에게 디지털 매체적 재현성 vs. 변별력 있는 아날로그(anlog)와 에러(error)의 차원을 새로이 대질하게 할 수 있다.
안경수의 작업은 나에게 서양화의 매체를 통해 동양화와 드로잉이 주는 유동(流動)적인 영감을 부추기곤 한다. 유동성(fluidity)을 동양적으로 환치해서 표현한다면 유(柔)와 강(剛)의 개념이라고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의 속성은 부드럽고 움직이듯 진동을 가진다. 무언가 유동성이 있는데서 가능성과 잠재성(disposition)이 생겨난다. 그런 유동성은 또한 출렁이고 얽힐 수 있으며, 여기에서 혼성화 가능성의 여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게 유동해야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할 때, 안경수의 작업은 인습적인 동양화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매체들의 각기 다른 시제와 <비동시성의 동시성(ungleichzeitigkeit)>을 보여주기 때문에 서로 침투하고 출렁인다. 동양화는 종이로 스며들며 번진다. 작가에게 동양화로 체화(embodied)한 인습은 남아 있지만, 그는 서양적 매체로 이를 구현한다.
서양화 중 유화는 아크릴을 마치 (캔버스 위로) 쌓아 올리듯 작업하지만, 작가는 마치 동양화처럼 지극히 얇은 지층들을 두터운 시간으로 쌓는 것이다. 작가가 인용하는 풍경은 시간에 사건(events)이 촉발된 풍경이다. 매체가 보는 사건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디지털 사진은 찰나적으로 연산되어 출력된다. 아날로그 사진은 노광된 인화지에 화학적으로 흑화되거나 정착된다. 매우 찰나적인 시간에 노출된 필름이지만 천천히 화학적 반응으로 흑화되며 떠오르는 암실 현상 트레이 속의 사진처럼 그의 시제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안경수 작가에 대해 말한다면, 세계와 본질(sub-stance)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보다 매체와 표면(sur-stance)에 대한 아티스틱 리서치(artistic research)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몇 해 전 안경수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 작가는 동양화가 아닌 영상이나 매체로 확장 내지는 결합된 방식으로 하는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작업이, 캔버스 위에 구상성이 주어지지만 질감이나 회화 그 자체의 기분이나 뉘앙스로 전달하는 느낌이 좋았다. 그것이 사진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의 작업에서 사진의 매체성이란 모든 자연광과 인공광이 전복되는, 밤으로의 착시 속에 징후적으로 인용되고 있을 뿐이다. 작가가 흥미롭게 다루고 있는 것은 세계의 모사가 아닌, 동양화로부터 서양화, 사진 매체로 혼성적으로 설계되는 질료의 레이어링과 흔적들이다.
질료(matter), 실재(reality), 매터링(mattering)
동양화로 작업을 해오던 작가는 지필묵(紙筆墨)을 강요하는 등 이데올로기화된 동양화로부터 의식적으로 거리두기를 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비(非)동양화 매체와 물성을 어떻게 다루는지 연습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부터였다. 작가에게 캔버스는 아직 낯설기만 했다. 작가는 콩댐지, 은박지, 켄트지 등 다양한 종이를 모두 섭렵했다. 동양화로 체화한 작업 프로세스에서 비비기도 하고, 문대기도 하고, 거칠게도 해야 하는 담지체로서 종이는 점차 미약하게 (낯설게) 느껴져 갔던 것 같다. 작가는 점차 캔버스에 아크릴을 올리거나 바르는 등의 아티스틱 리서치 과정에서 많은 습작을 남기게 되었다.
매체에 대한 나의 질문에 흥미롭게도 작가는 적묵법(積墨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적묵법, 즉 글레이징(glazing) 기법이란 물감을 묽게 희석하여 이미 채색한 그림 위에 얇게 덧칠하는 방법으로 동양화와 유사하다는 점을 말이다. 작가는 차츰 스며들지만 그러한 번짐으로 엷게 쌓아올리는 레이어링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마치 유화나 아크릴 물감을 쌓아 올려가듯 그렇게 변하는 색감과 깊이감을 조절하고 두텁게 엷게 걸쳐 넓게 바르는 방식을 모두 시도해보는 것이다. 색깔을 올리는 방법을 시작한 것은 2012년이고 어느 정도 말랐을 때 다시 쌓아갈지에 대한 방법을 깨우치고 나서는 좀 더 쉽게 구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동양화의 차츰 스며듦으로 체화하여 지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섬세하게 쌓아올린 프로세스를 서양화의 매체성으로 구현하는 부분이 흥미롭다고 작가에게 말한 적이 있다. 동양화처럼 아주 엷은 색에서 계속 쌓아올리지만 엷은 표면, 미세한 지점의 질감, 미세한 붓터치로 드러나는 납작함, 밋밋함, 편평함은 그렇게 의도된 것이다. 작가에게 리얼리티란 세계의 모사가 아니라 장면이 갖고 있는 질감을 어떻게 사실성 있게 그릴 수 있을까 하는 매체성과 아티스틱 리서치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서양화에서 일종의 캔버스로 비유되는 광목의 경우, 합판 프레임 위에 광목을 씌워 작업할 때 화학적인 베이스를 그 위에 바르는 과정에서 광목이 견디지 못하고 합판에 흡착되는 경우가 있다. 작가의 예술적 연구는 이러한 질료와 성향을 탐구하면서 탈구(dislocated)된 매체 혼성적 징후를 작업의 프로세스로 수용한다. 표현되고 형상화하는 어어 이전에 질료와 성향의 흔적이자 신음들인 것이다. 그렇게 캔버스에서는 가능하지만 종이에서는 표현되기 어려운 차이들도 유희하기 시작한다. 뿌리기 흩날리기, 흘려 내리기가 그것이다. 캔버스에 물감이 스며드는 게 아니라 레이어링을 하게 되면 붓자국으로 채워 나가면서 스며든 느낌이 나는데, 작가는 “종이에 물감이 스며들며 고착되는 것이 마치 물감이 서서히 뿌리를 내리는 듯한 느낌이라면, 캔버스에 아크릴은 물감이 쌓여있는 자리에서 밀려나고 부유하지만 마르면서 점착되어가는 느낌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매체와 질료에 대한 혼용성이야말로 안경수 작가의 고유한 타블로가 될 것이다.
● < 월간미술 > vol.420 | 2020.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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