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

20세기 미국 추상미술계 우상인 작가 프랭크 스텔라는 자기의 회화작품을 설명하면서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고 말했다. 이 명언은 한편으로 그의 회화가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즉 그의 회화가 제시하는 것은 화면의 바깥세계에 실재했던 혹은 실재하는 (관객이 직접 경험하고 있지 않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화면의 형식 자체가 투명하고 실제적인 (관객이 직접 경험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매체가 곧 메시지’라는 설명이다. 다른 한편 그 명언은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본다’라는 인식론적인 명제도 의미한다. 즉 화면의 현실 자체가 관객의 관점과 관심에 따라 특수하게 지각된다는 뜻이다. 이 지각의 한계는 곧 하나의 현실을 놓고 상반된 두개의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는 모순의 근원이다. 따라서 그 명언은 그 모순을 극복하고 두 현실의 공존과 화합의 장을 이룩해야 한다는 윤리적인 요청을 암시한다.
예술감독 선정 과정에서 물의를 빚었던 부산비엔날레가 8월 20일 드디어 개막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공정하게 선정되었다고 구설에 오른 그 예술감독이 자국 프랑스 문화권 출신 작가들을 대거 선정하여 또 한 차례 물의를 빚고 있다.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그렇다 치고,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이다. 감독 선정이야 행정적인 문제로 보고 그 선정절차와 규정을 재검토해 오해의 여지가 없게끔 말끔하게 정리하면 되겠지만, 감독의 작가 선정은 까다로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와 전시기획자의 자율성 보장이라는 미술의 근본적인 대전제에 연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엔날레조직위원회에서 예술감독에게 각국의 작가 수를 고르게 맞추어 달라고 주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올해 부산비엔날레가 ‘프랑스판 비엔날레다’라는 지적은 정당하다. 그 지적은 부정적이지만 그 자체로 부산미술계의 건강한 상태를 시사한다. 그러나 그 지적이 부산미술계가 더 발전할 수 있는 자성의 계기가 되어야지 분열의 무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프랑스 문화권에서 다수의 작품이 선정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조건들을 확인해야 한다. 우선 전시기획의 개념을 검토해봐야 하고, 또 그 외의 조건들을 검토해보아야 한다. 편중된 작가 선정 결과만 놓고, 프랑스 예술감독의 ‘정치적 발상’이라거나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의 ‘문화사대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단편적이다. 더욱이 ‘비엔날레를 볼 필요가 없다’라든지 ‘비엔날레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식의 ‘전부가 아니면 제로(all or nothing)’라는 극단적인 태도는 궁극적으로 우리 미술계 발전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미술은 스스로의 생성조건을 드러내고 그것을 생산한 사회와 시대를 반영한다. 미술작품도 그렇고 미술작품들을 발표하는 전시도 그렇다. 올해 부산비엔날레는 협소하게는 부산미술계, 광범위하게는 우리 미술계와 우리 사회, 나아가서 동시대미술의 편향적이고 승자독식적인 성향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동양 지역에 편중되거나 서구지향적인 부산비엔날레가 될 것이라는 예고는 이미 물의를 일으킨 ‘공동 감독론’에서 명백히 경고되었었다. 보도된 공동 감독론에서 ‘서구지향적’이란 용어가 ‘프랑스판’을 의미한다는 구체적인 지표는 없었다. 아무튼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경고의 긴박성은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았고 부산지역 미술인들은 그 예고를 무시했다. 결국 그 예고는 현실로 다가왔고 현재 부산지역 작가들은 부산비엔날레 ‘파행’의 대안으로 새로운 트리엔날레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 트리엔날레가 대결의 경쟁심리에서 나온 발상이라면 이 역시 승자독식적인 자세를 의미한다. 비생산적인 대결의 상황보다 생산적인 화합의 장을 구성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지난 20여 년간 한국은 경제면에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제 문화적으로 발전해야 할 단계이다. 이 과제는 한국의 작가들과 큐레이터들, 예술행정가들에게 성숙함을 요구하고 세계 동시대미술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승자독식이라는 동시대미술의 극단적이며 경쟁적인 대립 성향은 지난 20세기 냉전시대의 특수한 산물이다. 21세기 한국에서 그런 구태의연한 자세와 미학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동시대미술의 성향을 개선하는 일에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작가들이 세계 동시대미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공헌들 중의 하나이다. 2014년 부산비엔날레는 신자유주의의 허점을 보완하고자 글로컬 개념으로 포장된 미학이 현재 부상하고 있음을 우리 눈앞에 엄연히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글로컬 미학 역시 과거 냉전미학의 사고방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냉전미학에 마침표를 찍고자 하는 우리는 그 미학을 직시하고 그 미학의 맹점을 간파해서 보완하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미학을 탐색해야 한다. 즉 동시대 미술을 힘의 논리에 입각한 대립의 시각이 아닌 상생의 논리에 입각한 화합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냉전의 유산이자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대결논리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대결논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세계시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그 대결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 잠재력을 개화시킬 수 있는 도상에 서 있음을 지각해야 할 것이다. 이견이 많은 2014년 부산비엔날레와 <무빙 트리엔날레>의 생성을 새로운 화합의 미학을 개척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즉 우리는 갈등이 아니라 미래에 다가올 화합의 싹을 지금 여기서 적나라하게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비엔날레를 혁신할 동력을 부산미술계 내부에서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한행길・뉴욕 코리아아트포럼 공동설립자 겸 디렉터, 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