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선의 달콤한 작업실 16
소리와 목소리
폴은 작은 물건들을 파는 가게를 운영한다. 카푸친 수도회의 수사 같은 스타일을 하고서는 도자기를 굽고 세계 여러 곳의 독특한 물건들도 수집해서 판다. 그녀는 나와 동갑내기인데다 동향인 점은 우연이라 해도, 검은 수사복 같은 옷차림을 좋아하고 성별 구분하는 장신구를 썩 좋아하지 않는 취향까지 관통하는 사이다. 게다가 그녀와 나는 둘 다 연남동에서 용산으로 이사를 한 경험도 공유하고 있다. 나는 폴의 가게에 가끔 가서 물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독특한 물건들이 갖고 있는 제각각의 이야기를. 그리고 꿈값을 내듯 값을 치르고 하나씩 내 작업실로 옮겨온다.
이번에 가져온 것은 음반이다. 다홍색 천으로 감싼 음반 케이스 중앙에 정사각형 산화구리판이 붙어있었는데, 적황색의 금속은 미세하게 녹슬어 제 몸에 기묘한 무늬를 만들었다.
“DMZ에서 녹음한 사운드 스케이프예요. 제작자는 영화음악감독 출신이고요.”
그녀는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 별로 없는데”라며 음악을 틀었다. 폴의 가게에 스산한 바람 소리가 휘몰아쳤다. 열두 개 트랙 모두 바람 소리로 가득했다. 풀잎이 바스락거리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폭우가 쏟아지고 새들이 지저귄다. 산사의 풍경 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무심한 바람. 이 길 위의 소리를 붙잡기 위해 복잡한 녹음 장비를 싣고서 얼마나 자주 그곳에 갔을까.
묘하게도 바람 소리에서 계절이 느껴졌다. 여름의 바람과 겨울의 바람은 소리에 묻어있는 물기도, 그 무게도 다르다. 온전한 자연의 소리가 남아있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오직 DMZ(비무장지대)뿐일지도 모른다. 오직 민간인통제구역이라는 경계 너머에서만이 자동차 엔진 소음이 자연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의 소리만을 담으려 한 것도 아니다. 국적을 가진 자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는 어느 경계에서 들리는 소리인 것이다.
그 소리들은 특별히 아름답거나 영롱하지 않았다. 황량했다. 숲을 스치고 언덕을 기어오르고 강물을 쓰다듬고 무심하고 아슬아슬한 소리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리되지 않은 소리들 속에 도시의 틀 안에서 안주하는 인간은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질서를 이해했다. 이 소리들도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을까? 영화 〈컨택트〉에서 들은 외계어 헵타포드어처럼, 목소리 같기도 하고 목소리가 아니기도 한 어떤 소리처럼. 자연이 내는 소리는 우리의 언어와 완전히 다른 체계의 언어일지 모른다. 혹은 노래인지도 모른다. 가령 이런 의미를 가진 노래. “…북쪽에서 철새 떼가 곧 도착한다니. 나무가 다칠까, 물이 병들까 걱정하지 말기를. 이미 많은 새가 오는 길에 죽어버렸으므로…거대한 폭풍이 시작되어 길 잃은 별들이 쏟아지고 세상은 아래와 위가 뒤바뀐다 하네…”
DMZ에서 시작된 바람은 남산 꼭대기에도 잠시 머물렀다 갈 테고, 어쩌면 나는 그와 닮은 소리를 이곳에서도 들을지 모른다. 남산 아랫길 해방촌 작은 서점에 한 문학평론가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 그 밤에 내 귀를 때리던 찬바람의 소리도 DMZ의 그 바람 소리였을지 모른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소리 위로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는 달콤했다. 겨울이야말로 인간의 언어에 압도적인 권력을 주는 계절임이 틀림없다. 나붓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언어의 주술에 나는 휘둘리고 만다. 목소리에는 무언가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다. 서점의 고요한 공기를 가르며 따뜻한 저음이 끊어질듯 이어졌다. 목소리는 강렬하게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다. 탄생과 더불어 소멸하는 것이다.
젊은 평론가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이야기했다. 나는 카버의 작품 《대성당》(문학동네, 2014)을 떠올렸다. 《대성당》의 내용은 이렇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과 함께 TV를 보게 된 주인공은 채널을 돌리다 대성당이 나오는 화면을 고정한다. 눈앞에 펼쳐진들 결코 보지 못하는 맹인은 당연히 대성당의 형태를 알지 못한다. 그는 맹인의 요청대로 대성당을 설명하려다 종이에 연필을 쥐어주며 그림을 그려 보인다. 그러니까 맹인의 손과 자신의 손을 겹친 채로 무언가를 그린다. 어느 순간 그는 눈을 감고 손에 의지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리하여 비로소 거대한 건축물의 경이를 맞닥뜨린 주인공의 경탄에 찬 목소리가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큰 따옴표는 멋진 도구다. 목소리의 실체를 드러내는 유일한 도구)
눈을 감고서 더 잘 보이는 것이 있고 목소리를 듣고서 더 잘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소리는 풍경이며 목소리는 안내자이므로, 이 둘은 우리의 상상을 더욱 거대하게 만든다. 젊은 평론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작업실로 돌아오니 벽을 통해서 옆집 사는 나이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암동 작업실은 오래된 목조 집인데다 한 채의 집을 절반으로 나누어 각각 한 집씩 들어와 사는 구조다. 게다가 나무벽으로 두 집이 나뉘어 있으니 목소리와 다양한 소리들이 서로 넘나드는 것이다.
벽을 통해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분자분 길게 말이 이어지지도 않았고 부부의 대화가 흐르지도 않았다. 기침소리, 낮은 탄식과 신음, 단발적인 응답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TV 소리 사이로 들린다. 그 소리와 목소리로 나는 무언가를 조금 알아챈다. 타인의 삶이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다가온다. 매일 저녁 6시엔 샤워를 하는 아들과 감기를 앓고 있는 아버지와 말없이 TV를 보는 어머니의 존재를 느낀다. 오래 지속되어온 한 가족의 삶, 나와 한 번도 교차한 적 없는 타인과 이렇듯 가까이 있음을 미세한 소리와 목소리로 듣는다. 그렇다면 나는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벽의 반대편에서 들리는 소리와 목소리는 어떠할까? 그들에게 ‘나’라는 상상은 어떤 형태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