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SHIN'S DESIGN ESSAY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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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미술 》 2002년 6월호에 게재된 안상수의 개인전 <한.글.상.상.>(로댕갤러리 2002.5.25~7.21) 기사.
“컴퓨터가 뛰어난 디자이너의 능력까지 위협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전문성의 평준화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21년 전 잡지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나에게 가장 경이로웠던 전문가는 편집장도 기자도 아닌 디자이너였다. 당시 기자는 제목과 본문을 모두 10포인트 글자로 써야 했다. 그걸 프린트해서 디자이너에게 넘겨주면 디자이너는 붉은색 사인펜으로 제목의 글꼴과 크기, 단의 폭과 자간, 행간 등의 지시사항을 써넣었다. 그 지시사항이 적힌 용지, 그리고 텍스트 데이터가 담긴 1.4MB짜리 디스켓을 사식집에 보내면, 반나절 뒤에 지시사항대로 출력된 인화지가 배달된다. 그 인화지를 가지고 대지란 걸 만든다. 디자이너는 대지 위에 유산지를 씌우고 그 위에다 또다시 지시사항을 적는다. 이번에는 색상에 대한 것으로 시안 30%, 마젠타 20%, 옐로 10%, 먹 40%, 뭐 이런 식으로 글자나 배경, 패턴이 있는 곳에 적는다. 지시사항이 적힌 흑백의 대지가 출력소를 다녀오면 컬러 교정쇄가 나온다. 그제서야 나는 디자이너가 기호처럼 적은 CMYK의 비율이 진짜 색상으로 바뀐 모습을 보는 것이다.
경이롭지 않은가! 그는 글자의 꼴과 크기, 단의 크기, 글자의 간격, 행의 간격, 그리고 삼원색과 먹색이 특정 비율로 합쳐졌을 때의 색상 따위를 모두 머릿속으로 정확하게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마치 차트에 영어로 알아들수 없는 전문용어를 쓰면서 처방을 내리는 의사와 같은, 대체할 수 없는 전문가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디자이너는 기자보다 뭔가 더 전문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애플 컴퓨터가 이런 디자이너의 위상을 위협했다. 이른바 위즈윅(what you see is what you get) 기능, 즉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것이 최종 인쇄된 것과 같다는, 이 똑똑한 기능이 디자이너의 신비감을 걷어내버렸다. 신비감을 걷어낸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컴퓨터 모니터에 디자이너가 선택한 글꼴, 색상, 레이아웃이 온전하게 드러났다. 데스크톱 출판 이전에는 마지막 교정쇄에서나 볼 수 있던 것이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처음부터 데스크톱 출판에 길든 사람에게는 이게 당연해 보일지 모르지만, 대지를 만들던 시대에는 이건 업계 비밀이 들통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자 참견꾼들, 훼방꾼들이 디자이너 등 뒤로 몰려들었다.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글자가 큰 거 아니야?” “고딕보다 명조가 안 나아?” “먹을 더 높여야 하는 거 아니야?” 아예 지시를 내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디자이너 옆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옐로 10%만 높여봐.” 디자이너로서는 속이 뒤집힐 일이다. 글 쓰는 사람 옆에 누가 앉아서 “야 그 단어 다른 걸로 써봐.” 하면 좋겠나! 물론 예전에도 발행인이나 편집장이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시간과 돈이라는 한계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에서는 바로 바로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컴퓨터는 디자이너들에게 엄청난 가능성을 줄 것으로 선전되었다. 실제로 컴퓨터는 디자이너들에게 빠른 시간에 많은 실험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런 장점보다 디자인 행위의 기술적 전문성이 위축당한 것이 훨씬 커 보인다. 물론 감각적 능력과 창의성은 그런 기술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므로 디자인 가치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건 아니다. 그렇지만 옛날처럼 대체 불가능한 전문성이라는 위상은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마치 금속활자가 생기자 필경사들의 지위가 추락한 것과 비슷하다.
앞으로 컴퓨터 기술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아예 사람 디자이너 대신 디자인을 직접 해줄 지도 모른다. 제레미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소설을 창작하는 컴퓨터를 만들었는데, 그 소설의 질이 형편없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출판되는 모든 소설과 견주면 중간 정도의 점수는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뛰어난 디자이너의 능력까지 위협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능력의 디자이너들에게는 분명 위협적 존재다. 컴퓨터는 전문성을 평준화한다. 요즘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인해 기존의 방송, 신문, 잡지와 같은 제도권 미디어 외에 수많은 미디어가 등장했다. 그 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아나운서, 개그맨, 사진가, 영상인이 등장한다. 신선하고 재미있는 경우도 많다. 인터넷 미디어의 아마추어적인 콘텐츠가 제도권의 프로가 제작한 콘텐츠를 위협하는 세상이다. 컴퓨터가 미디어를 다변화하고 전문성을 갉아먹고 있다. 전문가들이 먹고살기 더 힘들어졌다. 이 모든 발전은 디자이너와 같은 전문가가 아니라 그를 고용한 사장님과 자본가들에게만 유리하게 전개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