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함경아 Phantom Footsteps
국제갤러리 6.5~7.5
홍지석 단국대 연구교수
샹들리에가 등장하는 함경아의 큼지막한 자수 그림들의 제목은 “What you see is the unseen(당신이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이다. 이 제목은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너무 당연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화가가 화면 위에 찍은 점 하나도 뭔가 다른 것을 지시(함축)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가시화함으로써 비가시적인(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화가의 통상적인 작업이다. 물론 “What you see is what you see”를 외치며 그 ‘어떤 것’을 화면에서 축출하고 거의 사물에 가까운 작품을 제시하고자 했던 옛 시도들은 예외로 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작 “What you see is the unseen” 또는 “Needling Whisper, Needle country”로 명명된 함경아의 근작들에서 그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작품 자체의 분석을 통해서 이 작품의 심층적인 의미를 해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함축한다고 보기에 이 작품들은 너무 평평하고 얄팍하다. 그 한 땀 한 땀 수놓은 비단 자수, 알록달록하고 반짝반짝한 이미지들은 매혹적이지만 막상 그 이미지들로부터 화가가 공언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일은 이미 시작 단계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어쩌면 그 작품 안에는 “보이지 않은” 어떤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속 편할 것이다. 작가가 굳이 “What you see is the unseen”이라는 제목을 택한 데에는 사연이 있는 셈이다.
내가 보기에 작가가 공언한 ‘보이지 않는 것’은 작품 안이 아니라 작품 바깥에 있다. “수다스럽다” 또는 “과잉이다”라고 할 만한 많은 정보가 있다. 모두 작가가 직접 우리에게 전달한 것들이다. 그 정보들을 열거해보기로 하자. 1)이 작품들은 북한의 자수공예가들이 완성했다. 2)작가가 여기저기서 수집한 이미지와 텍스트들로 제작한 도안을 중간자를 통해 북한으로 보냈고 북한 공예가들이 그 도안을 자수로 구현했다. 3)작품 제작의 구체적인 절차, 경로는 밝힐 수 없지만 간혹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작품이 압류되거나 실종된 적이 있다. 4)몇몇 작품은 문구(이를테면 Are you lonely?, Imagine!)가 숨어 있다. 이것들은 냉전시대 삐라를 예술적 메시지로 변용한 것이다. 북한 공예가들도 그 메시지를 접했을 것이다. 5)흔들리는 또는 추락한 샹들리에의 이미지는 권력, 이념, 담론의 불완전성을 나타낸 것이다. 등등
이 정보들을 종합하면 함경아는 작가적 실천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북한, 북한인민들, 북한의 공예가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것은 우리(관객)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유령과 같은 것인 까닭이다. 유령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곁에 머물며 때때로 출몰하여 우리를 위협한다. 마치 북한처럼 말이다. 그 보이지 않는 유령의 흔적을 잡아내는(떠내는) 일이야말로 함경아의 근작들의 과제다. 그 근작들의 전시회 제목은 “유령 발자국(Phantom Footsteps)”이다. 이렇게 본다면 함경아는 상징(개념)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지표(흔적)의 수준에서 보이지 않는 것(실재)에 관여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도래한 실재는 자못 생생하다. 전시장에서 연작 가운데 하나가 마치 설치작품처럼 공간 안쪽으로 들어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작품 뒷면과 만날 수 있다. 여기에는 유령, 아니 살아 숨 쉬는 인간 행위-맺고 당기고 밀고 누르는 행위들-의 궤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러니 작가가 공언한 ‘보이지 않는 것’은 작품 안도 작품 바깥도 아닌 작품 뒷면(배후)에 있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위 함경아 <당신이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섯 개의 도시를 위한 샹들리에> 북한 주민 손자수, 중개인, 걱정, 검열, 나무 프레임 등 2013~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