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in Jazz 11 – 비극으로 장식한 장엄한 복고주의
1990년 뉴욕 존스 비치 극장. 그날 마지막 출연자로, 이제 삶을 대략 1년 밖에 남기지 않은 재즈계의 황제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가 무대 위에 오르자 음악팬들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뮤지션들은 무대 앞을 메우기 시작했다. 마일스는 힙합 비트에 록의 강렬한 디스토션 사운드를 깔고 그 위에서 즉흥연주를 시작했다. 그의 최신음악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음악을 더 이상 재즈라고 칭하지 않았으며 단지 ‘흑인음악(Black Music)’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무대 뒤편. 야외로 이어진 코트에는 농구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한 청년이 그곳에서 홀로 집중하며 자유투를 연습 하고 있었다. 마일스보다 먼저 무대에 올랐던 이 스물아홉 살의 청년은 오로지 농구공을 림 안으로 넣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를 본 한 기자가 물었다. 모두들 마일스의 새로운 음악을 궁금해 하는데 당신은 궁금하지 않으냐고. 그러자 이 청년, 윈턴 마살리스는 여전히 림만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저런 음악엔 관심 없어요.”
마일스의 퓨전 음악에 대한 윈턴의 이러한 냉소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미 9년 전 약관 20세에 자신의 첫 음반을 발표하던 당시부터 이 당돌한 청년은 자신의 아버지뻘인 ‘살아있는 재즈의 역사’ 마일스 데이비스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물론 마일스에 대한 비판은 그가 재즈-록으로 급선회한 1969년부터 동년배의 뮤지션, 평론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재즈의 배신자로 모두들 마일스를 지목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력적이었던 마일스에 비해 인공호흡기를 차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채 침상 위에 누워있는 ‘정통’ 재즈의 실상은 그들의 비판을 한낱 푸념 내지는 질투로 들리게 만들었다. 1970년대가 끝나갈 무렵 기존의 재즈는 더욱 노쇠했고 그래서 그 진영에서 이탈한 연주자들도 슬금슬금 전기 사운드와 펑크(funk) 비트를 빌려 쓸 수밖에 없었으며 더욱이 그들이 일제히 비난하던 마일스가 건강상의 문제로 일선에서 종적을 감추자 퓨전에 대한 비판은 기력도, 상대방도 모두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퓨전과 전통주의의 격돌은 재점화되었다. 1981년 마일스가 5년 만에 재즈계로 복귀했을 때 그 반대편의 대변인은 자신을 “위대한 전통에서 왔다”고 천명한 샛별 윈턴이었다. 그는 하드밥의 ‘사관학교’였던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의 재즈 메신저스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냈으며, 퓨전과 정통을 오가며 활동하던 허비 핸콕(Herbie Hancock)은 자신의 어쿠스틱 사중주단에서 윈턴을 간판 주자로 내세웠다. 윈턴은 최근 10여 년간 사람들에게 들려지던 재즈는 모두 사기며 가짜라고 말하면서 아방가르드 재즈와 퓨전재즈를 모두 재즈의 영토에서 몰아낼 것을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세기가 바뀔 무렵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된 초기 재즈에서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의 역사를 재즈의 본령으로 삼고 그 전통을 되살리자는 ‘왕정복고운동’(재즈 평론가 뤼시엥 말송의 표현)을 전개했다. 이 느닷없는 복고주의는 그의 빛나는 재능을 통해 설득력을 얻었다. 1984년 그는 관현악이 함께한 발라드 음반〈 환락가의 꽃들 (Hot House Flowers)〉(컬럼비아)과 레이먼드 레퍼드가 지휘하는 내셔널 필하모닉과 함께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CBS 마스터워크스)을 동시에 발표해 클래시컬과 재즈 양 부문에서 한꺼번에 그래미를 손에 쥐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전통주의에 강력한 권위를 부여했다.
특히 과거의 스탠더드 넘버만 연주한다는 세간의 비판(그 대표적인 논객은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Keith Jarrett)이었다)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만으로 채운〈 장엄한 블루스〉는 뉴올리언스의 전통적인 장례음악을 끌어와 퓨전음악의 재즈에 대한 시해(弑害)를 알렸던 장송곡 <재즈의 죽음 (The Death of Jazz)>을 통해 전통주의의 논리를 비극적으로 연출했으며 음반표지에는 앙리 마티스의 연작〈 재즈〉중의 대표작인 <이카루스>를 실어 속절없이 추락하는 재즈의 비운을 상징했다.
이 비극은 영리한 연출이었다. 이미 윈턴은 자신의 열렬한 추종자들을 이끌고 있었으며 이때 성장한 소위 ‘영 라이언’(주로 1960~70년대 출생한 전통주의 재즈 뮤지션)들은 적어도 20세기가 저물 때까지 20년간 재즈계를 지배했다. 하지만 이제 중년이 된 이들은 전 세기의 지위를 잃은 채 다양한 재즈 분파의 하나로 물러났다. 이 복고왕정을 퇴위시킨 것은 더욱 냉혹해진 21세기 재즈의 상업주의였다. 그러니까 진짜 비극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황덕호 재즈 칼럼니스트
윈턴 마살리스
<장엄한 블루스 The Majesty of the Blues> (Columbia/ CK45091)
윈턴 마살리스 6중주단: 윈턴 마살리스(트럼펫), 토드 윌리엄스 (소프라노, 테너 색소폰), 웨스 앤더슨(알토 색소폰), 마커스 로버스(피아노), 레지널드 빌(베이스), 헐린 라일리(드럼)/ 게스트 뮤지션: 테드 라일리(트럼펫), 프레디 론조(트롬본), 마이클 화이트(클라리넷), 대니 바커(벤조) 1988년 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