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필라델피아 Cobi Moules
미국 태생의 작가 코비 몰스(Cobi Moules)는 사실적으로 묘사한 풍경화에 자신을 등장시킨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들’이다. 각기 다른 표정과 포즈를 하고 있는 코비 몰스‘들’을 하나하나 보다 보면 그의 회화 속 풍경은 어느새 퍼포먼스의 무대가 된다. 월리를 찾아야 할 것만 같은 작가의 유머가 느껴지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성소수자 집단을 향한 애정이 담겨 있다. 풍경화 작업과 함께 소개하는 드로잉, 초상화를 통해 광활한 자연에서 발견한 신(god)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하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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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부활한 허드슨 리버 스쿨의 풍경화
글 : 서상숙 |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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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몰스(Cobi Moules, 1980)의 페인팅 작업은 홀로 산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카메라와 삼각대, 그림도구와 캠핑 용품을 차에 싣고 미국의 거대한 산들을 오르는 것이다. 그는 인적이 드문 산이나 계곡과 호숫가 등에 텐트를 치고 작업 아이디어가 완성될 때까지 여러 날 머문다. 한 장소를 시간과 계절을 달리 해 여러 번 찾아가기도 한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고 작업에 확신이 생기면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한 후 무선 셔터를 들고 자연을 배경으로 다양한 플레이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물에 들어갈 때는 방수가 되는 지퍼락 백에 무선 셔터를 넣는다. 그러곤 오롯이 홀로 신이 창조한 자연의 신비를 바라보는 모습, 바위 위에 앉거나 서고 눕거나 계곡 혹은 호수에서 물놀이를 하는 모습, 흰 눈으로 덮인 광활한 평야에서 뒹구는 등 다양한 놀이를 하는 셀피를 수백 장 찍는다. 그의 페인팅에 퍼포먼스 요소가 삽입되는 과정이다. 그 사진들은 며칠 혹은 몇 달이 걸리기도 하는 캠핑여행 중간 중간 들른 호텔에서 컴퓨터에 입력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작업실에서 그는 풍경 속에 자신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배열하는 포토샵 작업에 들어간다. 그의 페인팅 작업은 포토샵을 끝낸 이미지들을 캔버스 위에 프로젝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러 번의 프로젝트와 수정이 끝나면 아웃라인을 그리고 본격적인 페인팅에 들어간다. 젯소를 바른 후 오랜시간의 샌딩으로 화면을 최대한 매끄럽게 하는 작업도 중요한 과정 중 하나다. 인물들을 먼저 블로킹해 놓고 그 다음엔 하늘, 땅의 순서로 블로킹이 끝나면 화면의 뒤쪽인 하늘을 완성하고 화면 전면으로 나오면서 그려낸다. 작업의 마지막 단계는 아주 작은 크기의 인물들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 인물들은 셀피로 찍은 다양한 포즈의 작가 자신으로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다. 대형작품은 6개월에서 1년까지 걸리며 항상 작은 크기의 작품과 드로잉 작업을 병행한다고 한다.
코비 몰스 작업의 출발점은 ‘허드슨 리버스쿨(Hudson River School)’의 그림들이다. 허드슨강 화파는 19세기(1825~1875년경) 뉴욕주 북쪽에 위치한 허드슨강 일대를 그린 일련의 풍경화 작가들을 일컫는 미국 최초의 미술운동이다.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의 작가들이 광대한 신세계의 풍경에 압도되어 그린 작품은 18세기 낭만주의(Romanticism) 화풍인 ‘서브라임(The Sublime)’을 미국에 소개했다.
숭고미라는 뜻의 ‘Sublime’은 작품을 감상하는 이에게 두려움에 가까운 깊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는 시각적 효과를 의미한다. 허드슨강 화파가 미국의 광대한 자연에서 본 것은 ‘신(God)’이었다. 신 앞에서인간은 나약하게만 느껴졌다. 아름다움뿐 아니라 재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빛과 하늘과 자연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들은 작품 속에 작가 자신 혹은 로케이션에서 마주친 인물 혹은 동물들을 거대한 자연과 대비되도록 아주 작게 그려 넣었다.
영국에서 이민 온 토머스콜(1801~1848)을 창시자로 프레데릭 애드윈 처치(1826~1900), 알버트 비에르슈타드(1830~1902), 토머스 모란(1837~1926), 애셔 듀란드(1796~1886) 등이 주요 작가로 이들의 작품은 미국인들의 신세계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면서 당당하게 하나의 화풍을 형성해 나갔던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작가, 코비몰스는 캐츠킬, 화이트 마운틴 등 허드슨강 화파 작가들이 올랐던 산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처럼 산과 나무와 계곡 그리고 하늘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집어넣는다. 다만 한 개의 이미지가 아니라 여러 개의 이미지가 집단으로 등장한다. 같은 옷을 입은 동일한 이 인물들은 마치 단체로 캠핑을 온 듯 청바지에 티셔츠, 야구모를 쓰고 파란 하늘과 호수, 단풍이 흐드러지는 밝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소풍을 즐긴다. 어두운 색과 강렬한 빛을 이용한 서브라임이 그의 작품에서 18세기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와 에마뉘엘 칸트(Immanuel Kant)가 규정한 ‘미(The Beautiful)’로 전환되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작가는 2004년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주립대학(San Jose State University)에서 학사 과정을 마친 후, 2010년 보스턴미술관학교(School of Museum of Fine Art, Boston)와 터프스대(Tufts University)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마쳤다. 당시 보스턴 미술관의 주요 소장품인 허드슨강 화파의 작품들을 직접 보고 미술사 수업을 통해 알게 된 작품의 배경은 그의 풍경화 시리즈의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허드슨강 화파가 가진 신에 대한 경외심과 종교적 배경은 성적 정체성으로 갈등을 겪고 있던 그의 관심을 끌었다. 성장하면서 학습했던 종교적 순수성, 순결성, 신에 대한 복종과 희생 등의 개념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말하지 못했던 그에게 커다란 내적 고통이었다. 가족들의 절대적 가치였던 기독교 신앙은 그를 “비자연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코비 몰스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한 트랜스 남성이다. 수술과 약물치료를 병행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으나 가족들은 그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자연을 통해 신을 느끼던 허드슨강 화파의 그림처럼 그는 성전환된 자신의 모습을 풍경화에 그려 넣음으로써 신과의 화합과 도전을 시도한다. 한 명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이미지는 신 앞에 복종해야 하는 모습이 아닌,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평등해야함을 당당하게 일깨우고 소외된 퀴어 집단의 존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작가의 용기 있는 시도이다.
풍경화와 더불어 그는 자신의 성전환 과정을 그린 드로잉 시리즈 〈Bolding〉과 〈Beards〉,〈Let’s Get Physical〉 등을 작업하며 성전환된 자신의 신체를 기록하고 있다. 또 최근 작가는 새로운 초상화 시리즈 〈확증으로서의 초상화(Portrait as Affirmation)〉를 시작했다. 퀴어들의 신청을 받아 그들이 보내준 사진을 보고 그리는 10.795×7.62츠 이하의 소형 유화 작업이다. 아주 작은 이 작품들은 작가가 퀴어들에게 보내는 벅찬 사랑과 관심이다. 소형 붓으로 마치 소중한 아기를 다루듯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작가는 그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위로하며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 같은 의도는 프레임까지 직접 짜 작품의 일부로 포함시킬 계획을 갖는 등으로 증폭되고 있다.
작가는 이 시리즈가 LGBTQ 커뮤니티에 가해지는 현정부의 지속적인 공격에서 비롯했다고 밝힌다. 미국 현정부는 이들의 권리를 박탈하기 위해 법을 바꾸거나 새로운 법을 상정하고 있으며 현재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의사들이 트랜스젠더 환자를 거부하도록 하게 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공격이 “엄청난 충격이며 비인간적”이라고 밝힌다.
그는 현재 2021년 가을 개최할 뉴욕 전시를 위해 대형 페인팅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물론 미국의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끝난다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현재진행중이어야 할 보스턴 드로잉 전시 역시 무기한 연기되었다고 한다. 혼자 거주지와 작업실이 갖춰진 집에 살고 있는 작가는 지난 두 달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필자와의 인터뷰도 이메일로 진행되었으며 사진도 작업실에서 직접 찍어 보내주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펼쳐지는 완벽한 하늘과 자연이 순식간에 보는 이를 압도하는 코비 몰스의 작품은 사실 21세기 미국의 적나라한 풍경이다. 그의 풍경에는 꿈처럼 아름다운 미국의 자연은 파괴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의 삶 역시 신의 사랑 안에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침묵 속에서 고발한다. 그리고 그의 풍경화 속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는 작가의 모습은 신이라함은 복종과 단죄의 신이 아닌 보편적인 자비와 사랑의 신이어야함을 일깨운다.
● < 월간미술 > vol.425 | 2020.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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