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선의 달콤한 작업실 15
가로등이라는 심장
작업실 대문 밖은 내가 다녀본 것 중 가장 좁은 골목이었다. 찻길과 이어지는 통과도로였기에 이 외진 골목길을 오가는 행인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말 그대로 쓸쓸한 골목길일 뿐이다. 길목에서 환한 빛을 뿌리는 가로등이 없었다면 골목길이 있는 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검은 바다에 홀로 서있는 등대를 만난 것 같다. 길 찾는 모든 이에게 공평한 빛을 주는 자비로운 존재. 이것이 인간애의 근본이 아닐까? 옅게 어스름이 내릴 즈음 가로등이 느슨하게 불을 밝힌다. 맑은 보라색이었다가 노르스름한 따뜻한 색이었다가 쨍한 흰색이 된다. 밤이 몰려와 세계가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갈수록 불빛은 반대로 더 밝아져 심야가 되면 그 아래 지나는 사물에 진한 그림자를 만들어준다.
가로등은 전신주를 겸하고 있어 온갖 전선들이 뒤섞여 있다. 전선으로 티비 신호가 흐르거나 인터넷 광케이블을 탄 데이터들의 01010101…. 신호 혹은 거친 쇳소리가 흐른다. 작업실로 들어오는 인터넷 선도 저들 중 하나에 길게 연결한 것이다. 제멋대로 엮이고 감긴 전선들이 가로등으로 밀집된 모양새가 꼭 이 동네 집들에서 펼쳐지는 고만고만한 삶들 같다. 사람이 사는 집은 무조건 검은 선으로 이어져 있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선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취향과 일상을 감싼 검은 선들이 수렴되는 가로등은 운명을 관장하는 어떤 존재일 지도 모른다. 이따금 깜빡이거나 불안한 소리도 내는 노란 가로등. 그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가 어떻게 알까.
가로등에서 밤이 밀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출렁이는 밤 그림자가 밀려오기 전 하늘은 가장 아름다운 장엄을 보여준다. 진한 주황빛이 엷은 하늘색과 뒤섞이며 화려한 군무를 보여준 뒤 희뿌연 살구색으로 가라앉은 후 검은 청색이 불투명하게 덮인다. 낮의 일상이 무너지고 밤의 혼돈이 거대한 세계를 형성하는 이 경계의 시간에, 기다렸다는 듯이 가로등이 켜진다. 경계의 시간을 지나면 검은 바다가 등장한다. 휘슬러가 수많은 녹턴에서 보여준 초록과 검정과 은색과 푸른색, 그리고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색채들이 덩어리가 되어 밀려온다. 그 풍경은 깊고 얕음이, 멀고 가까움이 없어 무한하고 무한하다. 무중력의 회색지대 같은 그곳을 제임스 터렐의 작품에서도 경험한 바 있다. 어둠에 익숙해져야만 서서히 드러나는 공간이 있었고, 보이지 않아서 무언가를 보게 했다. 어둠은 우주를 품고 있는 것일까? 그 우주는 인간 내면의 총합일까? 우주의 먼지, 그 빛나는 입자들을 온몸으로 맞이하듯 밤을 바라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억 개의 빛이 왜 저 가로등만큼도 밝지 못할까? 가로등은 밤과 나를 분리한다. 나는 어둠과 어둡지 않음의 경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존재다. 나는 바라보고, 나는 회의하고, 나는 침묵한다. 회의주의자에게 밤이란 스스로 경계의 존재임을 알게 하는 폐허의 시간이자, 어둠 속에 숨어 혼자 언어를 벼리는 환각의 시간이다.
인생을 절반쯤 산 인간에게 밤은 기묘한 서러움으로 다가온다. 흐릿한 멜랑콜리아. 인생은 행복과 기쁨을 찾아 헤매는 데 절반을 쓰고 나면, 나머지 절반은 슬픔을 규명하고 감내하며 보내는 게 아닌가 싶다. 언젠가는 내면이 단단해져서 만성적인 회의주의에서 벗어날 시간이 올 거라고 믿었다. 때가 되면, 느긋하고 유순하게 가던 길을 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경계에 서있는 자의 외로움이 걷힐 거라고. 결국 내게 다가온 깨달음이란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단 것이었다. 주저하고 회의하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쉽게 넘을 수 있는 금 앞에서 넘지 말아야 할 이유 백 가지를 대는,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대세에 따르지 않는. 공중곡예사인 필립프티(그가 금을 얼마나 좋아했냐면, 뉴욕 쌍둥이 타워-가 여전히 건재하던 시절 – 꼭대기에 올라 건물 사이에 줄을 걸고 그 줄 위를 걸었다)처럼 말이다.
밤이 오고 가로등이 켜진다. 거대한 멜랑콜리아를 견디는 붉은 심장이, 어제처럼 오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