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shin’s design essay 2
의리는 이미지를 낳는다
김신 디자인 칼럼리스트
신문을 봐도, TV를 봐도 ‘의리’가 빠지지 않는다. 배우 김보성이 열연한 의리 광고를 처음 봤을 때 정말 웃긴다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트렌드가 될 줄은 몰랐다. 온갖 광고와 기사, 댓글 들에서 ‘의리’라는 단어를 인용한다. 신문과 잡지 등 미디어에서는 의리 열풍의 원인을 분석하는 기사가 쏟아진다. 대충 요약해보면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 한국 사회가 하도 정의롭지 못해서, 법도 원칙도 상식도 힘을 못 써서 정부, 기업, 개인 모두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리’의 첫 번째 사전적 뜻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다. 이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지금 필요한 건 의리라는 분석이다.
그렇지만 의리라는 단어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번 월드컵 한국 대표팀 홍명보 감독에 대한 비난의 키워드는 ‘의리 기용’이다. 오히려 의리 때문에 원칙과 상식을 버리고 특정 선수에게 특혜를 주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자기네들끼리 밀어주고 당겨줄 때 흔히 쓰는 말 “우리가 남이가?”도 이 의리를 강조한 말이다. 이때 의리는 법과 질서, 정의와 관계 없이, 남이야 어떻게 되든 같은 편끼리 잘 먹고 잘 살자는 뜻이다. 의리의 사전적 의미 중 세 번째가 “남남끼리 혈족 관계를 맺는 일”이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사나이’라는 말은 이렇게 혈족이 아닌데 공동의 이익을 위해 뭉친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배신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주문 같은 것이다. 마피아와 다를 바 없는 ‘관피아’라는 사람들이 바로 이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사내들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의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다. 옛날 폭력배들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이다. 아주 조잡한 글씨체로 ‘의리’니 ‘사랑’이니 하는 단어를 몸에다 새겨 넣었다. 조폭 영화 <넘버 쓰리>에 보면 떠돌이 건달 송강호가 새끼 건달들을 키우며 ‘건달’의 의미에 대해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의리’와 ‘충성’을 강조하며 건달 문하생들에게 문신 새길 것을 명령한다. 건달 사부는 말로 하는 교육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 것이다. 시각적 기호, 즉 이미지의 필요성을 무식한 3류 건달도 통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코믹한 <넘버 쓰리>와 달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로미시스>는 런던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마피아의 세계를 잔인하게 묘사한다. 주인공 비고 모테슨은 양 어깨와 무릎에 명예로운 별 문신을 새기는 것으로 조직의 회원으로 인정받는 의식을 치른다. 러시아 마피아의 문신 기호체계는 아주 정교해서 그것으로써 그의 계급은 물론 과거의 행적까지 알려준다.
문신은 지울 수 없는 낙인과 같다. 왜 그런 치명적인 결함을 몸에다 영구히 새길까? 그건 폭력배들이 갖는 직업적 취약성과 관계가 있는 거 같다. 살인과 협박, 갈취와 같은 가장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불법 조직에 조직원의 배신만큼 두려운 건 없다. 한 사람의 배신만으로도 조직이 와해될 수 있다. 어떻게 해서든 조직원의 배신을 막아야 한다. 배신은 곧 죽음이라는 인식을 뼛속 깊이 각인시켜줘야 한다. 이로써 살벌한 맹세 의식과 문신이 발달한다. 한국의 조폭과 일본 야쿠자의 몸을 휘감은 용 문신은 그들을 지켜주는 신용카드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영원히 구속하는 일종의 노예 표시인 셈이다.
그것은 또한 결속과 연대의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문신은 유럽 중세시대 영주의 문장(紋章)과 맥을 같이하기도 한다. 중세 유럽에서 문장이 발달한 것은 전쟁 때문이다. 기사의 갑옷과 방패, 말 안장 등에 새겨진 영주와 가문의 문장은 전투에서 적과 아군을 구별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계급과 명예를 드높이기도 한다. 문장의 이미지는 공포스러운 전투에서 도망치지 않고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명예롭게’ 희생하도록 독려한다. 아시아에서는 유독 일본에서 이런 문장이 발달했다. 왜 그런가? 15세기부터 일본은 극심한 내란 상태였다. 따라서 각 지방의 영주들은 아래 사무라이들의 결속력을 높이고 주군을 위한 희생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명예로운 가문의 문장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백 마디 말보다 이미지 하나가 사람을 강력하게 통제한다. 태평양전쟁 때 카미가제 특공대원들은 항공모함에서 휘날리는 욱일승천기의 붉은색 태양을 보며 천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러 떠날 수 있었다.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심벌 역시 당시 독일 젊은이들에게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10대의 어린 히틀러 유겐트(Hitler Jungend)들은 총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범죄집단의 문신과 전쟁을 치르는 영주의 문장, 제국주의 국가의 상징체계 모두 법과 질서, 정의가 사라진 탐욕스러운 상황, 쉽게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조건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배신을 막고 복종을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상징 이미지 체계가 발전했다. 우리끼리 배부르고자 할 때, 그러면서도 서로를 믿지 못할 때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의리를 강조한다. 그때 의리의 의미는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니라 “우리가 남이가?” 하는 식의 극단적인 집단 이기주의다. 그것은 결속과 배신 방지를 위한 이미지를 낳는다. 국가와 기업, 개인들 사이에서 오늘날처럼 치열하게 경쟁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대는 인류 역사상 없었다. 상징 이미지의 범람이 그걸 말해준다.●
제2차세계대전 히틀러 유겐트 포스터는 사회주의와 유대인이라는 적을 어린 히틀러 유겐트가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심벌로 막아내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위·김준 <Tattoo Guys> 혼합재료 120x42cmx4cm(각) 1995