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유승호 머리채를 뒤흔들어
페리지갤러리 6.4~8.8
고동연 미술사
“이는 아무 목적이나 의미 없이, 무엇에 대해서도 여념이 없이 생각과 마음을 모두 비운 상태로 그저 멍하니 작업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2015 개인전 도록 《머리채를 뒤흔들어》 중에서)
의식을 최대한 배제한 상태에서 창작이 가능한가? 1920-30년대 초현실주의자들부터 절제되지 않은 몸의 움직임에 따라 우연적으로 물감이 캔버스에 안착하기를 바랐던 폴록에 이르기까지 창작 과정에서 자신의 의식을 배제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술가들은 각종 ‘잡념’에서 벗어나 최대한 다른 차원의 정신적 상태에 이르려는 강한 욕구를 갖게 마련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차원’이 반드시 초월적이거나 해탈의 경지일 필요는 없다. 실제로 우연적인 효과를 염원하는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기존의 도덕적인 권위주의나 아름다움에 대한 선입관도 배제하고자 했다.
반복적인 행위를 통하여 ‘멍 때리는’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 유승호의 이번 개인전에서도 종교와 성이라는 테마가 부각되었다. <죽이도록 주기도문>에서와 같이 해탈의 경지에 해당하는 종교적 테마와 <머리채를 뒤흔들어>에서와 같이 강남의 뒷골목에 있는 ‘살롱’문화를 연상시키는 성적인 장면들이 조선시대 풍속화나 문인화를 연상시키는 수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와 같이 종교나 성을 무의식의 상태와 연관시키는 것은 이성적인 인식의 간섭이 배제된 엑스터시(ecstasy) 상태가 종교적인 행위나 성적인 관계를 가질 때 인간이 경험하는 정서적인 상태와 유사하다는 추측에서 나온 듯하다.
전시에서도 종교와 성이라는 상반된 테마가 나란히 소개되었다. 유승호 특유의 낙서 산수화 수법으로 그려진 <죽이도록 주기도문>에서 관객은 무엇보다도 작가가 글씨를 반복적으로 쓰는 과정을 상상하게 되고 이어서 의미 없는 글자들로 그득 채워진 화면을 보면서 엑스터시의 경지에 이른 작가의 창작과정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주기도문을 반복적으로 외울 때 우리의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과 유사하다. 반면에 <머리채를 뒤흔들어>에서 즉흥적으로 그려진 선들과 소재를 통하여 엑스터시의 상태를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즉 전자가 반복적인 과정에 의하여 유발되는 의식의 부재 상태를 노린 것이라면 후자는 결과로서의 ‘성’과 연관된 소재가 암시하는 이성과 도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쯤 되면 유승호의 작업에서 작가가 말하는 “멍 때리는 상태”가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되는지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화면을 그득 메운 글씨들은 작가가 무의식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극도의 반복적인 행위를 기록한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서는 작가의 수고와 노력에 대하여 감탄하는 것 이외에 보다 적극적으로 작업과 지적인 교류를 하는 일이 쉽지 않다. 또한 관객이 원거리에서 본 풍경과 가까이서 본 글씨들 사이의 괴리를 깨닫게 되면서 일종의 희열을 경험할 수는 있으나 이 조차 반복적일 수밖에 없다. 유승호 작업의 메커니즘을 아는 관객에게 그 희열은 한시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기도문과 <머리채를 뒤흔들어> 시리즈에서 보여준 해학적인 요소들은 소재를 통하여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문제는 개인전의 작업들이 장식적으로 변하면서 실상 멍 때린다는 느낌보다는 이전 작업들에 비하여 훨씬 의식적이고 명확하게 작가의 미적 취향과 기술을 드러내는 점이다. 자칫 흥미로운 강남판 조선 풍속화 정도로 여겨질 위험도 있다. 따라서 작가 스스로 반복적인 행위나 해학의 미를 즐기는 것만큼이나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발할 수 있는 다양한 매체와 구현방법을 고안했으면 한다. 올드 보이의 귀환에 앞서 더 많은 변신과 고민을 기대해 본다.
위 유승호 <죽이도록 주기도문> 종이에 잉크, 금박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