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TOPIC <격자적서신>중국에 상륙한 예술혁명가들
Lettres du Voyant
Joseph Beuys × Nam June Paik
중국 상하이 하우아트 뮤지엄에서 백남준과 요제프 보이스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1월 20일 개막해 5월 13일까지 〈견자적 서신(LETTRES DU VOYANT: Joseph Beuys × Nam June Paik 见者的书信:约瑟夫 · 博伊斯×白南准)〉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 전시는 제54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와 2016년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을 역임한 하우아트 뮤지엄 윤재갑 관장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전시로 하우아트 뮤지엄 공식 개관전이다. 독일을 무대로 실험적인 전위미술 운동을 이끌었던 두 주역의 작품을 직접 경험한 상하이 현지 미술 관계자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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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상륙한 예술 혁명가들
유정아 | 미술사
19세기 말 상하이는 중국이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일차적인 통로였다. 중국인들이 사실상 외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조계지로 몰려들면서 중국인과 서양인이 만나는 공간으로서 근대 상하이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푸둥 지역은 황푸강의 동쪽으로, ‘서양 귀신들’이 들어와 놀던 상하이 와이탄 조계지와는 달리 오랫동안 변두리로 남아 있다가 1990년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 경제를 담당하는 허브 역할을 하는 경제 특구로 거듭났다. 푸둥 지역에는 현재 외국계 은행과 투자회사, 물류회사, 유수 기업의 연구개발센터, 고급 호텔과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 화려한 고층 빌딩들 사이에 위치한 하오미술관(昊美术馆)에서 요제프 보이스와 백남준의 전시 ‘투시자의 편지’(Lettres Du Voyant, 见者的书信, 2018. 1.20~5.13)가 열리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랭보(Arthur Rimbaud)의 편지를 인용한 이 전시는 총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960~80년대 백남준의 행위미술, 비디오, 멀티미디어 작품들과, 요제프 보이스와 백남준의 협업작품들, 그리고 보이스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다수의 사진과 영상자료, 실물자료, 다큐멘터리 등의 아카이브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들
모든 대상을 눈에 보이는 현상과 다르게 관찰할 수 있는, 곧 미지의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투시력을 지닌 예술가, 시인 랭보는 1871년 5월 13일과 15일, 각각 스승과 친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자신을 ‘투시자(voyant)’라고 불렀다. 투시자는 선지자 혹은 예언자와는 다르다. 랭보의 ‘투시자’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천부적 능력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구성요소를 찾아나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랭보의 편지 속 구절처럼, 시인이 되고자 하는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전적인 인식”을 토대로, “자신의 영혼을 탐색하고, 이를 조사하며 시험하고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는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로서, “자기가 발명한 것이 느끼고 팔딱거리고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자이며, 궁극적으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는 자”이다.
요제프 보이스와 백남준이 지금도 살아있다면, 시인 랭보가 제시한 투시자는 바로 자신들이라고 유쾌하게 선언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1층 전시장에서 마치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백남준이 우리 인류에게 가져다 준 선물인 비디오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아날로그 텔레비전의 프레임 속에 네온과 각종 오브제들을 구성하여 인간의 얼굴을 형상화한 <네온 TV: 버튼>(1990), 오래된 모니터 속에서 촛불이 은은히 빛나고 있고 붓다가 그것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붓다>(1996), 고깔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온몸 곳곳에 모니터와 전자장치, 금속 등을 탑재한 휴머노이드 로봇 <로봇 피에로>(2000) 등의 작품들이, 아직은 백남준의 이름이 생소한 중국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이어 어둡고 캄캄한 방에 들어서면 여러 대의 스크린이 여러 방향으로 분산시켜 투사하는 빛과 환영적인 이미지들을 만나게 된다. 이 중첩된 스크린들이 쏟아내는 영상 이미지에 매료된 관객들은 신기한 듯 여러 번 멈춰 서서 화면을 바라본다. 다중 모니터와 카메라, 폐쇄회로들의 복잡다단한 배치 속에서,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과 <바이바이 키플링>(1986)의 유쾌한 음악과 춤들이, 주파수를 변형시켜 생성해낸 전자영상 신호들, 그리고 형형색색의 영상화면들과 함께 경쾌하게 다가온다.
전시장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백남준과 요제프 보이스의 우정의 기록들은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특히 독립된 공간에서 큰 화면으로 다시 보게 된 <코요테 Ⅲ> (1984) 퍼포먼스에서 이루어지는 두 사람의 만남과 교감은 전시 주제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설정이었다. 도쿄의 소게쓰 홀에서 벌어진 이 퍼포먼스에서 두 예술가는 각각 검은색과 붉은색의 피아노를 맞대고 서양 고전음과 동물의 소리가 만들어내는 기이한 하모니를 들려준다. 언뜻 들으면 두 사람이 각각 서로 다른, 그래서 결코 어울리지 않을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마치 재즈의 즉흥 연주처럼 서로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음을 알게 된다.
더불어 이번 전시에서 독일 감독 안드레아스 파이엘(Andreas Veiel)의 다큐멘터리 <보이스(Beuys)>(2016)를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요제프 보이스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라는 명성답게, 영화는 보이스에 관한 푸티지 장면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며 관객들로 하여금 예술가 자신의 말과 표정을 직접 듣고 보게 만든다. 영화 속에는 평상시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자 벗은’ 보이스의 모습도 등장하고, 그가 다른 이들과 날선 논쟁을 벌이거나 혹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어딘가 당황하거나 난처해하는 표정들도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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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곧 혁명이다.
2층에서 만나게 되는 요제프 보이스의 전시는 1층 전시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백남준의 미디어 작품들이 온갖 시청각적인 감각을 자극하면서 관람객들을 매료시켰다면, 보이스의 전시는 관람객 자신이 적극적으로 대상에 다가가 꼼꼼히 읽고 관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전시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동안 미술관 측에서 소장해 온 작품들을 기반으로 세심하게 조사하고 연구해 온 노력을 실감할 수 있는 방대한 양의 문헌과 시각자료들이 준비되어 있다. 마치 고대 박물관처럼 체계적으로 배치된 아카이빙 자료들 앞에서, 우리는 보호 유리 상자 앞으로 다가가 커다란 돋보기를 들고 대상을 일일이 세밀하게 조사하는 고고학자가 되어야 한다.
전시 주제는 ‘모든 이는 예술가이다’, ‘예술의 확장 개념’, ‘사회조각’, ‘플럭서스와 해프닝’ 등 보이스가 제시했던 주요 개념 혹은 활동별로 구분되어 있고, 관련된 각종 사진, 회화, 선언문 같은 시각자료들이 벽을 따라 빼곡하게 채워져 있으며, 전시장의 내부공간은 <비트린(Vitrine)> 시리즈로 알려진 유리 진열장이 다수 배치돼 있고 그 안에 그가 사용했던 일련의 오브제들, 안내 책자, 선언문, 엽서, 가방, 상자, 장미꽃, 펠트 등이 보관되어 있다. 예술과 삶의 일치를 꿈꾸며, 개인 각자가 지닌 에너지와 창조력을 통해 보다 이상적인 휴머니즘을 실현하고자 했던 요제프 보이스의
예술세계가 기존의 회화나 조각과 같은 전통적 장르와는 다르기 때문에, 관객들이 이에 선뜻 다가가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아보였다. 전시는 이를 충분히 고려한 듯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별도의 문서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사실 요제프 보이스의 전시 현장이 다소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것에 비해, 전시 개막일 하루 전에 상하이의 괴테하우스에서 열린 강연회의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뒤셀도르프 미술관 관장 그레고르 얀센(Gregor Jansen)은 요제프 보이스의 주요 개념들을 자세히 소개했고, 중국의 예술청년들은 상당히 깊은 관심을 보였다. 지난 혁명의 시기에 중국 미술계가 부르주아 예술을 배격하고 예술의 공공성, 혁명성, 사회성을 추구했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현재 중국 청년들이 요제프 보이스의 예술세계에 보이는 깊은 관심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을 통한 대중교육, 사회혁명, 공공토론과 사회참여 등은 개혁개방 이후 여러 모순에 당면한 중국 미술가들이 새로운 예술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주제들 중 하나이다.
그날의 뜨거웠던 토론과 논쟁을 떠올리면서, 나는 2층 요제프 보이스의 전시장이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자료 제시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강연과 토론이 열리는 ‘사건의 현장’이 된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고민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가 그 자리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조용했던 미술관은 어느 순간 요제프 보이스가 꿈꾼, 예술과 일상이 만날 수 있는, 나아가 그 힘이 혁명으로 전화하는 현장으로 변모할 수 있지 않을까. 박제가 된 미술작품이 아니라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 개인의 창조력을 이끌어내고, 이를 새로운 사회구성의 힘으로 만들어내고 싶어 했던 그의 예술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전시에서 만난 요제프 보이스와 백남준의 생애와 작품들을, 우리가 지나치게 현실의 삶과 유리된 것으로, 혹은 다가서기 힘든 신비주의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랭보는 ‘투시자’로서 시인의 길이 초현실적이거나 환영적인 것이 아니라 결국 ‘일하는 자’로서 예술가의 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 세 예술가가 보여주고 있는 공통분모, 즉, 일상과 예술이 맞닿아 있는 곳, 그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힘, 현재 상하이 푸둥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투시자의 편지’가 미지의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어쩌면 의외로 간단한 것일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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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아 |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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