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EFING

황현욱을 아시나요?

아주 오랫동안 미루고 있던 숙제를 해치운 듯 홀가분하다. 이번 특집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무실 컴퓨터에 저장된 ‘편집회의 기획안’ 문서파일을 검색해보니, ‘황현욱’을 처음 제안했던 때가 2006년 3월호더라. 그러니 이 기사를 실현시키는데 10년 걸린 셈이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황현욱과 인공갤러리에 집착하게 했을까? (손발 오그라드는 표현이지만) 그건 아마도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는 ‘짝사랑’ 같은 감정 때문 아니었을까. 어디 나뿐이랴, 우리는 살면서 ‘그/녀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녀를 알고 있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예컨대 전시를 보면서 작가와 작품을 혼자서 흠모한다거나 이런저런 책과 신문 잡지 따위를 훑어보며 온갖 잡다한 정보와 글귀를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아 두듯이 말이다. 나에겐 황현욱과 인공갤러리, 그리고 특집제목으로 인용한 박명욱의 책 《너무~ 너무~》(박가서·장, 1998/그린비, 2004)가 그 가운데 하나다.
이번 특집을 준비하며 “내가 마치 형사가 된 것 같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릿속에 막연한 계획과 밑그림만 그렸을 뿐, 단서하나 없이 백지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글이야 어떻게든 받으면 될 테지만 문제는 이미지. 명색이 미술전문지인데 참고 이미지 하나 없어서야 되겠는가.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처음부터 허탕이기 일쑤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황현욱이란 범인(?)을 꼭 잡고 싶다는 오기와 의지가 더욱 솟구쳤다. 이미지에 관한 첫 단서는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에서 찾았다. 거기서 인공갤러리 리플릿 자료가 쏟아져 나왔고, 이후 대구와 대전을 오가며 고인의 지인들이 간직하고 있던 먼지 쌓인 옛날 사진과 자료를 하나 둘씩 모으며 실마리를 풀어 나갔다.
한편으론 황현욱이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 사람과 만나며 탐문(探問) 수사를 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인생 공부’를 찐하게 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말이 많은 법. 같은 사실을 두고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같은 산(山)을 저 마다 다르게 기억하고 설명하는 꼴이었다. 당연히 산을 바라보는 위치도 다르고 정상에 오르는 등산로도 저마다 달랐기에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죽은 이를 기억하는 살아있는 사람(끼리)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신경전’과 ‘관계성’이었다. 역시나 인간관계란 참 어렵다!
아무튼, 아직 연초이고 하니 이 때쯤이면 ‘젊은 작가’나 ‘올해 주목 할 신진작가’ 같은 미래지향적인(?) 기사를 만들 법도 하지만 나는 오히려 뒤를 돌아본다. 황현욱도 물론이거니와 사진작가 정동석, 김지연 기사도 이런 맥락에서 만들었다. 그들은 애써 유명해지려고 안달부리거나 나대지 않았다. 묵묵히 혼자서 외길을 걸어 지금 여기까지 왔다. 공교롭게 故 황현욱, 정동석, 김지연 모두 1948년생. 나하고 20여 년 간극이 존재한다. 나는 20년 전부터 그들의 ‘의지’와 ‘작품’과 ‘삶의 태도’를 보며 성장했다. 이런 선배(세대)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다. 그런데 어느덧 나도 가끔씩 ‘꼰대’라는 말을 듣는 처지가 됐다. 말나온 김에 작정하고 꼰대 소리 한마디 하련다. 얼마 전 사석에서 ‘신생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느슨한 연대’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느슨한 연대’란 애당초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혼자서 한없이 헐렁하게 자유로운 ‘느슨함’과 강철같이 굳은 동지애로 굳건하게 결집함으로써만 가능한 ‘연대’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나는 ‘느슨한 연대’ 운운하는 일부 젊은 미술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도저도 아니게 어정쩡하게 양다리 걸치는 기회주의적인 모양새로 보이니까. 물론 그들의 행보가 내 맘에 들어야 한다거나 그럴 필요도 없지만 어쨌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