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nses: 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호흡하다


2019.11.15~20019.12.01 토탈미술관


글: 김정연 | 미술비평

최수앙 (사진 오른쪽 두 번째) 레진에 유채, 혼합재료 23.5x32x85cm

최수앙 <언더 더 스킨(Under the Skin)>(사진 오른쪽 두 번째) 레진에 유채, 혼합재료 23.5x32x85cm

발터 벤야민은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열병을 앓던 어릴 때 기억을 촉감적으로 기록했다. 피부에 남아있는 열기나 어머니의 따듯한 보살핌이 결국엔 쓰디쓴 물약으로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등의 감각 경험이다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여러 감각적 경험을 통해 사고를 구성하고 주체를 형성한다. 질 들뢰즈는 감각이란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세상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데카르트 철학을 비판하며 등장한 현상학적, 감각의 미학은 21세기에 들어와 그 개념과 의미에 대한 성찰이 재고되어야 할 시점을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달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전은 감각이 기계로 대체되고 신체가 미디어로 구현되는 디지털 시대에 감각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또한 전시의 부제 ‘과잉과 결핍’이라는 화두가 20세기 자본주의 체제가 양산한 정치적, 사회적 소산일 뿐만 아니라 감각이 경제적인 가치로 교환되는 우리 시대를 비춘다는 점에서도 시의성을 지닌다.

21세기에 들어와 인간의 감각은 선형적 진화를 벗어나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이하고 있다. 가상세계와 현실의 경계가 흐려짐으로써 감각의 실체마저 의심받는 상황에 이른 오늘날 이번 전시는 예술가들이 반응하는 혹은 기억하는 감각의 여러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기억을 소환하는 감각에 대한 것이다. 물론 감각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기억은 구축되고 변질될 수 있으며 극히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미디어 발전 이전에는 개체들의 동질감을 형성하는 일종의 매개체로서 기억 혹은 경험은 지금과 다른 교환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준 (사진 가운데 테이블 영상설치) 90x180x80cm 2019 인터넷을 연결되어 관람객의 발화에 반응한다

이준 <입의 향연(The Bouquet of Mouth)>(사진 가운데 테이블 영상설치) 90x180x80cm 2019 인터넷을 연결되어 관람객의 발화에 반응한다

싱가포르 작가 애들린 쿠에의 작품 <속삭임(당신을 기억하는 100가지 방법)>은 감각이 소환하는 기억, 혹은 기억이 소환하는 감각에 대한 기억이라는 다중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 냄새를 통해 기억을 소환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가는 라벤더 냄새를 통해 자신의 유년기를 떠올리고 싱가포르의 역사를 기억한다.

신체를 통한 감각과 기억, 그리고 유사한 경험을 통해서 되살아나는 감각경험의 기억은 수많은 데이터로 신체 안에 저장된다. 신체와 유전자에 각인되어온 데이터의 양은 기술미디어 시대에 들어와 인간의 저장 능력치를 넘어서게 되었다. 짧은 시간 처리해야 하는 데이터의 양이 급증함에 따라 감각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데이터는 스쳐갈 뿐이다. 그 결과가 순간적인 기억상실의 상태로서 폴 비릴리오는 이를 ‘피크노렙시’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준의 <입의 향연>은 과잉 생산되는 데이터와 그로 인한 감각의 결핍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스마트폰이라는 테이블 위에 포털사이트와 인터넷을 통해 만들어지는 정보들은 감각을 자극하는 맛있는 요리처럼 구현되지만 현대인에게 감각적 경험은 허락되지 않는다. 김지민의 작품 에서 서로를 반복적으로 모방하는 두 마리 앵무새의 대화처럼 인간의 감각적 경험이 개입할 틈은 없어 보인다.

감각의 확장, 몸의 확장을 위해 발전한 미디어는 결국 주관적인 감각을 객관화하고, 무한대의 공유와 교환만 반복되는 거대한 장이 되었다.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정보는 끊임없는 생산과 유통을 반복하고 인간의 감각 기능은 그것을 체험하거나 저장하지 못한다. 강승희의 작품 <날아가는 화살은 과녁에 도달하지 않는다> 역시 기술미디어를 통해 경험하는 허구들이 마치 실제처럼 받아들여지는 이 혼돈의 상황, 그리고 그 상황을 감지하지 못하는 무감각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미디어의 발전과 전파의 가속화가 인간의 지각 촉수를 무뎌지게 한다는 비릴리오의 이야기처럼 인간의 감각은 더 이상 기억을 소환하지 못한다.

어쩌면 전명은의 사진 연작 <나는 본다>가 이번 전시의 핵심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감각 기능 일부를 상실한 인간의 신체 역시 무감각의 상태로 간주할 수 있을까? 작가는 외부와의 소통 이전에 자신 안의 감각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소통의 가능성과 그 풍부함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감각하지 못하는 무력화된 신체는 어떤 기억이나 행동을 유발하려는 욕구, 의지마저도 모두 상실해버린 상태이다. 오늘날의 정보화 속도는 소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배설되는 음식물처럼 다른 층위의 의미나 기억을 생성하거나 저장하는 일련의 과정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초고속으로 지나가는 정보들을 따라 충혈된 불면의 눈을 비비며 쫓아가는 현대인이야말로 무감각의 상태를 증명하는 가장 적나라한 예라고 할 것이다.

이번 전시가 감각의 과잉과 결핍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기술미디어 등장 이전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기억마저 부재한 시대에 태어나고 성장하는 디지털 세대는 어떻게 감각을 정의할지 궁금해진다. 더욱 확대되고 가속화될 정보 과잉의 시대에 과연 잃어버린 것, 혹은 결핍을 돌아볼 틈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언제나 시대의 가장 예민한 안테나가 되는 예술가들이 그 감각을 결코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The Senses: 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호흡하다》
2019. 11. 15 ~ 12. 01
토탈미술관

●  < 월간미술 > vol.420 | 2020.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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