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윤석남 ♥심장
위 윤석남 <종소리> (앞의 작품) 혼합재료 2002, 아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윤석남 개인전
서울시립미술관 4.21~6.28
김미정 미술사
지난 30여 년간 줄곧 여성문제에 천착해온 윤석남(1939~ )의 회고전이 서울시립미술관 1층 홀에서 열리고 있다. 1980년대 중반 민중미술운동으로 시작된 한국 여성주의 미술은 산업화의 약자인 여성 노동자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여 점차 여성적 경험과 그 표현의 구체화로 이어졌다. 이견 없이 윤석남 화업의 결산은 곧 한국 여성주의 미술사를 조감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자칫 사회운동의 한 분파로 축소되고 말았을 페미니즘 미술이 시적인 함축과 문학적 서정성을 겸비한 윤석남의 열정에 의해 한층 풍부하게 펼쳐져왔다는 데 또한 화단과 비평가들의 평가는 일치하고 있다.
<윤석남 ♥ 심장>으로 간결하게 명명된 이 전시는 1980년대 화가의 초기작과 여성주의 미술운동이 구체화되던 시기의 자료들, 어머니 연작과 역사 속 여성을 다룬 설치작품들, 문학과 윤석남 미술의 관계를 보여주는 섹션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윤석남의 초기작에서부터 이미 아마추어를 넘어서는, 화면을 장악하는 힘과 분명한 주제의식이 드러나 있었다. <여성과 현실전>과 <시월전>에 관한 자료들은 1980년대 활발했던 여성주의 미술운동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게 정리되어 있다. 마흔, 결혼생활의 헛헛함을 메우기 위해 뒤늦게 그림을 배웠다고 해서 윤석남이 화단의 변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별 소득 없이 주류 남성들의 패거리 화단 정치에 소비되지 않은 것이 외려 다행일 수도 있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윤석남은 자주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주제를 길어 올렸다. 서른아홉에 홀로된 어머니를 추억하기 위해 작가는 낡아 버려진 목재들을 주워다 이어 붙였다. 폐목처럼 거칠게 조각난 삶을 통합해낸 어머니의 견고한 모성에 대한 아름다운 헌사이자 기념비였다. 이후 윤석남은 중산층 여성의 정체성 불안에서 여성성의 본질, 모성의 문제를 탐구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 <호랑이의 꼬리(Tiger′s Tail)>에 출품된 <어머니의 이야기>는 여러 변주를 거쳐 손이 길게 늘어난 여인상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 모성은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에서 피 흘리는 거대한 진홍빛 심장으로 구체화했다.
모성의 끊임없는 신화적 재구축과 인간애로의 확장. 이는 지난 30년간 윤석남의 미술을 한 구절로 압축한 말이다. 모성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굴곡이 많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모성은 더욱 처연하여 무엇을 보태기도 허물어버리기도 어려운 정서적 영역이다. 어머니의 헌신은 미술뿐 아니라 수많은 문학적 텍스트로도 쓰였는데 소설가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의 프롤로그에서 어머니를 성모의 이미지에 중첩했다. 윤석남은 여성성을 병든 세계를 품어 안는 베풂과 희생의 미덕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바리공주 설화를 모성의 은유로 시각화했다. 윤석남의 여성주의 작품세계가 자생적이든 이후 학습을 통해 영향을 받은 것이든, 윤석남의 신화적 설화나 역사를 구성하는 방식은 미국 페미니즘 미술과 대조를 이루고 있어 흥미롭다. 주디 시카고(Judy Chicago)를 위시한 1970년대 과격한 서구 페미니즘 미술가들도 상실된 역사 속 여성을 되살리고 신화 속 여신의 이미지를 끌어내 사용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칼리나 이슈타르처럼 공포와 그로테스크함으로 여성 심리의 불안정성이나 몸의 비천함, 양육과 파괴의 이중성을 표현했던 서구의 예와는 달리 윤석남의 바리공주는 명백하게 효와 복종, 양육이라는 한국적 유교 윤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성주의에도 국적이 있는 것인지, 기실 바리데기 신화가 전통적 남성 이데올로기를 되풀이한다는 점에서 윤석남의 작품은 성 정체성의 전복을 꿈꾸는 여성주의와 가부장 이념으로 구축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위험한 경계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이 문제는 1993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어머니의 눈>에 맞춰 쓴 <모성, 역사 그리고 여성의 자기진술>에서 여성주의 사회학자 조혜정이 완곡하게 지적했던 것으로, 결국 중요한 것은 체험적 모성성의 실상과 작가의 자기 진술이라고 저자는 강조했다. 이 지적은 매우 중요한데, 언젠가 고백한 것처럼 딸의 방해를 받을까 심지어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림에 몰두했다는 화가의 열정적 자기애와 어머니의 희생적 삶에 대한 향수는 이율배반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윤석남의 일련의 우아한 작품에서는 상충하는 이데올로기와 선언이 슬쩍 봉합된 모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03년 <핑크룸>은 화가가 내면을 열어젖힌 것으로 해석되곤 하는 작품이다. 날카롭게 박힌 가시 때문에 결코 앉을 수 없는 화려한 의자들, 붉은색 구슬은 무의식 속 여성의 분열과 상처를 초현실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윤석남의 방에서는 초기의 회화만큼 그 복잡미묘한 여성의 리얼리티가 전해지지 않는다면 왜 그런가.
국문학자 권보드래는 식민지시대와 해방기, 1950년대 약진했던 여성성은 1960년대 이후 후퇴했다고 했다. ‘신여성’, ‘자유부인’과 ‘아프레 걸’이 풍미하던 팜므 파탈 여성유형은 민족의 자력에 끌려 현모양처와 희생자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 재현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한국 페미니즘은 그 시조인 나혜석 때에 가장 선명하고 처절했다. 이러한 페미니즘의 역조는 1990년대 이후 공감이라는 힐링 풍조와 맞물려 한층 부드러워졌다. 국내에도 꽤 알려진 《만들어진 모성》의 저자 엘리자베스 바탕테르(Elisabeth Badinter)는 “나는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여성의 본성보다는 여성들이 지닌 각기 다른 수많은 경험을 더 선호한다”고 했다. “여성은 만들어진 성”이라고 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언급이 너무 진부하다면 “세상의 성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흑과 백으로 인종을 나누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다”고 한 유명한 트랜스젠더 여성 CEO 마틴 로스블랫(Martin Rothblatt)의 주장도 상기해볼 만하다. 나 역시 경험적으로 모성은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불확실하며 불안정하고 게다가 불완전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요는 사회적 계층과 젠더 역할의 차이에 따른 각자의 개별적 체험이 문제이다.
이미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 윤석남에 대한 수많은 헌사가 있으므로 모성의 재현에 대한 나의 불편함이 화가의 작품세계에 흠집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평생 페미니스트로 불리고 싶다”는 윤석남은 그 존재 자체로 울림과 무게가 있다. 전시장에는 확실히 여성 관객이 많았다. 미술관을 찾는 이들이 주로 여성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여학생 단체 관람객들의 진지한 표정에서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보았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전시장 벽 한쪽에서 한 올 한 올 머리카락이 뻗어 올라간 그로테스크한 윤석남의 <자화상>이 메두사처럼 강렬한 응시의 빛을 관객에게 던지고 있다. 그 날 푸른 시선에 압도되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