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눈에는 이, 이에는 눈
아트스페이스 풀 5.28~6.28
신현진 미술비평
아트스페이스 풀의 전시 <눈에는 이, 이에는 눈>은 ‘미술작품의 가치는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상정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평소 제도비판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필자에게는 여간 흥미로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어서 기획자는 질문에 왜 굳이 ‘상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지를 논하면서 현대미술의 현상이 상대적인 조건 아래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그 이유로 제시했다. 그가 상대적인 현상에 주목한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모더니즘의 거대서사가 몰락한 이후의 예술은 사회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예술은 초월적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체험세계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는 의미이다. 초월적 진리가 더 이상 예술에 규범을 제공할 수 없는 현 사회에서 이제 예술을 관찰하는 방법은 상대적 현상이 되거나 (그래서 소통의 정치로부터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맥락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 윤리적인 태도로 간주된다. 이제는 ‘예술이 무엇이다’를 밝히는 것이 개인으로서의 주체에게는 중요한 한편 그것이 진리라고 강제하는 메커니즘은 사라졌다. 단지 우리는 주어진 혹은 선택한 맥락에 따라 특정 예술이 존재하는 방식의 흔적을 따라갈 뿐이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예술에 대한 가치판단은 작가와 관객 등 개개인의 의무이자 권리이며 판단을 내리는 시공간인 미적 체험은 상대적 판단 기준자가 된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함께 시작한 제도비판은 사회적 맥락이 개입된 예술의 현상에서 예술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설득하려는 시도였다. 이정헌의 기획 또한 미적 체험을 제도비판의 방식으로 실험하는 시도로 보인다. 그는 예술작품의 가치생산 현상을 관찰하기 위해 전시를 일종의 실험장치로 전환했는데 작품 제작의 조건에서 자본, 교환 가치를 빼고, 작가-관객 사이의 소통을 작품의 가치 생산의 변수로 끌어들였다. 즉 관객은 작가에게 작품의 출발점이 될 선물을 주고 작가는 선물에 대한 답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기획자가 보기에 현대미술은 사회화된 현상에도 불구하고 “작가와 사회의 상호연관관계는 사라진”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그가 제시한 관객이라는 변수는 예술이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닐 수 없다. 예술작품이 보여지고 읽히는 소통의 사건과 내용은 후속 소통으로 연결될 때에만 사회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를 위해 기획자가 고안한 장치는 ‘증여’다. 관객이 작가에게 선물을 증여함으로써 생기는 상호 의무관계는 능동적인 미적 체험을 야기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제도비판적 실험이다.
미적 체험을 전시한다는 것. 안타깝지만 이 흥미로운 미적 체험의 제도비판은 실험 결과를 보여줄 수 없었다. 전시장에서 기획의도는 슬라이드 쇼를 통해 언어로만 제시되었고 관객이 증여한 선물이 알리바이로 놓여 있을 뿐 전시(작품이)라는 미적 체험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증여라는 사회학 용어를 사용해서 암묵적인 상호호혜작용을 강제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작업 20점 정도씩을 걸어 놓은 것으로는 상호작용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관객과 작가의 관계가 작품의 가치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실험의 결과는 가시화되지 않았다. 더구나 어느 작가는 ‘정확한 등가관계’의 교환을 강조했기 때문에 교환가치를 빼자는 의도를 이해하기나 했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다른 작가는 관객의 증여에 대하여 예술이 아닌 물질적인 보상을 약속했다. 그리고 나머지 작가는 참여관객이 말동무가 되어주기만을 바랐다. 작가의 작품세계가 관객이나 소비자에 의해 변화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실험에서 관객과의 체험을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거나 입장을 밝힐 필요는 있었다. 혹시, 이 작가들이 관객은 자신의 예술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위 이윤호 <Untitled>(맨 오른쪽) 잉크젯 프린트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